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피를 못 잡는 정부의 신종플루 대책:
백신을 무상공급하고 휴교와 유급 휴가를 확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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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신종플루 확산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신종플루 사망자가 1천 명을 훌쩍 넘어선 미국은 지난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동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확산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현재 대유행 수준의 경고 단계를 하향조정하는 데에는 2∼3년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WHO는 가난한 국가에서 “폭발적[으로] 발생”할 거라고 경고했다. WHO는 선진국한테서 백신을 기증 받아 1백여 곳의 개발도상국에 제공할 계획을 세웠지만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조차 백신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능할지 의문이다.
한국에서도 신종플루가 경악스런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10월 초에는 환자가 하루 평균 8백여 명이 발생했지만 10월 마지막 주에는 열 곱절이 훨씬 넘는 1만 명씩 환자가 발생했다. 신종플루 때문에 휴교한 학교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11월 2일 휴교한 학교는 5백28곳으로 겨우 3주 만에 2백60 곱절 이상 늘었다. 국가재난단계도 가장 높은 ‘심각’으로 상향 조정됐다.
이처럼 신종플루가 급속도로 확산한 데에는 이명박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대책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겨우 한 달 전쯤에 질병관리본부는 신종플루를 계절 독감으로 선언하고 국가대응태세도 ‘평시로 전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가을이 돼 날씨가 쌀쌀해지면 신종플루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 명백했는데도 말이다.
10월 중순부터 신종플루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산할 때에도 정부의 대책은 언제나 뒷북이었다. 확진검사 없이 타미플루를 처방하라는 지침은 1주일이나 늦었다. 그러다 보니 환자들은 확진검사를 받으려고 병원에서 2∼3시간을 기다렸고, 검사가 폭주해 결과가 나오는 데도 며칠이 더 걸려 적절한 투약시기를 놓쳤다.
전국의 약국에 타미플루를 배포한 것도 10월 말이 돼서야 이뤄졌다. 이것도 ‘지르고 보자’ 식으로 발표해 정작 치료약을 구비하지 못한 약국이 속출해 환자들을 헛걸음치게 만들었다.
그나마 지금 수준의 타미플루 수요만으로도 한 달이면 비축량은 동이 날 것이다. WHO가 타미플루를 충분히 비축하라고 권고한 지 5년이 넘도록 ‘개무시’한 결과다.
백신도 문제다. 천만다행으로 2회 접종이 아닌 1회 접종만으로도 효과가 나타난다지만, 여전히 백신 공급 부족으로 접종의 우선순위 문제가 남는다. 정부는 입만 열면 ‘고위험군이 위험하다’고 선전했지만 정작 노인과 만성질환자 등 ‘고위험군’은 내년 1월이 돼서야 접종할 수 있다. 접종 후 면역력이 생기는 데 2주 정도가 걸리는 것을 고려하면, 본격적으로 날씨가 추워지는 상황에서 사실상 생명을 운에 맡기라는 것이다.
백신이 부족하다보니 접종 계획도 뒤죽박죽이다. 의료인은 접종을 시작했지만 환자들과도 접촉하는 병원의 사무직 노동자는 접종을 받을 수 없다. 학생들은 11월 중순부터 접종하지만 함께 생활하는 교사는 접종 대상이 아니다!
허둥지둥
군인들의 외출과 휴가도 통제하겠다고 하는 마당에 직장에서 전염 가능성에 노출된 수많은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다. 게다가 아이들은 집에서 쉬라고 하고는 정작 부모들이 직장에 나가야 하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따라서 “직장 내에 신종플루 환자나 의심환자가 생겼을 경우 유급으로 1주일 이상 쉴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이상윤, 건강과대안 상임연구원)
비용 문제도 있다. 신종플루 검사비는 15만 원 정도로 돈이 없는 저소득층에게 언감생심일 뿐이다. 또 전 국민의 65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의 예방접종을 민간의료기관에 떠넘기고 1조 원에 달하는 비용을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하고 있다.
학교에서 생기기 쉬운 집단 감염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얼마 전까지 교문 앞에서 학생들을 줄 세워 놓고 한 발열검사는 전형적인 전시행정으로 오히려 추운 날씨에 학생들을 신종플루에 더 취약하게 했을 것이다.
취약한 공공의료시설의 문제점도 곳곳에서 나타났다. 격리병상이 턱없이 부족해 ‘대유행’ 상황에 걸맞는 치료와 질병 통제가 불가능하다. 영남과 강원, 충청도에는 국가지정 격리병상이 하나도 없어 부산에서 발생한 환자를 서울이나 목포로 옮긴 적도 있다. 한국은 공공병상도 11퍼센트밖에 안 돼 미국(30퍼센트)보다도 현저히 낮다. 그럼에도 이명박은 의료민영화 추진에 정신이 팔려 있다.
공포가 커지자 지난달 27일 정부는 담화문을 발표해 신종플루의 “치명률은 예년의 계절독감과 같거나 낮”아서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꿈 같은 소리만 해댔다.
물론, 신종플루의 치사율은 높지 않다. 문제는 너무 빨리 번져 환자가 폭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치사율이 낮다고 해도 감염 환자 수가 엄청나다면 사망자도 비례해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신종플루가 변이를 일으킬 수도 있다. 타미플루에 내성을 보이는 바이러스뿐 아니라 신종플루가 사람에서 돼지로 전염된 사례도 미국, 영국, 호주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돼지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키기 좋은 ‘혼합용기’이기 때문에 새로운 ‘괴물’이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다.
무엇보다 치사율 60퍼센트(신종플루 치사율은 0.03퍼센트다)인 조류독감과 결합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신종플루가 맹위를 떨치는 중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조류독감으로 12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과학자들이 10년 전부터 타미플루 비축과 인플루엔자 대유행을 경고한 것은 조류독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약한 신종플루에도 정부는 이렇게 허둥지둥대는 것이다.
더 큰 재앙을 막으려면 당장 백신을 무상 공급하고 치료제 강제 실시 등으로 무상 치료를 시행해야 한다. 임시 휴교와 유급 휴가를 확대하고 의료 공공성을 파괴하는 의료 민영화를 지금 당장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