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엔이 아이티에서 한 일:
특권층을 보호하거나 무능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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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홀워드는 미들섹스 대학 유럽철학 교수이자 《홍수를 막기 : 아이티, 아리스티드와 봉쇄의 정치학》을 쓴 저명한 아이티 전문가다.
2010년 1월 12일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발생한 후 열흘이 지난 지금, 미국과 유엔이 주도한 ‘구호 작전’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명백해졌다.
미국과 유엔은 군사적 필요와 군사 전략을 우선시했고 아이티 민중의 필요를 완전히 배제했다. 그들은 아이티의 끔찍한 빈부 격차를 고착화하고 오히려 심화하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곧 시작될 이른바 ‘재건’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지속될 것이다. 만약 이에 맞선 단호한 정치적 행동이 취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2010년 1월 19일 포르토프랭스 주둔 유엔군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장갑차를 앞세우며 ‘구호활동’을 한다고 우기는 유엔군 ⓒUN PHOTO
아이티 ― 저항의 역사
아이티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일 뿐 아니라 가장 불평등한 나라이기도 하다. 소수의 부자와 권문세가들이 이 나라를 지배해 왔고, 아이티 인구의 절반 이상은 하루 가구수입이 44센트[약 5백 원]가 안 된다.
최근 몇십 년 동안 대중의 경제적 고통은 더 커졌다. 1970년대부터 국제기구가 강요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긴축정책은 독립 이후 아이티 정부가 달성하지 못한 목표를 달성하게 했다. ‘경제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농민이 자기 땅에서 쫓겨나 도시 빈민가로 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내부 난민 중 ‘운 좋은’ 소수는 초착취 공장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현재 임금 수준은 일당 2~3달러에 그치는데, 이것은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1980년보다 적은 것이다.
아이티의 소수 엘리트는 차별, 착취, 폭력을 통해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폭력이 아니었다면 그런 특권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난 1백 년 동안 아이티군은 사람들이 노조를 결성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자 군대 폭력의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중 저항의 힘이 군대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고 1990년 아이티인들은 군부와 미국의 계획에 반대하는 대통령(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을 선출했다. 아홉 달 뒤 군부는 상투적 수단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가 통제권을 회복하자 1991~94년에 수천 명이 살해됐다.
그러나 1994년 미국 정부가 망명중인 아리스티드의 귀환을 허용했을 때, 그는 미국 정부의 기대를 거슬러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성취했다. 아리스티드는 아이티로 돌아온 뒤 아이티 군대를 해체했다. 전통적으로 지배계급의 보호막 구실을 하던 기구를 약화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진전이었다.
동시에, 아리스티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할 수 있는 좀더 강력한 정치 조직을 건설했다. 이 조직이 라발라스가족당이다. 아리스티드는 2000년 대선에서 승리했고 라발라스가족당도 의회 선거에서 큰 표차로 다수당 ― 의석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 이 됐다. 이렇게 해서 군부가 제거된 아이티에서 대중적 지도자가 당선했고 진정한 사회 변화의 전망이 보였다.
엘리트와 제국주의
아이티 엘리트들은 이런 변화가 진정한 변화를 낳는 것을 막으려고 정치 의제를 ‘안정’과 ‘치안’ 중심으로 짜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유재산과 투자의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이티의 지배계급은 아리스티드를 약화시키고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아이티 역사에서 가장 공정한 선거인 2000년 선거에 공정성 시비를 건 것이다. 그들은 모든 국제 지원을 중단시켜 정부 국고를 파산시키려 했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미주개발은행이 이미 지원하기로 합의한 대출금의 지급을 중단시켰다. 그 결과 아리스티드 정부의 예산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국내총생산(GDP)도 폭락했다. 아이티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아리스티드 정부는 약해졌다.
1990년 이후 정부 기관에 의미있는 투자를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정부가 경제를 관리하거나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엘리트 입장에서 ‘안정’을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은 군대였다. 이번에는 ‘아이티의 친구’를 자처하는 미군과 유엔군이 나섰다.
△2004년 쿠데타에 반대하고 아리스티드의 귀환을 요구하는 시위대 이런 행동만이 아이티의 불평등을 고착시키려는 아이티 엘리트와 외국군의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다.
2004년 2월 28일 미국 정부는 한밤중에 아리스티드를 납치해 강제로 망명을 보냈다. 미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부 중 하나를 제거했지만, 국제적 항의도 별로 없었고 심지어 쿠데타라는 비난도 없었다.
아리스티드의 민주 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인 제라르 라토르튀로 대체됐다. 대규모 유엔 ‘안정화’군이 미군을 대신했다. 유엔군의 주된 임무는 아이티 대중을 통제하고 그들이 쿠데타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을 상대로 한 저강도 전쟁이 시작됐다. 빈민 지역이 주된 표적이었다. 때로는 9천 명에 이르는 유엔군의 직접 발포 때문에, 때로는 유엔군의 암묵적 승인 아래 자행된 학살극으로 2006년 말 이후 아리스티드 지지자 수천 명이 살해됐다.
이런 ‘안정화 작업’ 결과, 2009년 아이티 정부는 나라의 남은 공공자산들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최저임금을 하루 5달러로 올려달라는 요구를 거부했고 라발라스가족당이 다음번 ‘민주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었다.
확실히, 아이티 엘리트들이 바라는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오늘날 아이티 주둔 유엔군은 과거 아이티군보다 더 유능했다. 그러나 ‘땅이 흔들릴’ 정도로 아이티 상황이 다시 ‘불안정’해졌을 때 ‘평화와 안정’의 사도 미국 정부가 다시 나섰다.
돌아온 미군
지진이 막 발생했을 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물자 수송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미군이 구호 작전을 사실상 주도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미군 지휘관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체면을 완전 구긴 미군을 자비로운 존재로 채색할 기회가 왔다고 기뻐했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진 다음 날 아이티에 파견된 미군이 최초로 한 일은 구호물자가 재난 지역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었다.
미 공군은 1월 13일 아이티 공항을 통제하기 시작하자마자, 군사 물자 수송을 위해 인도주의 물자를 실은 비행기의 착륙을 불허했다.
또, 당시 포르토프랭스에서 나온 보도들이 전하듯이, 아이티인들이 놀라운 인내심과 연대 행동을 보여 준 반면에, 미군 지휘관들은 군중 소요와 불안정을 통제하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여겼다. 미 공군 특수사령부 대변인 타이 포스터는 또 다른 ‘소말리아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즉, 미군이 이른바 ‘인도주의 작전’을 벌이던 중 망신을 당하는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충분한 수의 병사와 군장비들을 신속하게 공급하는 데 몰두하던 미공군은 구호물자를 실은 비행기들의 착륙 허가 요청을 번번이 무시한 것이다.
〈뉴욕 타임스〉 보도를 보면, 목요일[1월 14일]과 금요일 미군은 세계식량계획(WFP)의 수송기들을 돌려보냈는데, 이유는 “미군 병사와 물자를 먼저 착륙시키고 미국인과 다른 외국인들을 우선적으로 대피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주 주말까지 다른 구호단체들의 비행기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국경없는의사회(MSF)만 해도 주말 동안 수송기 5대를 그냥 돌려보내야 했다. 그래서 1월 18일 월요일이 되자 상황이 너무 심각해져 포르토프랭스의 일부 MSF 의사들은 환자들의 목숨이 걸린 절단 수술을 하기 위해 시장에 달려가 톱을 사야 했다!
△포르토프랭스의 참혹한 모습 미군과 유엔군이 군사 작전에 몰두하는 동안 사람들은 죽어 갔다. ⓒ사진 제스 허드
미군 지휘관들이 치안 회복을 명분으로 해병 1만 4천 명을 모으는 데 모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포르토프랭스의 많은 지역에서는 식량과 물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1월 20일 포르토프랭스 중심가에 밀집한 대형 임시 피난처들에서 잠을 청하던 사람들은 아이티 전문가인 팀 슈워츠에게 “이곳에는 구호물자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대사관은 도시의 반대편에만 물자를 공급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BBC의 마크 도일은 포르토프랭스의 동부도 상황이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집은 파괴됐고, 수도 공급도 중단됐다. 식량 가격은 두 배로 뛰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진 발생 뒤 정부 관리나 해외 구호요원들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비록 일부 구호단체 요원들은 대단히 열심히 일했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이란 것은 실제로는 별 볼일 없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보도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한편에서는 공항에서 구호 단체 요원들과 어울리고 미국 정부 대변인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그들에게 듣는 얘기를 보도할 수 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온갖 억측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티의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면서 직접 자기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를 택했는데, 내가 간 곳마다 아이티인들은 내가 자신들이 처음 만난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지진이 발생한 지 꼬박 한 주가 지나서야 군인들이 득실대는 공항에 꽁꽁 숨겨져 있던 구호 식량들이 도시 내 14개의 ‘안전한 배급소’로 천천히 옮겨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포르토프랭스의 수많은 시민들은 구호물자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도시를 버리고 농촌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알자지라〉 기자는 1월 17일에 이렇게 보도했다. “대부분의 아이티인들은 지금까지 인도주의 구호물자를 구경도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총,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총이었다. 거리에서는 중무장한 군용차량이 순찰하고, 삼엄한 경비의 [공항] 경계지역 안에서는 미군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 그곳은 구호물자 배급소라기보다는 이라크 바그다드의 그린존처럼 보였다.”
같은 날, WFP의 항공 물자 수송 담당자 제리 에마뉴엘은 매일 공항에 이착륙한 비행기 2백여 대 중 대다수가 미군 수송기임을 인정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아이티의 치안을 확립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우선순위는 아이티인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죽음을 방치한 점령군
인도주의적 지원 물자 대신 군 물자의 수송을 우선하기로 미국 정부가 결정한 것은 포르토프랭스의 건물 잔해 밑에 깔려 방치돼 있던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했다.
사실, 전 세계에서 많은 수색구조대가 12시간 안에 아이티에 도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 중 극소수만이 때 맞춰 아이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컨대, 캐나다의 도시수색구조팀들은 즉각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로부터 대기하라는 말을 들었다. 나중에 캐나다 외무장관 로렌스 캐논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캐나다 정부는 캐나다 공군을 먼저 보내는 것이 더 좋다고 결정했다.”
1월 19일 미국국제개발처(USAID)는 국제 수색구조팀이 지진 발생 뒤 한 주 동안 총 70명을 구조했다고 발표했다. 이 쥐꼬리만한 숫자도 놀랍지만, 구조된 사람들도 주로 특정 지역과 조건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렇게 보도했다. “수색구조 작전은 주로 유엔본부처럼 국제 구호 단체 요원들이 머문 건물이나 국제적 인사들이 많은 대형 호텔에 집중됐다.”
유엔과 미국 지휘관들은 나머지는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지진 이후 아이티에서 즉각적으로 ‘안전한 경계 지역’으로 분류할 수 없는 곳은 구조 노력을 할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일부 서방 언론 기자들은 가끔 경계 지역 밖으로 나올 기회가 있으면 주로 유엔군과 미군(그리고 자신)이 그 지역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으려 했다. 예컨대, BBC의 매트 프레이는 도심 쇼핑지역에서 사람들 몇몇이 물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을 본 뒤 이렇게 말했다.
“약탈은 아이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산업이다. 무엇이든 무기가 될 수 있다. 경쟁 깡패 집단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다.” 프레이는 아이티가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전면적 군사점령이 필요하다” 하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심지어 1994년 아이티에 점령군을 보냈던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마저 그런 보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클린턴은 인터뷰에서 프레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자기 가방에 챙긴 것 외에 모든 것을 잃고, 4일 동안 아무 것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해가 떨어진 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건물 더미에 깔려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 옆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아이티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대단히 잘 처신하고 있습니다. … 그들은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엄청난 파괴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도 그들은 어떻게 이토록 침착할 수 있을까요?”
산발적이고 지엽적인 약탈과 전면적인 ‘무정부 상태’를 구분할 수 있던 기자들은 비슷한 점을 반복해서 지적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데이비드 벨은 주류 언론의 왜곡된 보도에 항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 주류 언론은 아이티가 폭발 일보 직전의 폭발물인 것처럼 보도한다. 그들은 약탈, 폭력과 혼란을 주로 보도한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나는 이곳에 도착한 뒤 매일 도시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파괴의 정도는 엄청나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폭력 행위를 목격하지 못했다. … 파괴된 도시의 2백만 시민들은 도움, 의약품, 음식과 물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는 전혀 그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아이티는 생존자들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이 비극 앞에서 그들이 보여 준 존엄과 예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아이티 언론 〈리베르테〉의 킴 아이브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대응 방식은 카트리나 때와 다를 바 없다. 희생자가 가장 무섭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적인 노예 해방 혁명을 벌인 흑인들이다.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론인 앤디 커쇼는 미군, 유엔군, 해외 NGO 등이 ‘치안’에 목을 매다는 것은 “그들이 아이티와 그 사람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 줄 뿐이다” 하고 말했다.
재건?
그리고 이런 잘못된 우선순위는 구호 작업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진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부유층 거주지 페티옹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부와의 연줄, 자기 무역회사와 서로 연결된 가족 기업들을 이용해” 국제 지원금과 재건 기금의 대부분을 꿀꺽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한편, 미국 국토안보부는 연줄 없는 아이티인들이 혹시라도 자기 자리에서 이탈할까 봐 ‘특단’의 긴급 조처를 취했다.
이른바 ‘빈틈없는 파수꾼’이란 이름의 작전은 미군이 포르토프랭스 근해에 파견한 많은 소형 함정들을 이용한 것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보도를 보면, 그런 함정 중 하나인 USS칼빈슨 호(號)는 “구호물자와 의료품 공급뿐 아니라 다른 해안 경비대의 배들과 함께 6백81마일 떨어진 미국 마이애미로 가려는 아이티인들을 막는 것이다.”
지진이 발생한 이후 미국 공군은 매일 5시간씩 수송기를 띄워 다음과 같은 주미 아이티 대사의 녹음 메시지를 방송하고 있다. “보트를 타고 나라를 떠나지 마십쇼. 미국에 도착하면 당신을 환영할 거라 기대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당신의 배를 멈추고 당신을 아이티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사실, 미국 정부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경우에도 아이티 지진 피해자들이 미국 땅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마이애미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장은 야전병원 일을 도우려고 포르토프랭스 공항에 내렸을 때 자신이 본 광경에 분노를 토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들이 플로리다로 이송돼 수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에도 미국 정부는 비자 발급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점령으로 미국 정부는 1915년 이래 아이티를 네 번째 점령하게 됐다. 비록 매번 각기 다른 침략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안정’과 ‘치안’ 확보를 대외 명분으로 삼았다. 만약 이 목적이 사실이었다면 아이티는 진즉에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나라가 됐어야 했다.
지금 해외 치안 병력 수천 명이 아이티로 파병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 아이티의 주권을 완전히 유린하기 위해 아이티로 몰려들 ‘재건 및 사유화’ 담당 외국인 고문들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보호 병력과 고문들은 자신의 엘리트 후원자들이 오랫동안 꿈꿔 온 것 ― 쿠데타로 점철된 아이티군의 부활 ― 을 달성하도록 도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아이티의 ‘불안정 요인’, 즉 대중의 정치적 참여와 자각을 완전히 근절하고 역사의 기억에서 지우려는 시도를 다시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