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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하먼(1942~2009년) 조사(弔詞):
크리스 하먼을 기억하며

다함께 운영위원이자 국제연락 간사인 최일붕이 지난 11월 7일 사망한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WP) 지도자 크리스 하먼과의 만남을 회고한다. 하먼은 국제적 사회주의 조류의 하나인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선도적 이론가이기도 하다.

크리스 하먼(1942~2009년)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집트 사회주의자, 반전운동가, 반신자유주의자 들이 연 포럼에 연사로 참가하던 중 11월 7일 심장마비로 사망(향년 66세)한 사실은 이제 세계 좌파진영에 두루 알려져 있다. 크리스의 시신은 이집트 정부의 관료적 형식 절차 때문에 지금까지 영국으로 이송되지 못하고 있다.

크리스의 유족은 동지이자 배우자인 탈라트 아메드(Talat Ahmed)와 아들 세스(Seth)와 딸 슈네이(Sinéad)가 있다. 셋 다 SWP 당원들이고, 특히 딸은 런던 북부지역 어느 지회의 지회장이다.

나는 1990년 6월 말 처음으로 크리스를 만났다. 해마다 런던에서 SWP 주최로 열리는 여름 포럼인 ‘마르크시즘’에 처음 참석하려고 런던에서 머물던 중이었다. 내가 그에게서 받은 첫 인상은 그가 게슈타포 장교처럼 생겼다는 것이었다(지금은 영화배우 리암 니슨을 보면 그가 생각나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는 당시 사상이 형편없이 뒤죽박죽이던 나의 주장을 조금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지 않고 즉각 반론을 폈다. 나는 겨우 1년여 전 중국 공산당 정부의 톈안먼 항쟁 유혈 진압을 경험하고야 비로소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였는데, 돌이켜보건대 절충주의적으로 뒤범벅된 이전의 사상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상처 받은 자존심 때문에 언짢고 심기가 불편해졌지만, 나는 ‘마르크시즘’의 여러 토론회들에 참석하면서 생각이 점점 명료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그에 따라 자신감도 되살아나, 그동안 소심하게 꽁해진 마음을 풀고 크리스에게 관대해졌다. 특히, 당시 전개되고 있던 동유럽 스탈린 체제 붕괴에 대한 크리스의 강연에는 1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참석해 매우 집중해 경청했다. 이 발제를 들으며 나는 크리스가 정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구나 하고 느꼈다.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마르크시즘’ 포럼이 끝나던 날 크리스는 내게 함께 뒤풀이를 하자며 자기 연인인 탈라트를 인사시켜 줬다. 나는 큰 실례이게도 크리스에게 탈라트가 그의 수양딸이냐고 물었다. 탈라트는 크리스보다 스무살 가량 어리다.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아연해지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지만, 크리스는 파안대소하며 자신의 정신연령은 아직도 20대라고 받아넘겼다. 그리고는 맥주 한 조끼를 사주며 한국 노동자·학생 운동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크리스와의 두 번째 대면은 그가 탈라트와 함께 1991년 7월 20일경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8월 8일경 한국을 떠나기까지 20일 정도 내 집에 머문 그는 중간에 설악산 내설악과 지리산을 텐트에서 자며 거뜬히 등산할 만큼 건강했다.

그리고 그는 일주일은 온전히 시간을 내어, 당시 내가 조직한 한국 국제사회주의자 단체의 회원 교육에 발제자로 참여했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국가 탄압이 혹심한 상황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그 교육에는 겨우 스무 명 남짓이 참석했다. 열두세 가지 주제에 대한 공식 발제 외에도 다른 수많은 문제에 대한 질문이 쏟아져 교육은 날마다 예닐곱 시간씩 진행됐고, 끝나면 어김없이 뒤풀이 자리가 이어졌다. 크리스는 단 한 차례도 짜증을 내지 않고 실로 참을성 있게 질문에 답하고 뒤풀이 자리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어느 날 민섭이라는 동지가 뒤풀이 술자리에서 크리스가 화장실 간 사이에 크리스의 맥주 잔에 몰래 값싼 국산 양주를 탔다. 크리스가 빨리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민섭이 먼저 취해 다른 사람들에 업혀 먼저 귀가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민섭이 한 짓을 크리스에게 일러바치면서, 민섭이 군대에서 의병 제대한 후 몸이 약해졌다고 하자 크리스는 큰 우려를 나타내며 민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리고 그가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때 그가 내면 깊숙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는 소련 사회의 진정한 성격에 대한 교육 중에 소련이 반동적 쿠데타냐 아래로부터의 대중 반란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전망했다. 그가 돌아가고 열흘 뒤 그의 예견대로 소련에서 격변이 일어났는데, 반동 쿠데타와 그에 반대한 대중 저항이 모두 일어났다.

그의 교육 덕분에 한국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격동적 사태에 신속히, 제대로 대처할 수 있었다. 나는 쓰거나 번역한 기사, 논문 등을 묶어 책자 형태로 내어 소련이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이기는커녕 자본주의의 관료적 변형태인 국가자본주의이므로 보수파 관료들의 쿠데타를 지지하지 말고 대중의 저항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경제와 서방에 우호적인 옐친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정치적 주장이 호소력이 있어, 스무 명 남짓이던 한국 국제사회주의자들은 그해 말경 무려 1백80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하순경 보안경찰이 우리의 수련회 현장을 급습해 수십여 명이 연행되고 나를 포함한 여러 주요 조직자들이 수배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보안경찰은 이럭저럭 크리스의 교육 사실을 알아내, 공소장에 크리스 하먼을 “한국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수괴”로 지목했다.

거인의 발자국을 따라

이 때문에 크리스는 십여 년 간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다가 지난 2005년에야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새로운 인물들로 이뤄진 새로운 단체인 다함께의 여름 포럼 ‘전쟁과 변혁의 시대’에서 21세기 혁명과 자율주의 등에 대해 강연을 했다. 당시 다함께는 회원의 거의 전부가 2000년대 전반부의 반신자유주의/반전 운동으로 이끌려 들어온 급진적 청년들이어서 대부분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혁명, 혁명적 정치조직, 민주집중제 따위의 사상에 대해 매우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크리스의 발제가 하도 설득력 있었던 나머지 ‘21세기 혁명’ 제하의 토론회에서는 크리스의 발제가 끝나고 이어진 청중 토론에서 일부 치기 어린 참석자가 거의 간증하듯이 혁명적 신념을 고백하고 일부 자유주의적 참석자가 이에 예민하게 반대하는 주장을 개진하는 자못 긴장된 순간도 있었다.

크리스가 그해 방한을 마치고 자기 나라로 귀국하기 전에 나는 SWP가 유럽을 벗어나 남반구 지역 IST 경향 조직들과 더 긴밀하게 토론해야 한다고 비판해 어색한 긴장을 빚었다. 이런 상황이 부담스러운 통역자가 내 주장을 통역하기를 거부해, 완벽한 한-영 2개 국어 병용자인 그보다 통역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내가 직접 다른 동지들에게 통역하며 크리스와 토론했다. 이듬해 크리스는 내 의견이 SWP의 월간지인 《소셜리스트 리뷰》의 편집에 반영됐다고 했다. 또, 그는 한국 조직이 대학생을 중시하는 것을 보고 SWP도 대학생 조직을 강화하기 시작했다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2008년부터는 유럽 바깥의 조직들과 더 긴밀히 소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는 마음이 열린 마르크스주의자/사회주의자였다. 경험으로나 능력으로나 자신과 비교 대상이 안 되는 내 의견도 그는 경청할 줄 알았다.

사실, 그 자신은 언제나 이집트 외에도 인도, 파키스탄, 중국, 터키,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남아공 등등 남반구 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정치 활동을 했다. 파키스탄과 이집트 조직의 경우에는 옛 한국 국제사회주의자 조직의 경우처럼 그가 ‘수괴’다.

크리스는 올해 여름에도 방한해 다함께의 ‘맑시즘 2009’에서 현재의 경제 위기, 세계 노동계급, 제국주의 등의 주제들에 대해 강연을 했다. 탈라트도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이란 등에 대해 발표했다. 한 번은 크리스가 너무 빨리 말해 완벽한 한-영 2개 국어 병용자인 통역자도 그의 말을 놓치는 순간이 두세 차례 있었다. 그러자 앞쪽 좌석에 앉아 있던 탈라트가 “크게 말해요!” 하고 크게 소리쳤다. 크리스는 헤헤 하고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뒤에 앉은 여성들이 “혼나고도 좋댄다” 하고 킥킥킥 웃었다.

이렇게 크리스는 탈라트를 사랑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길에는 언제나 사랑이 물씬 묻어났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SWP 당원이 없겠지만 특히 탈라트는 현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고 받아들이기도 힘들 것이다.

올해 여름 한국 방문을 마치고 중국을 향해 떠나던 크리스의 모습이 선하다. 그렇게 건강했던 그가 죽다니! 그의 사망은 IST 경향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손실이다. 그는 옛 소련 국가자본주의 제도 붕괴 후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좌파의 이데올로기 혼돈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지킨 대가이자 거장이고 달인이었다.

크리스는 경제 분석뿐 아니라 철학과 역사학, 문학, 전략과 전술 등 거의 모든 문제들을 다루며 수많은 논문, 논설, 기사, 책 등등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각종 회의 참석, 집회 시위 조직, 파업 지원 활동에도 빠지지 않았다.

거인이 사라진 숲 속 오솔길을 나란히 손 붙잡고 올라가는 어린이들처럼 우리는 거인의 발자국을 따라 계속 전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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