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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영화평

서평 - 근본주의의 충돌

2001년 9월 11일, 여객기가 쌍둥이빌딩을 들이박고 그것이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을 때, 사람들은 ‘문명의 충돌’을 떠올렸다. 언론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야만성을 부각했고, 일부 좌파들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맞선 투쟁에서 무기력을 드러냈다.

‘근본주의의 충돌’은 이러한 시각에 반기를 든 책이다. 제목 자체가 ‘문명의 충돌’에 대한 반박이다. 이 책은 유대교·기독교 역시 획일적이고 전근대적인 문명과 사상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모든 근본주의의 어머니’는 미 제국주의 근본주의라고 옳게 주장한다.

이 책에는 7세기 이슬람의 태동에서부터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무려 14세기 동안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이 방대한 내용 중에서 특히 다음 부분들이 매우 인상깊다.

첫째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와하브주의의 뿌리를 다룬 부분이다. 와하브주의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교이며, 탈레반이 받아들인 사상이기도 하다.

18세기 이슬람 율법학자 무하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이슬람 초기의 순수한 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파했다. 코란이 명시한 금기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내리고, 이교도와 성전(聖戰)[지하드]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그 뼈대다. 그는 지역 족장 무하마드 이븐 사우드와 친분을 맺었다. 이븐 사우드는 아라비아 반도를 지배하려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상적 기반이 필요했고, 와하브는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무력이 필요했다.

1927년 사우디 아라비아가 창설된 뒤부터 와하브주의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교가 됐고, 사우드 왕가는 지금까지 가혹한 억압 통치를 민중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이 억압적 왕가를 줄곧 지원했다. 석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파키스탄 비밀 군사조직에게 와하브주의를 전수 받은 학생들(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똑같은 억압 통치를 실행했을 때 역시 영국과 미국은 이들을 지지했다.

둘째는 이스라엘과 파키스탄 국가 성립을 설명한 부분이다. 저자는 이스라엘과 파키스탄의 역사적 유사성을 지적한다. 둘 모두 세속적 민족주의로 탄생했으며,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국가 성립을 반대했다. 또, 둘 모두 영국 제국주의의 후원을 받아 창설됐고 이후 서방 국가들의 든든한 후원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둘 모두 건국과 동시에 전쟁(이스라엘은 1차 중동전쟁, 파키스탄은 1947년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의 전쟁)과 학살(팔레스타인에 대한 인종청소,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학살)을 자행했다.

셋째는 중동 민중의 반제국주의 저항을 묘사한 부분이다. 반제국주의 운동이 중동만큼 거대하게 벌어진 지역도 없다. 팔레스타인에서는 1936년과 1939년 민중 봉기(인티파다)가 있었고 이라크에서도 1938년 총파업이 벌어졌다. 1952년 이집트에서는 급진적 민족주의자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석유 기업과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1958년 이라크의 카심은 영국의 꼭두각시 파이잘 왕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1979년 이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국왕이 쫓겨났다.

저자는 이 지역의 반제국주의 정서를 다양한 에피소드·문학·인터뷰를 들어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반제국주의 운동 내부의 문제점도 잘 보여 준다. 중동 지역 공산당들의 스탈린주의 정치가 낳은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1979년 혁명 뒤 이란의 투데당[공산당]은 호메이니에게 투항해 호메이니의 억압 조치에 맞서 싸운 여성들을 ‘부르주아 여성들’이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그러나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호메이니는 투데당을 잔인하게 탄압했고 결국 투데당은 와해됐다. 이집트 공산당은 이스라엘 국가가 성립되자 ‘자결권 지지’를 들어 이를 지지해 버렸고 이 때문에 대다수 중동 민중은 공산당에 환멸을 느꼈다. 이스라엘 국가 성립을 지지한 이유는 단 하나였는데, 스탈린이 그것을 지지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타리크 알리는 몇 가지 오류를 범한다. 하나는 이란 혁명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저자는 이란 혁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것은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저항이자 계몽주의에 대한 저항이며, ‘유럽광(Eromania)’, ‘서양중독증(Westoxification)’에 대한 저항, 다시 말해 진보 그 자체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유명세를 타기도 전에 일어난 포스트모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란 혁명 자체는 명백한 반제국주의 노동자 혁명이었다. 1979년 거대한 파업이 잇달았고 공장에서는 쇼라라는 평의회가 건설됐다. 이 평의회는 대학, 도시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호메이니는 ‘단계 혁명론’을 맹신한 투데당의 무능력 때문에 생긴 권력의 공백 상태를 이용해 집권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구 소련에 우호적인 태도다. 저자는 구 소련이 미국에 비해 ‘도덕적 우월성’을 가졌으며, 소련의 존재 덕분에 쿠바, 베트남, 남아공 등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힘을 얻고 서구에서는 개혁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소련의 본질을 잘 보여 주었다. 소련은 미국에 대항한 ‘방파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제국주의 국가였다. 또, 이란 투데당과 이집트 공산당의 비극에서 보듯 스탈린주의 정치는 반제국주의 운동에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오류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이 책은 이슬람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는 매우 유익하고 탁월한 책이다.

한상원


서평 - 잔인한 이스라엘

원제목(〈알려지지 않은 시오니즘의 역사 The Hidden History of Zionism〉)이 말해 주듯이, 시오니즘의 신화와 끔찍한 폭력의 역사를 폭로한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억압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면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 랄프 쇤만은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단체인 ‘사회주의 행동’(Socialist Action)의 활동가다.


영화평 〈살인의 추억〉 - 형사의 추억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또는 1990년)까지 경기도 화성에서 실제로 발생한 7∼10건의 연쇄 살인 사건에 관한 영화다. 배우 송강호의 매력, 미끈한 만듦새, 범인이 잡히지 않고 아직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사건이란 점에서 영화는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개봉 17일 만에 관객 250만 명을 동원하는 기록적인 흥행을 계속하고 있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는 포스터 카피가 말하듯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건을 담당한 형사들이다. 이들의 수사 방법은 간단하다. 용의자를 정하면 무조건 고통과 공포를 주면서 자백을 받아 낸다. 범인 아닌 사람이 사형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등장하는 모든 형사들은 불법 감금, 증거 조작, 잠 안 재우기, 살해 위협, 구타와 고문의 공범들이다. 〈살인의 추억〉은 이런 장면들을 희화화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고통과 상처는 허구가 아니었다. 실제의 장애인 용의자는 영화에서처럼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었다. 모두 3명의 용의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살했다.

사건 수사 1년여가 지난 즈음 신문 기사를 보면, 자백을 얻기 위한 경찰의 범행을 짐작할 수 있다. 소제목이 “경찰, ‘끼워 맞추기’식 억지수사”다. 경찰이 영장을 신청했던 4번째 용의자도 자백이 먼저였고 수색 끝에 찾아 낸 증거물은 손톱깎기였다. 그래서 경찰은 하루 만에 칼이 아니라 손톱깎기로 범행했다고 다시 자백을 받아 냈다. 그러나 감식 결과, 흉기는 드라이버나 송곳이었고 영장은 기각됐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 “시대에 대한 논평”이 있다고 자부한다. 인터뷰마다 “80년대”가 화성 사건을 확대했다고 말한다. 과연 영화는 6번째 살인이, 독재 정권이 국민 통제의 일환으로 실시했던 등화관제의 보호 아래 발생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형사들의 추억’이란 점은 “시대에 대한 논평”을 심하게 일그러뜨린다.

불법 감금한 사람들을 흠집 나지 않게 패려고 형사들은 군홧발에 헝겊을 씌운다. 〈살인의 추억〉은 이런 자들을 시대의 희생자처럼 그렸다. 그러나 〈박하사탕〉의 형사와 달리 이 자들은 참회하지 않는다. 가장 악독한 형사는 나중에 한쪽 다리를 잃는다. 그러자 그가 여성과 장애인을 짓이겨 밟을 때 애용했던 헝겊 씌운 군화를 애상적 음악과 함께 클로즈업해 관객에게 연민을 호소한다.

과연 그가, 영화 속 TV 뉴스에도 등장하는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문귀동 형사와 뭐가 다른가? 오히려 그 뉴스를 보고 분개한 젊은이들은 형사들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를 확보하는 데 훼방꾼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1987년 봄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안기부의 박종철 치사 사건과 함께 독재 정권의 명을 재촉했다.

원래 검사나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TV시리즈와 영화 들 ― 〈모래시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공공의 적〉 등 ― 은 사람들의 모순된 생각을 이용해왔다. 검사와 형사는 조폭보다 더 한 놈들이라는 현실의 경험과 정의로운 검사나 형사가 악당을 처벌해 주는 영웅담에 대한 갈증 사이에서 후자를 이용해 왔다. 그러나 현실의 검찰·경찰은 범죄적이고 타락해 있다. 또 파업, 농성, 집회, 시위에 대해서 마치 부자들의 사조직 같다. 이런 점에서 진실에 가까운 영화가 〈박하사탕〉과 이고 아주 먼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다.

경찰청은 청사 대강당에서 〈살인의 추억〉을 특별 상영하면서 “영화 속 일부 장면은 과거 경찰의 모습”이라고 태연했다. 그러나 작년에도 검찰에서 조사받던 피의자가 수사관들의 구타와 물고문으로 죽었다. 2년여 전 검찰청과 구치소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경험한 경찰과 검찰의 위압감, 협잡, 허위 자백 강요, 잠 안 재우기, 폭행을 새삼스러워하지 않았다. 여전히 ‘공권력’은 연쇄살인자보다 더 가깝고 더 악한 폭력이다.

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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