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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 - 세계를 뒤흔든 18일

 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 주디스 오어가 이집트 카이로 현지를 직접 찾아가, 무바라크가 물러났어도 계속되고 있는 혁명의 생생한 소식을 전한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역사적 해들이 있다. 1848, 1917, 1968, 1989년이 바로 그런 해들이다.

2011년 2월 11일도 우리가 이제부터 쭉 축하할 날이 됐다. 이날은 바로 이집트 혁명으로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가 쫓겨난 날이다.

무바라크는 30년 동안이나 이집트를 통치했다. 무바라크 집권기는 그에게 반대한 사람들의 피로 물들었다. 무바라크에 반대한 사람들은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살해됐다. 이집트 정부에는 부정부패가 널리 번졌다.

국부의 대부분을 소수가 독점하면서 거의 과반의 국민이 빈곤선 이하의 삶에 허덕였다.

역대 미국 대통령은 무바라크를 손쉽게 제국주의 전쟁 수행의 파트너로 삼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억압을 기꺼이 돕는 동맹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무바라크는 사라졌다.

무바라크를 쓰러뜨린 것은 군대가 아니었다. 정치가들도 아니었다. 외국 군대가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평범한 이집트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이 무바라크를 쓰러뜨렸다.

평범한 이집트 사람들이 카이로에서, 전국의 도심과 마을에서 거리로 나섰다. 사람들은 거리를 행진하고, 광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벌였다.

그들은 경찰의 몽둥이질, 최루탄과 실탄 사격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기는커녕 맞서 싸웠다. 이집트 사람들은 대규모의 격렬한 투쟁을 벌여서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독재자 가운데 한 명을 쓰러뜨렸다.

처음 혁명이 시작될 때 나는 카이로에 머물며 거리 시위가 절정에 이르고, 엄청난 인파가 타흐리르 광장을 점거하는 것을 지켜봤다.

무바라크의 퇴진 발표가 있던 2월 11일 이집트 민중들이 광장에 모여 환호하고 있다.

모두 무척 흥이 나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격렬한 싸움이 거리마다 벌어졌고 무바라크가 마침내 물러날 때까지 질질 끄는 싸움이 계속됐다.

무바라크가 몰락한 다음 날 나는 카이로 거리에 다시 나갔다. 거리에는 한목소리로 승리를 기뻐하는 함성이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때의 카이로 거리는 정말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축제의 장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누구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치 못했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리에 모인 사람들과 어울렸고 함께 기쁨을 나눴다.

그러고 나서 나는 타흐리르 광장을 찾았다. 타흐리르(해방) 광장은 이제 영원히 이집트 혁명 정신을 대표하게 됐다. 광장은 이집트 국기로 물결치고 있었다. 불꽃놀이로 밤하늘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스쿠터를 탄 사람들이 군중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경적을 울리고 불꽃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팻말과 펼침막을 배경삼아 서로 얼싸앉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몇 주간의 투쟁으로 성취한 승리를 축하했다. 그러나 이날의 기쁨은 수십 년간 고통을 인내한 끝에 맞이한 것이었다.

무바라크 퇴진 발표가 있던 다음날 12일, 승리한 이집트 민중들이 타흐리르 광장에서 환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기쁨에 들뜬 것은 아니었다. 광장 주변의 모든 건물 벽과 난간에는 “열사들”이 그려진 커다란 펼침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초상들은 혁명이 벌어진 후 목숨을 잃은 3백 명을 애도하는 것이었다.

검은 옷을 걸친 두 명의 여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중 나이 많은 여인은 사진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그 사진을 설명해 줬다. “얘는 내 아들이라오. 이름은 모하메드이고 이제 열여섯밖에 안 됐지요.”

친구 사진을 들고 있는 남성도 만났다. 그 죽은 친구의 이름은 아흐메드고 30세였다. 그는 “사람들이 이 친구 몸에서 총알을 여섯 개나 찾아냈어요” 하고 전했다.

커다란 추모비 몇 개가 길가를 따라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여 조사를 읽고 있었고, 죽은 이들을 기리는 글과 사진으로 꾸민 조그만 나무도 있었다.

광장 한 편의 응급센터에서 자원 활동을 하는 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뜻으로 거리 이름을 바꿔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죽음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니까요.”

춤을 추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하는 사이에도, 어떤 이는 나에게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무바라크가 물러난 것은 기쁘고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얘기하고, 무바라크 정권이 자기들한테서 훔쳐간 부를 얘기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올라온 변호사인 아흐메드 씨와 그의 기술자 친구는 모두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지만 혁명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아흐메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집트 사람 절반이 빈민입니다. 싸움을 벌일 기회가 찾아오자 많은 가난한 사람이 타흐리르 광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더 나은 삶, 교육, 일자리를 원하기 때문이었죠.

“우리 모두 단결해서 싸웠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가 예전 상태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나는 먹을거리를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을 봐 왔고, 병원 진료비를 감당 못하는 노동자들도 봐 왔습니다.

“그런데도 부유한 정치가들은 이집트 밖으로 날아가 치부 행위를 벌이곤 했습니다.

“그런 정치가들과 사장들이 우리 돈을 몽땅 훔쳐 간 겁니다.”

아흐메드 씨의 친구도 끼어들었다. “그들이 재산 모을 일이 이제 더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무바라크의 부자 패거리들이 여전히 정부 내각에 남아 있다.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군부는 지금은 선거 전까지의 과도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대다수 시위대는 잠시 동안은 군대를 믿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군대를 혁명의 보호자로 여긴다. 군인과 탱크와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온 가족이 늘어선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아직도 선거 일정이 결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비상사태가 해제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은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다시 싸움에 나설 준비가 돼 있노라고 말했다.

시위대의 한 명인 아흐메드 씨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군대가 민중을 거슬러 무슨 일을 저지르더라도, 우리는 타흐리르 광장으로 되돌아 갈 길을 이미 알고 있지요.”

“이제는 두려울 게 없습니다.”

모두 광장을 떠나야 할지, 지켜야 할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과 토론이 일요일[2월 12일] 아침까지 이어졌다.

몇몇 사람은 정부가 완전히 해산하는 날까지 남아 있겠노라고 맹세했다.

이날, 경찰이 거리에서 사라진 1월 28일 이래 처음으로 도로에 차가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군 장교들이 광장으로 들어와 천막들을 철거하기 시작했는데,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아직 잠자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군대가 자기들을 이렇게 다루리라고 미처 생각치 못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광장 주변으로 너무 멀리 밀려난 상태였다. 사람들은 군인들이 설치한 장벽 주변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사람들이 두들겨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곧바로 수천 명이 광장으로 돌아왔다. 군대가 민중을 이렇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시위가 이미 목적한 것을 이뤘다고 생각한 사람들마저 되돌아왔다.

비록 군대가 광장에서 사람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을지라도, 이와 같은 사건들은 투쟁을 통해 자신감과 해방감을 얻으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여 준다.

한 사람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는 그 일상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 사람도 우리 가운데는 많습니다.”

사실, 무바라크가 너무 오랫동안 버틴 덕분에 투쟁이 심화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정치화됐다.

그러나 무바라크를 끝장낸 결정적 계기는 조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개입한 것이었다. 주류 언론은 이 점을 흔히 간과한다.

이집트 노동계급이 지닌 어마어마한 힘 때문에 군대가 파업을 탄압하고 금지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무바라크가 도주한 이후에도 파업이 끝나기는커녕 계속 번지고 있어서 군대는 겁에 질려 있다.

대규모 작업장들에서 벌어진 파업들에 영감을 얻어 임금 인상, 사장 비리 척결, 작업장 권리 확대를 요구하는 작은 쟁의들이 셀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타흐리르 광장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 중인 보험 노동자들을 만났다. 공항에서는 직원들이 공항 중앙 홀에 모여 집회를 열고 있었다. 공항 노동자들은 정규직화와 사장 해임을 요구하며 파업 중이었다. 내가 탄 비행기가 이륙할 쯤, 노동자들은 정규직화 요구를 따냈다.

이러한 투쟁들은 혁명에 가속도를 붙여서 더욱 나아가게 하고 혁명의 영향력을 심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정치적 요구들은 경제적 요구들과 결합된다.

지배 계급이 투쟁 없이는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줬으므로, 더 많은 싸움이 앞으로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이 지닌 힘을 충분히 맛봤다. 그 사람들이 무바라크를 쓰러뜨렸다.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성취했다. 이제 그들이 못 해낼 것이 더는 없다.

시위대의 한 명인 모하메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죽는 것을 겁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고, 결국 자유를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혁명에 자부심을 느끼다

사람들은 혁명의 성격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은 사람들이 서로 협동한 방식에 자부심을 느낀다.

의사들은 부상자들을 도우려고 달려왔고 광장에 계속 머물렀다.

대학 교수들은 시위대를 위해 무료 공개 강좌를 열었다.

교대로 광장 경비를 설 자원 활동가 팀이 꾸려졌고, 신분증을 검사해 비밀 경찰이 광장에 잠입하지 못하게 했다.

이전에는 거대하고, 비인간적인 체제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자기 삶과 도시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점거자들이 버티는 사이에도, 대청소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도로에 다시 페인트칠을 했다. 보도의 가드레일을 손볼 작업조가 배치됐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기 도시를 망쳤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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