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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운동의 위기와 정치적 노동조합운동

최근 현대차에서 정규직 자녀 ‘특혜’ 요구안이 노조 대의원대회를 통과했고, 서울지하철에선 조합원 과반이 민주노총 탈퇴에 찬성 투표했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운동 위기 주장이 더 불거지고 있다.

특히 정부와 조중동은 “민주노총의 추락” 운운하며 독설을 쏟아내고 있다. 고용노동부 장관 박재완은 민주노총을 “대기업 정규직만 대변하는 소수의 노동권력”이라고 비난하며 “중소·영세·하청기업의 비정규직을 위해서도 … [이들의] 횡포를 방치할 수 없다”고 핏대를 올렸다.

5월 1일 121주년 세계노동절 기념 대회 ‘노동계급의 단결 투쟁’이라는 메이데이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나 최상위 부자·권력자 들을 위해 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들을 짓밟아 온 장본인들의 이런 말은 정말 구역질난다. 지금 진정 추락하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다.

이들은 특히 민주노총의 정치투쟁과 전투성을 공격하고 있다. “민주노총식 정치·이념 투쟁과 대결 방식”이 “변해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노동운동 위기는 거꾸로 “제대로 된 투쟁을 조직하고 함께하지 못한 [것의] 귀결이다.”(안재원 금속노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실제로 민주노총은 지난 수년간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대 등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2008년 촛불항쟁 때 별다른 투쟁을 못한 것과 쌍용차 투쟁 때 살인해고를 막아내지 못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틈을 이용해 현대차나 서울지하철 노조에서 실리주의를 내세운 우파가 비집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전투성 약화

독재 정권에 맞서서 강력한 투쟁을 벌이며 민주노조 물결을 일으켰던 민주노총의 전투성과 연대의 전통은 왜 약화돼 왔을까?

물론 지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누리고 있는 임금 수준과 노동조건은 명백히 노동조합을 통한 단결과 투쟁의 성과다.

그러나 민주노조 20년 역사 동안 노동조합이 안착화하면서 협소한 부문의 이해에 골몰하는 부문주의, 눈앞의 실리에 매달리는 경제주의도 함께 발전했다. 현장 조합원들의 정서에서 멀어져 투쟁보다는 협상을 중시하며 보수화하는 노조 상층 간부들은 이 과정에서 문제를 악화시켰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지배자와 유착해 비리를 저지르면서 위기를 더 부추겼다.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는 경제 위기와도 연관이 깊다. IMF 위기 이후 구조조정 속에 ‘안정된 정규직 직장’이라는 신화는 깨졌고, 민주노조는 이것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언제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있을 때 벌자’며 잔업·특근에 매달리기도 한다.

민주노조운동은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산별노조 건설, 진보정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라는 ‘양 날개’에 힘써 왔다. 그러나 이것의 결과도 만족스럽지는 않다.

예컨대, 2009년엔 쌍용차 파업에서 금속노조가 보인 무기력 때문에 ‘산별노조 무용론’이 불거졌다. 쌍용차 파업 직후 금속노조 대의원의 단 7퍼센트만이 ‘금속노조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2004년 국회의원 열 명을 배출해 커다란 기대를 모았던 진보정당도 2008년 대선 이후 분열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다.

일부 좌파는 투쟁을 회피하는 우파 지도부에 맞서 좌파 지도부 건설을 추구했지만, 이것도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 현대차·서울지하철 등에서 좌파 노조 지도부도 제대로 싸워보지 않고 투쟁을 중단시키는 일이 벌어졌고, 이것이 낳은 냉소 때문에 다시 우파가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현장 조합원들의 투쟁과 자신감에 기반을 두지 않고선 산별노조도, 진보 의원도, 좌파 지도부도 그 자체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줬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장 조합원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확신하고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가 중요하고 정치적 노동조합운동이 필요하다.

자신감

정치적 노동조합운동은 우선, 투쟁의 정당성과 확신을 불어넣을 이데올로기 전투를 뜻한다. 최근 대학 청소 노동자들의 잇따른 승리는 싸움의 정당성과 명분이 분명할 때 강력한 투쟁과 연대가 건설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의 투사들은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해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 공격에 맞서며 노동자들의 사기를 높이려고 애써야 한다.

또 정치적 노동조합운동은 부문주의에 맞서 단결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부문주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협소하게 만들어 투쟁을 마비시킨다. 현대차 노조 이경훈 집행부가 제시한 ‘정규직 자녀 우선 채용 요구안’을 대의원 과반수가 지지한 것은 전형적인 부문주의다. 비정규직 차별에 맞서 정치적 투쟁을 건설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식만 비정규직이 안 되게 하자’는 지극히 협소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현대차 노조가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비정규직과 단결할 때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있고, 그런 투쟁만이 많은 노동자들이 느끼는 비정규직화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

노동조합운동은 이명박 정부의 정치 위기를 투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배자들의 위기와 분열은 ‘싸워볼 만하다’는 생각을 낳고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인다. 노동조합운동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위기 고통전가와 고물가 방치 때문에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임금 인상·노조법 재개정 등을 위한 정치투쟁에 나서야 한다.

투사들은 이런 정치적 노동조합운동을 건설하며 그것을 근본적 사회변혁을 위한 투사들의 네트워크 건설과 연결시켜야 한다.

제3노총과 실리주의 노선의 어두운 앞날

“노동계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제3노총의 성공을 기원하는 조중동의 호들갑을 보고 있자면, 이제 노동운동의 중심은 실리주의로 이동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실리주의 노선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이미 한국노총 장석춘 지도부가 실리주의의 미래를 보여 줬다. 그는 한나라당과 정책연대를 맺고 몇 차례나 노동자들의 뒤통수를 쳤지만, 이명박에게 이용만 당하고 결국 욕만 먹다가 쓸쓸히 물러났다.

현대차 노조 이경훈 집행부가 내세운 실리도 꾀죄죄하다. 그가 고용 불안과 노후 불안에 시달리는 4만여 조합원들에게 제시한 것은 고작해야 몇몇 장기근속자 자녀들에게 ‘가산점’을 주겠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서울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정연수 집행부의 위선을 간파한 노동자들은 이번 민주노총 찬반투표가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명박 정부가 구조조정·반노동 정책 방향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노·사 협조로 얻을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조합원들도 정연수 집행부에 불만을 제기하며 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활동가들은 그때까지 조합원들 사이에서 투쟁을 호소하며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메이데이 집회에서 만난 서울지하철 노조 차량지부 조합원의 말이다.

실리주의는 경제 위기가 깊어질수록 파산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와 사장들이 양보할 가능성이 줄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을 외치던 좌파가 제대로 투쟁과 승리를 만들어 내지 못할 때 실리주의 우파가 주도권을 쥘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규직은 더는 투쟁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

현대차 정규직 노조 지도부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정규직 ‘특혜’를 내세우자, 정규직 노조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최근 “정규직 노동자들이 보수화돼 더 이상 계급 형성을 주도할 수 없게 됐다”며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계급 주체 형성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규직 노조에 배신감을 느끼는 이남신 동지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퍼진 책임은 명백히 현대차 노조 이경훈 집행부에 있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 지도부와 노조가 보이는 문제점 때문에 정규직 노동자들의 잠재력까지 불신해선 안 된다.

현대차 정규직 노조 파업 현황
연도 파업 일수 파업 손실액
1998 36 9,644억
2005 11 5,795억
2006 36 1조 6,443억
2007 13 2,595억
1987~2007 351 10조 8,439억

민주노총 조합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힘과 가능성은 여전히 매우 크다. 최근 두 달 동안 벌어진 현대차 울산 1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공장 가동률을 절반 밑으로 떨어뜨리자 〈월스트리트저널〉은 “강성노조 망령이 안 떠난 현대차”라고 우려했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오랜 투쟁 속에서 단련된 정규직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공장을 멈춰 세우고 지배자들에게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이 힘은 진정한 변화와 개혁을 이루는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지난 연말 파업을 벌였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토록 정규직의 연대를 바랐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정규직 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정규직이 임금을 양보하고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은 답이 아니다.

이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와 투쟁을 가로막을 뿐이다.

활동가들은 끈기있게 정규직·비정규직의 단결을 추구하며 정규직 노동자들의 잠재력이 사회 진보와 변혁을 위한 무기가 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