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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구ㆍ김태훈 동지 법정 투쟁

지난 11월 30일과 12월 1일에는 두 동지의 재판이 있었다. 11월 30일 10시 의정부 지방법원 2호실에서 강철구 경희대 대표 재판이 있었고 12월 1일 11시 서초동 서울 지방법원 319호실에서 김태훈 광운대 대표 재판이 열렸다.

두 재판 모두에 많은 학생 그룹 동지들이 참여했다. 강철구 동지 재판은 의정부에서 아침 10시에 열렸는데도 76명의 학생 그룹 동지와 지인들이 방청했고, 다음날 서초동에서 열린 김태훈 동지 재판에도 61명이 방청했다.

첫 법정 투쟁인 강철구 동지 재판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강철구 동지가 법정에 들어서면서 "국가보안법 철폐하라"라는 구호를 힘있게 외치자 76명의 동지들은 온 힘을 다해 구호를 따라 외치고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판사는 강철구 동지와 재판을 방청한 우리의 자신감 찬 모습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판사는 당황한 나머지 재판을 중단시켰다. 구호를 외친 강철구 동지는 끌려나갔고 판사는 "문 닫아. 다들 끌고 나가." 하고 고함쳤다.

우리가 이런 판사의 도발에 주눅들지 않고 강력히 항의한 것은 완전히 올바른 것이었다. 우리를 끌어내려는 데 격분해 잠시 밖으로 뛰쳐나갔던 우리는 다시 법정 안으로 들어가 재판 속개를 요구했다. 그러나, 판사는 변호사를 통해 "이런 상황에서는 도무지 재판을 할 수 없다"라는 말만 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될 가능성이 없다는 게 명백해지자 우리는 법정 밖 마당에 모여 정리 집회를 했다. 재판부에 즉각 항의를 했기에 우리의 사기가 꺾이지는 않았으나, 아침 일찍 멀리서 강철구 동지를 보러 달려온 많은 동지들에게 재판 연기는 분명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이 때 우리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준 사람은 다름아닌 강철구 동지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학생들이 오랫만에 만나 반가워서 박수를 쳤기로서니 그게 무슨 큰 잘못이냐. 우리가 도둑놈이야? 문닫아라 하게." 하며 재판부를 강하게 성토했다.

또 이렇게 말씀하기도 했다. "내가 직장 다니는데 재판 때문에 오늘 안 나갔다. 그런데 재판이 무산됐으니 내가 손해배상청구를 해야겠다. 재판부는 나한테 손해배상해야 한다. 좀 전에 재판부에 항의하러 갔는데 받아 주지 않았다. 판사가 안 만나 주면 나는 여기서 안 간다."

어머니는 판사 면담을 요구했으나 법정 서리는 판사가 6시까지 재판이 있어서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6시까지 기다려 면담을 하고야 말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고 어머니의 이런 강경함이 우리가 자신감 있게 싸워 나가는 데 중요한 힘을 주었다.

강철구 동지의 굳건하고 단호한 태도 또한 우리를 고무시켰다. 그는 변호사를 통해 재판이 길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구호 외치고 박수칠 것이라며 굽히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우리는 어머니가 판사를 면담할 때까지 법정 밖에서 집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판사는 우리를 내보내고 나서 그 재판정에서 다른 사건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집회하던 자리는 그 재판정 바로 앞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판사가 다른 사건을 재판하는 동안 있는 힘껏 목청을 다해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강철구를 석방하라" "어머니 면담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의정부 지원이 워낙 작아서 우리가 외치는 구호와 노래 소리는 판사가 있던 재판정은 물론 의정부 지원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다. 법원에 드나드는 방문객은 물론, 법원과 검찰청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나와 집회를 구경했기에 우리는 더욱 신나서 목소리를 드높였다.

우리는 어머니가 판사를 면담할 때까지 재판정 앞에서 연좌 시위를 계속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강철구 동지가 구치소로 돌아가기 위해 호송차에 오를 때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우리는 호송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강철구 동지가 호송차에 탈 때까지 호송차 옆에서 계속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의정부 지법이 워낙 작아서 우리가 외치는 구호 소리와 노래 소리가 강철구 동지의 귀에 선명히 들릴 것이었기에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외치면서도 지칠 줄을 몰랐다.

이런 투쟁 끝에 우리는 호송차에 오르는 강철구 동지를 열렬한 박수 갈채와 환호로 배웅할 수 있었다. 강철구 동지가 나타났을 때 터지던 함성과 구호와 박수 갈채, 그가 탄 호송 버스 창문을 두들기던 일, 마침내 그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서 울려 퍼지던 구호와 노래 소리는, 그 날 재판 투쟁에 참가한 모든 동지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아로새겨질 가슴 벅찬 기억이었다.

우리는 사기가 충천했던 나머지, 호송차를 보낸 직후 시위 내내 사진을 찍던 보안 경찰에게 필름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며 싸워서 결국 두 통의 필름도 돌려받았다.

우리는 강철구 동지 재판 투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 날의 통쾌한 승리로 우리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아졌고, 이것은 바로 다음 날 있었던 김태훈 씨 재판에 많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61명이나 참가하게 만들었다.

전 날의 승리 때문에 김태훈 동지 재판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다. 검사와 판사 모두 의정부 지법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았을 것이고, 게다가 재판 당일 〈한겨레〉 하단에 크게 실린 '국가보안법 철폐 1천인 서명' 광고를 보고 우리를 괜시리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김태훈 동지는 재판 내내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는 심리에서 폭력 혁명을 찬성하는 활동을 하지 않았냐는 검찰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검찰은 내 공소장에서 폭력 혁명이라는 말을 무려 9차례나 썼다. 이런 강조는 의도적인 것이다. 마치 사회주의자들이 피도 눈물도 없고 폭력을 즐기는 사람인 양 묘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무릇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 같은 부르주아 혁명부터 노동자 혁명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수반한다. 폭력 혁명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검찰은 폭력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지배자들이 폭력을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미사일과 탱크 등 인간의 삶과는 아무 관련 없이 오직 파괴하는 데 쓸 무기 경쟁을 일삼는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폭력적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폭력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단순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폭력적인 체제에 맞서 노동자와 학생 들이 투쟁할 때, 노동자 대회 때처럼 경찰이 폭력을 휘두른다면 자위적인 차원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지지한다. 이것이 폭력에 대한 나의 기본 입장이다."

김태훈 동지가 검찰의 위선적 논리를 통쾌하게 반박하자 검찰은 답변을 해 주겠다며 군색한 변명조로 이렇게 말했다. "검찰은 사회주의자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태훈 동지의 최후 진술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우리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폭로와 날로 벌어지는 빈부격차에 대한 통렬한 고발, 그리고 체제에 맞서는 투쟁에 함께할 것을 호소하는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가슴을 파고드는 그의 연설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검사와 판사의 주눅든 태도에서 전날의 통쾌한 승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김태훈 동지의 당당한 모습은 우리의 사기를 더한층 높였다.

우리는 두 법정 투쟁 모두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승리는 결코 우연히,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었다.

승리를 거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피고인이 된 두 동지 자신의 용기 외에, 학생 그룹 동지들이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세력, 즉 조직으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감옥에 있는 두 동지와 재판에 참가한 동지들 모두에 적용되는 것이다.

강철구와 김태훈 동지는 모두 자신을 단순한 개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조직의 리더로서 흔들림 없는 신념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굳건한 태도가 재판에 참가한 동지들의 사기를 높였고 강철구 동지 재판의 경우에는 판사의 도발에 끝까지 맞설 수 있게 한 힘이 됐다.

재판에 참가한 동지들이 개인들로서 행동하지 않고 철저하게 조직으로서 움직인 것 또한 승리를 거둔 중요한 요소였다. 의정부 지원에서 항의 시위를 할 때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집단으로, 단체로 싸웠는데, 이것은 법원 안 시위가 금지돼 있는 상태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시위 도중 전경들이 출동하기도 했으나, 불필요하게 경찰을 도발하는 개인 행동 대신 굳게 결속된 대열을 유지해 집단으로 항의하고 구호를 외치며 싸웠기 때문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재판 당일 있었던 행동뿐 아니라 그 전부터 우리가 해 왔던 석방 캠페인 역시 두 재판의 승리에서 아주 중요했다. 11월 6일 의정부 검찰청 앞 시위와 11월 24일 서울지방검찰청 앞에서 열렸던 집회, 각 대학과 많은 집회에서 열정적으로 했던 서명과 모금 활동의 결과로 실린 12월 1일의 대형 광고는 검찰과 재판부를 압박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물론 우리가 승리를 거둔 데는 국가보안법 철폐 캠페인이 고조되고 있던 정세와도 관련이 있고 다음 날 재판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의정부 지법 투쟁에서 의정부 지법이 서초동 서울 지법보다 허술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조직돼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런 유리한 조건을 활용해 적의 허를 찌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개인들이 아니라 조직으로서 움직였기 때문에 또한 우리는 1987년 이후 지속된 몇 년의 고양기 동안에나 볼 수 있었던 높은 수위의 법정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재판에 참가한 당원들은 우리 그룹의 지난 개입 활동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참가한 능동적인 당원으로 높은 자신감과 열정과 규율을 갖고 있었다.

의정부 재판에서 방청 조직자인 조승희 동지의 훌륭한 지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강철구 어머니가 끝까지 남아 판사와 면담하겠다고 할 때 재판 참가자들에게 어머니와 함께 남아 싸울 것을 호소했던 것이라든가, 필름을 돌려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다 보안 경찰과 몸싸움이 벌어졌을 때 격분한 한 동지가 보안 경찰을 후려칠 뻔한 것을 만류한 것은 아주 현명한 것이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를 우리는 주의해야 하는데, 법원 안 시위가 금지(법원 1백 미터 전방에서 집회를 할 수 없는 현행 법률 때문에 지난 11월 6일 의정부 검찰청 앞 시위는 검찰청 건물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러졌던 점을 기억해 보라)돼 있는 데다 경찰을 때렸다면 순식간에 판세가 역전될 수도 있었다.

물론 보안 경찰을 보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적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심이 아니라 세력 관계를 파악해 사태 진행을 예견할 수 있는 냉철한 판단력이다.

앞으로의 법정 투쟁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는 이 점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적들은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언제고 다시 반격을 꾀할 것이다. 두 재판에서 얻었던 교훈, 즉 우리가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세력으로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재판 투쟁을 철저하게 조직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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