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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소외, 사회 변혁

이 글은 필자가 과거에 이런저런 경우에 쓴 몇 개의 글을 조합하고 편집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도처에서 삐걱거리고 있다. 비효율성과 끔찍한 불평등, 야만적인 전쟁과 기후 변화의 위험이 인류를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 사회 문제들은 이윤 추구를 위해 삶과 환경을 희생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본주의를 변혁하지 않고서는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잠재력을 갖고 있는 사회 세력은 누구인가? 학생들은 사회 변혁에서 어떠한 구실을 할 수 있는가?

학생은 어떤 사회 집단인가?

자본주의의 폐해 때문에 다양한 사회 집단이 자본주의에 맞서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맞선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전부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 변혁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기업의 이윤 추구가 생산 활동의 동기를 지배하는 사회 관계에 도전하는 것이 사활적이다. 즉, 착취에 맞선 노동자 대중 투쟁만이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핵심 원동력이다. 다양한 사회 집단의 투쟁은 바로 착취에 맞선 노동자 대중 투쟁과 결합될 때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윤 생산을 마비시킬 실질적 능력이 있다는 점뿐 아니라 자본주의 노동의 집단성, 즉 분업과 협업으로 조직돼 있다는 점 때문에 노동계급은 가장 효과적이고 거대한 규모로 단결할 수 있는 집단이다. 단결 투쟁은 노동계급 투쟁의 제1의 원리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단결된 대중 투쟁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광범한 사회 세력을 결집하는 중심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노동계급 중심성’이라 한다.1

그렇다면 학생들은 사회 변혁에서 어떠한 구실을 할 수 있는가? 사회 변혁에서 학생들의 구실을 논하려면, 학생 집단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학생들의 정서와 성향을 말하기 전에 학생 집단의 객관적 지위를 규명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이 사회 변혁에서 할 수 있는 구실을 명확히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 일각에서는 학생을 “예비 노동자”로 규정한다. 물론 학생들의 상당수는 미래에 노동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노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생들은 지배계급으로, 상당수는 중간계급의 일원이 된다. 따라서 학생을 단일한 계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조차 학생 집단의 미래를 말해줄 뿐이다. 학생은 아직 계급적 지위가 분명히 결정되지 않은 일시적 집단이다. 즉, 학생은 생산을 둘러싸고 맺는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 집단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학생은 생산 관계 외부, 즉 대학이라는 자본주의 기구에 귀속돼 있다.

따라서 아무리 학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학생이 예비 노동자인 것은 아니다. 학생은 노동자와 달리 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돼 있어서, 자본주의의 핵심인 이윤 체제를 마비시킬 힘이 없다. 그러므로 학생은 변혁의 결정적 계기에서 독자적인 사회적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점에서 좌파 민족주의 경향이 대부분 학생을 사회 변혁의 ‘주력군’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계급 분석이 아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흔히 학생들의 투쟁은 매우 강력했고, 이 투쟁들은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1968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주요국 학생들의 투쟁, 한국에서 1960년 4·19와 1987년 6월항쟁, 1989년 중국의 톈안먼 항쟁, 1998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퇴진 투쟁 등 학생들은 종종 정권을 위협하는 폭발적 투쟁을 만들어 냈다.

여전히 학생운동은 강력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의 위기”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던 1990년대 중·후반에조차 학생운동은 반정부 투쟁이나 노동자 투쟁 연대 집회에 수천 명 이상을 동원했다. 학생들의 잠재력과 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요인을 알아야 사회 변혁적 좌파가 학생들 사이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다. 그러려면 학생들이 자본주의 대학에서 겪는 공통된 경험을 알아야 한다. 먼저, 오늘날 고등 교육의 변화와 함께 나타난 학생들의 사회적 지위 변화와 그것이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학생의 사회적 지위 변화

자본주의에서 대학은 원래 지배계급의 지적·이데올로기적 필요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자본가 계급과 상층 중간계급을 위한 전통적인 훈련의 장이었다. 따라서 초창기에는 사회 내의 극소수 상층 계급 자녀들만이 고등 교육의 수혜자였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대학은 다른 필요에 부응해야만 했다. 성공적인 자본 축적과 국가 간 군사적 경쟁을 위해 과학·기술을 습득한 고학력 노동자들이 대거 필요했다. 또한 점점 더 거대해지는 기업과 국가를 관리하기 위해 관료제를 확대해야 했는데, 이를 위한 대규모 인적 자원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20세기 자본주의에서 대학은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대학생 수의 급격한 증가로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 1870년대 후반경 또래 집단의 1.7퍼센트만이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또래 집단의 20퍼센트 가량이 입학했고, 1970년대에는 거의 50퍼센트에 육박했다. 영국의 경우에도 1950년에는 대학생이 또래 집단의 1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지만, 1972년이 되면 15퍼센트에 이른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1960년대 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1980년대 이후에도 거의 곱절로 늘어나 지금은 2백만 명이 넘는 대학생이 있다.

한국의 경우도 서구 대학의 변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변모 속도가 산업화의 속도에 비례해 서구보다 훨씬 빨랐다. 일제 시대 경성제국대학은 친일 관료와 지식인을 배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해방 이후 초기 사립 대학들은 반공주의와 친미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소수 지식인을 배출하는 구실을 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은 소수 상층 계급 자녀들이 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대학의 변화도 매우 급격해졌다. 1960년대 산업화를 겪으면서 산업화에 필요한 인력을 조달하기 위해 이공계 학과 설립이 장려됐고, 대학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1965년 한국의 대학생 수는 전문 대학과 대학원까지 모두 합해 고작 13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산업화 초기 1960~70년대 매년 2~3만 명씩 늘어나던 대학생 수가 1970년대 말 이후 연평균 10만 명 규모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고교 졸업생의 25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고교 졸업생이 대학에 진학한다. 그래서 지금은 대학생 수가 3백만 명을 넘어섰다.

대학생 수의 급격한 증가로 대학의 성격이 변했다. 여전히 ‘일류대학’에는 상층 계급 자녀들이 좀 더 많이 입학하지만, 이제 대학생의 대부분은 중간계급과 일부 노동계급 자녀들이게 됐다. 비록 학생을 예비 노동자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변화는 학생들이 노동계급과 상당 부분 공통의 이해 관계를 갖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대와 현실의 모순

그러나 현실의 변화보다 이데올로기의 변화는 더딜 수 있다. 현실에서는 산업 구조 변화에 따른 대학생 수의 증가로 학생들이 졸업 후 사회 내에서 행할 기능이 달라졌다. 하지만 얼마간 학생들은 초창기 대학생들처럼 자신을 ‘지식인’, ‘엘리트’라고 생각했다. 즉, 여전히 적잖은 대학생들은 대학이 사회 운영에 필요한 지식과 이데올로기를 공급하는 특별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여전히 학생들을 단지 기능인으로만 취급하지는 않는다. 대학은 사회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구실을 하려 한다. 학생 집단은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직접 경험보다 자본주의 대학이 제공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계를 해석할 것을 요구받는다. 물론 자본주의 대학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은밀히 강요하면서도 겉으로는 “객관성”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적 중립성을 표방하곤 한다. 그러나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언제나 학생들에게 성공적으로 ‘주입’되는 것만은 아니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과 스스로 경험하면서 배우는 현실 사이에 간극을 느낀다. 자본주의 대학에서 학생들은 종종 이데올로기 혼란을 느끼게 된다.

혼란을 느끼는 학생들은 종종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학생 집단은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집단을 멀리 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높은 환멸과 불신이 나타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상적 시기에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비율이 낮은 것도 바로 이런 특징과 관련돼 있다.

한편, 대학의 팽창은 대학 교육이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여전히 학생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신분이므로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이제 상당수 학생들은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대학에 입학한다.2 그러나 더 높은 학력과 학벌이 계급이나 지위를 상승시켜 줄 것이라는 학력주의적·학벌주의적 기대는 현실에서 그다지 녹록치 않게 됐다. 왜냐하면 대학생 수가 증가한 만큼 졸업 후 귀속될 계급도 상이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들은 졸업 후 자본가계급이나 상층 중간계급의 일부가 될 테지만, 또 다른 많은 학생들은 육체 노동자보다도 더 낮은 보수의 직장을 구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대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 치렀던 입시 경쟁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노동시장에서 더 나은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학점 경쟁을 반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결국 그들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대했던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은 노동시장의 상태나 시험 경쟁 결과에 의존해야 하는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한편, 대학의 팽창은 과밀 강의, 높은 등록금, 열악한 교육 시설 등 대학생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열악한 교육 여건을 낳는다. ‘내가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려고 고생해서 대학에 왔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학생들은 대학이 미래를 확실히 보장해주지도 않으면서 등록금을 계속 올리거나 교육 여건을 열악한 채로 방치하는 데에 불만을 느낀다. 또한 고등학교의 억압적 교육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대학의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 행정은 학생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이렇듯 기대가 현실에서 체계적으로 부정될 때, 학생들은 자본주의적 소외와 대학 당국이 가하는 억압 — 학점 경쟁, 권위주의적 학사 행정, 비싼 학비, 낙후한 교육 환경,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한 경쟁 등 — 에 직면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특히 시험 경쟁에 시달리면서 학생들은 원자화되기 쉬워 대체로 자신들이 집단적으로 현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노동과정에서의 협업과 분업 때문에 단결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학생 집단은 동료들과의 경쟁 압력에 수시로 노출돼 있으므로 일상적으로 단결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상적 시기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개인주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학생들은 무력감을 느끼거나 현실도피적 행동 — 술, 오락, 컴퓨터 게임 등 — 으로 자신을 달래곤 한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의식은 모순돼 있어 이런 억압에 대한 반감을 억누르고 있다가 특정 사건이 지적·도덕적 분노를 예리하게 자극할 때 갑작스럽게 투쟁에 나선다. 이럴 때 때때로 예상치 못한 거대한 투쟁이 벌어진다. 즉, 학생 집단은 일상적 시기에 비정치적이지만 때때로 투쟁에 나설 잠재력이 있다. 1960년대 후반 서구의 학생운동이 정확히 이런 사례였다.

학생 반란의 성격

1968년 학생운동은 매우 다양한 계기를 통해 분출했다. 프랑스 학생 반란을 촉발했던 낭떼르 대학의 운동은 학내 쟁점에서 출발했다. 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를 방문하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한 반발이 투쟁의 촉발점이 됐다. 그러나 언제나 학내 쟁점이 투쟁의 계기가 됐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버클리 대학 투쟁은 그 지역에서 흑인 공민권 운동에 참가하고 있던 학생들의 활동을 대학 당국이 금지한 것에 항의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그밖에 컬럼비아 대학에서는 대학 당국이 국방부와 계약을 맺고 체육관을 확장하기 위해 지역사회 흑인들을 거주지에서 강제로 추방하는 것에 반대해 운동이 시작됐다. 독일의 베를린자유대학에서는 총장이 급진적 저자의 강의를 금지한 데서 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서구의 학생 반란은 교육 환경의 열악함, 권위주의적 대학 행정, 대학과 군산복합체의 결탁, 베트남 전쟁, 흑인 반란 등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학생들이 처음부터 매우 정치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학생 반란은 비정치적인 경향으로 출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당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던 권력자들이 냉전 체제를 옹호하고 유지하는 위선을 드러내고 학생들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을 때 학생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이때 만약 학생들이 매우 정치적이었다면 주류 이데올로기였던 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이데올로기에서 체계적인 대안을 찾으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학생들은 초기에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한 혼란과 강한 거부감 그리고 도덕적 분노를 드러냈다. 그래서 학생 반란의 초기 이데올로기는 ‘비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 즉, 권력 일반, 이데올로기 일반 등에 거부감을 갖는 자율주의적 경향을 띠었다.3

그러나 학생 반란이 확대되면서 학생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더욱 급진화했다. 가령 버클리 대학의 ‘자유 발언 운동’ 이후, 이 운동에 참가했던 학생들 중 50퍼센트가 자신을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밝혔고, 25퍼센트는 ‘개혁 사회주의자’라고 응답했다. 또한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학생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됐다. 사실 다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 자체에 동의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기존 제도 교육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금기시했기 때문에 오히려 반항적으로 더 수용했던 것이다. 스탈린주의로 곡해되지 않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소수였다. 즉, 이 시기 청년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했음에도 학생들의 실제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라기보다는 “자발적, 비조직적, 반권위주의적, 절대자유주의적 행동이 새롭고 정의롭고 국가 없는 사회를 낳을 것이라 믿는 이데올로기, 즉 바쿠닌주의적 또는 크로포트킨주의적 무정부주의”에 가까웠다.4

학생 반란의 초기 ‘비정치적’ 성격은 부분적으로 폭발적 반란을 낳은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 반란의 비정치적 성격은 다른 한편으로 학생 집단이 가지고 있던 취약점을 극복하는 데에 한계를 드러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벌어졌던 서구 학생운동은 운동이 정점에 도달하고 탄압도 극심해지자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학생들은 생산관계에 속박된 노동자와 달라 급속히 운동을 성장시킬 수 있지만, 역설이게도 바로 같은 이유로 운동이 고비에 부딪히면 독자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해 쉽게 사그라들 수도 있다. 투쟁을 더 발전시키려면 학생 반란이 노동자 투쟁과 연결돼야 한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띠기 쉬운 비정치적 경향은, 학생 반란이 궁극적으로 노동자 투쟁과 연결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정치도 거부함으로써, 학생 반란이 근본적 변혁을 향해 나아가기 어렵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 변혁에서 학생운동의 구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들은 자본주의 대학에서 느끼는 지적·도덕적 혼란 때문에 다른 사회 집단에 비해 체제의 부당함과 모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체제의 정당성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흔히 대학은 이데올로기적 혼란의 중심지가 된다. 학생들은 교육 조건이나 졸업 후 진로 등을 둘러싼 억압적 상황에 맞서 투쟁할 수도 있지만, 전쟁·인종차별·국가탄압 등에도 맞서 투쟁할 수 있다.

또, 학생들의 투쟁은 자본주의 대학의 거대화에 따라 대규모 거리 시위나 대학 건물 점거의 성격을 띤다. 게다가 학생들의 투쟁은 매우 휘발성이 강하다. 특정 계기로 자극을 받은 학생들은 금세 달아오른다. 학생들의 폭발적 투쟁은 지배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노동계급에게 자신감을 준다. 노동계급은 이윤 생산에 타격을 가할 수 있으므로 사회 변혁에서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지만, 학생보다 더디게 투쟁에 나설 수 있다. 이때 학생들의 대규모 도심 투쟁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촉발하는 방아쇠 구실을 할 수 있다. 실제 지난 자본주의 역사에서 거대한 학생 투쟁은 때때로 노동자 투쟁의 도화선 노릇을 했다. 1968년 프랑스 학생 반란은 바로 그때까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동자 총파업을 촉발했다.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은 그 해 7~9월 노동자 대중 파업을 자극했다. 올해 그리스 총파업도 지난해 말과 올해 초의 대학생 학교 점거 운동에 고무된 바 크다.

한국의 학생운동과 노동자 투쟁

그렇다면 한국의 경험은 어떠한가? 권위주의적 군사 독재 아래 급격한 산업화는 엄청난 모순을 낳았다. 노동계급 규모가 빠르게 증가하고 대학이 급팽창함에 따라 여러 모순들이 급격히 첨예화했다.

학생들은 그 전에도 1960년 4·19 민주혁명 등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투쟁에 나서곤 했지만, 특히 폭발적으로 저항에 나선 것은 1980년대였다. 1980년 광주항쟁 경험은 학생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초창기 학생 저항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지금까지 배운 것과 세상이 너무 다르다’는 충격과 혼란, ‘사회를 정의롭게 이끌 책임이 있는 대학생으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같은 실존적 고민에서 출발했다.5 학생들은 전두환 군사 독재 정부에 대해 광주학살 원흉을 처단하고픈 분노를 느끼며 폭발적으로 저항했다.

광주민중항쟁 경험과 1980년대 노동자 투쟁 등에 자극받은 신흥 좌파 학생들은 노동자 등 기층 민중의 힘에서 사회 변혁의 동력을 발견했다. 그래서 1980년대에는 학생 활동가들이 위장 취업해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노동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위장 취업까지 했던 당시 학생운동가들의 전투성과 열정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이런 실천의 배경에는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1980년대 급진화한 학생 활동가들은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에 대한 이상화와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노동자들을 대신하고 그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식의 대리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운동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 것은 6월항쟁에 사무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참가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거대한 정치투쟁의 여파는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들의 경제 파업 물결로 이어졌다. 이러한 대중파업은 전두환 독재 정권이 반격을 가하지 못하도록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의 폭발적 투쟁은 독일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론》에서 말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승 작용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라는 형태로 표현됐던 전형적 사례였다. 학생운동이 노동자 투쟁에 여파를 미친 사례는 그 이후에도 나타났다. 가령 1995년 말 전두환·노태우 처벌 투쟁과 이듬해 초 학생들의 대규모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은 1996년 말~1997년 봄 연인원 38만 명이 참가한 민주노총의 대중 파업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의 대학생과 변혁적 좌파

주류 언론과 많은 논평가들은 1990년대 초 이래로 종종 학생들의 의식이 보수화했다고 주장한다. 일부 학생운동 단체들도 다수 학생들이 보수화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학생운동이 좌파적 주장을 강화하면 학생들에게 고립될 것처럼 묘사하며 간혹 자신들의 실용주의를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신들의 혁명적 정치를 유지하려면 자기들끼리만 뭉쳐있는 게 낫다고 본다.

대체로 학생 보수화 테제는 요즘 대학생들과 1980년대 대학생들의 의식을 단순 비교한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매우 급진적이었는데, 요즘 학생들은 왜 이러냐는 식이다. 그러나 다수 학생들이 정치적 관심을 많이 보이는 것 자체가 1980년대 같은 매우 특수한 조건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소수 학생들을 제외하면 일상적으로 학생 집단 전체가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학생들이 보수화하고 있다는 진단은 오늘날 학생들의 의식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1980년대만큼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학생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대학생들이 자신의 정치 성향을 진보적이라고 답한 비율은 지난 10년 간 비슷하게 유지돼 왔다.

비록 노무현 정부 말기에 노무현 정부에 대해 가졌던 기대가 배신감으로 변하면서 일부 학생들이 보수화하고 기가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명박 정부 초기 조차 대체로 학생들은 30퍼센트가 진보, 40퍼센트가 중도, 나머지 30퍼센트가 보수 성향을 보이는 가운데 이 비율이 약간씩 변동하고 있다. 이를 보더라도 학생들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보수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편 1990년대 후반 IMF 공황을 경험하면서 학생행진 경향을 필두로 많은 학생운동 단체들이 신자유주의 강화로 학생들이 개인주의화해서 학생운동의 위기가 왔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학생들은 전과 달리 자기 학점 관리와 취업 문제 등에만 관심을 갖고 정치·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상에 대한 묘사로선 올바르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학생들이 겪는 경쟁 압력이 더 거세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 학생들의 불만도 더 밀도 있게 누적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불만은 작은 불씨 하나로도 쉽게 타오를 수 있다. 그 불씨는 교육 여건 악화일 수도 있고, 정치·사회적 부당함일 수도 있다.

오늘날 체제가 낳은 위기들은 오히려 학생들로 하여금 돌연 저항에 나서게 할 잠재력을 높이고 있다. 특히 2008년 촛불항쟁 이후 대학에서 운동권 학생회가 약진하고, 비운동권도 노골적인 우파적 주장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이런 잠재력을 보여주는 징후다.

경제 위기와 촛불항쟁의 여파로 학생운동이 활성화할 조짐이 보이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학생운동가들은 기층 학생들에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 현재 한국 학생운동에서 학생들이 접근하기 가장 쉬운 정치적 공간은 바로 학생회다. 주류 언론들은 매년 학생회 선거 무산 사례를 부각시키며 학생운동 위기를 과장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학생회 활동을 지지한다. 따라서 사회 변혁적 학생운동가들은 학생회에 참여하여 진보적 학생들과 일상적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학생회 활동이 변혁 정치조직 활동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학생회와 변혁 정치조직은 지향하는 강령 수준과 구실이 다르다.6 따라서 학생회와 변혁 정치조직은 둘 다 학생운동에서 필요한 조직이다. 학생운동 일각에서처럼 변혁 정치조직의 활동을 학생회 활동에 용해시킬 경우, 원칙 있는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다수 학생들의 정서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에 불필요하게 타협하는 경우가 종종 생길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세계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각 나라 지배자들은 경제 위기의 책임을 노동계급에게 떠넘기려고 공세를 취하고 있다. 노동계급이 지배자들의 공세에 맞서 얼마나 자신의 삶을 방어하느냐가 향후 정세를 결정할 것이다. 노동계급이 단결해서 싸워 지배자들의 공격을 물리친다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학생운동은 노동계급 투쟁의 방아쇠 구실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 위기 시기에 변혁적 학생 활동가들은 교육재정을 삭감하고 교육조건을 후퇴시키려는 시도에 맞선 투쟁에 나서면서도, 지배자들이 경제 위기의 책임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하려는 시도에 맞서 학생들이 함께 투쟁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투쟁에서 만나는 학생 개인들을 변혁 정치조직의 일원이 되도록 설득해야 한다. 운동이 전진할 수 있는 정치적 무기를 갖춘 변혁적 좌파가 어느 정도 규모로 운동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야 운동의 방향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혁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입증하려면 개혁주의에 대한 비판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변혁적 좌파는 개혁주의를 단순히 폭로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공동전선을 통해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변혁적 대안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실천에서 입증해야 한다.

1 한국에서는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오해들이 많다. 가장 흔한 오해는 노동계급 중심성을 노동자주의(노동조합주의)와 혼동하는 것이다. 노동자주의는 소위 ‘노동자’ 쟁점이 가장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노동자주의 경향 활동가들은 대체로 임금인상·근로조건 개선 등의 작업장 내의 쟁점을 ‘노동자’ 쟁점이라고 여긴다.

노동자주의 활동가들은 노동계급 외 다른 사회 집단이 겪는 고통에 둔감하거나 그들의 투쟁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한국의 노동자주의 경향의 활동가들은 반전 운동에 조직 노동자들의 참가가 저조하고 운동의 주된 구성이 대학생들과 미조직 청년들이라는 이유로 반전 운동을 폄하하곤 한다.

그러나 ‘노동계급 중심성’은 근본적 사회 변혁에서 노동계급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지, 다른 피억압 집단의 투쟁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니다. 착취와 억압은 긴밀히 연결돼 있어서, 둘 모두에 맞서는 투쟁이 필요하다. 일찍이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노동계급은 자신의 착취 문제뿐 아니라, 다른 피억압 집단의 투쟁에도 관심을 갖고 싸우는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진정으로 자기 자신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본문]

2 통계청에서 2000년에 조사한 ‘학생의 기대교육수준 및 목적’에서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대학에 온다는 학생이 35.4퍼센트,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대학에 온다는 학생이 40.7퍼센트에 달했다. [↑본문]

3 미국 학생운동의 주요 단체였던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SDS)이 1962년 채택한 ‘포트 휴런 선언’에는 당시 학생운동의 자율주의적 성향이 묻어 있다. “오늘날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 우리가 무기력하고 소외되어 있는 동안에 강력한 타인이 우리를 통제하고 있다. … 이제 우리는 재산, 특권 혹은 출신에 근거한 권력을, 사랑, 이해심, 이성과 창의력에 뿌리를 둔 권력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우리는 개인적 참여의 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 체제를 추구한다.” [↑본문]

4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下, 463쪽. [↑본문]

5 싸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본문]

6 예컨대 변혁적 사회주의자가 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이라크 전쟁 반대와 교육환경 개선 등을 학생회의 투쟁 과제로 내세울 수는 있지만,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라든지 변혁적 정당 건설 등을 학생회의 과제로 관철시키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후자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다.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