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주택은행 파업과 우리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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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해 말에 정부와 사장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선사한 두 은행 노동자들과 6박 7일간의 농성을 함께한 민주노동당 학생 당원들의 활약에 관한 것이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노동조합의 파업은 파업의 규모·효과·영향력·전투성과 투지 등 여러 모로 2000년 최대의 투쟁이라 할 만했다. 또, 이 투쟁은 2001년 계급투쟁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생 당원들은 정부와 은행 노동자들이 겨룬 중요한 전투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학생 당원들의 개입이 파업의 향방을 결정짓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헌신성과 열정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줬다. 다른 한편, 바리케이드 저편에서 보인 '경고성' 주목도 있었다. 우익 보수 일간지 〈조선일보〉는 파업 동안에 두 번씩이나 학생 그룹에 대해 '경고성' 언급을 했다. 노동조합의 파업과 정치 좌파를 분리시키기 위해 공안 기구에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에 대한 공격 '사인'을 보낸 것이다.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의 국민·주택은행 파업 참여는 지난 여름에 호텔 롯데와 사회보험 노조에 대한 경찰력 투입 항의 투쟁에서 시작된 노동자 투쟁 연대의 정점이었다.
두꺼운 외투를 파고드는 겨울 바람, 쏟아붓듯이 내린 겨울비, 농성장에 수북히 쌓인 눈, 영하 10도까지 떨어진 기온, 불편한 잠자리 등 최악의 조건 속에서 파업 노동자들과 함께 보낸 6박 7일은 학생 당원들이 지난 한 해 동안 경험했던 투쟁 가운데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두 은행 파업에 대한 학생 그룹의 헌신적 개입 노력은 정치적 올바름에서 비롯했다. 만일 우리가 정치적 무방비 상태에서 은행 파업을 맞이했더라면 그저 허둥지둥대거나 매우 굼떴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 그룹은 사태 추이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예측에 기초해 활동을 조직했다.
12월 21일 파업 전야에 학생 당원들은 노동자들보다 일찍 일산 연수원에 도착했다. 파업에 참여하기 위해 속속 연수원에 도착하는 노동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그들을 지지하기 위해서였다. 연수원 진입로 양쪽에 '대량 해고 낳는 은행 합병 반대한다', '국민은행·주택은행 노동자들의 합병 반대 투쟁을 지지합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또, 진입로 정면에 세 개의 배너를 세웠다. 학생 당원들은 진입로 양 옆에서 팻말을 들고 속속 모여들고 있는 노동자들을 향해 열심히 구호를 외쳤다.
일부 노동자들은 학생 당원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기도 했고, 어떤 노동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몇몇 노동자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을 외치기도 했다.
우리가 파업의 길목에서 노동자들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은행 파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태를 계속 추적한 결과 파업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12월 3일 전력노조 지도부가 세번째이자 최종 파업 철회를 선언하고, 이를 알리바이 삼아 철도와 도시 철도 노조 지도부의 파업 철회가 잇따르자 사장들의 언론은 '동투(冬鬪)는 끝났다'고 일제히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12월 6일에 발표한 글에서 학생 그룹은 정부와 사장들의 희망 섞인 상황 인식을 이렇게 비판했다. "정부와 사장들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은 아직 이르다. 아직 본격적인 투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투쟁들의 성패는 예정돼 있지 않다. 그것은 객관적인 정세의 변화와 현장 조합원 대중의 자신감과 사기에 달려 있다. 우리가 개입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전력 노조 지도자들, 파업을 유산시키다', 《열린 주장과 대안》 7호, 55쪽.)
두 은행 노조 파업은 우리의 예측을 정확히 입증했다. 지난 여름부터 하반기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 투쟁의 폭발 가능성을 예견하고 정치적 준비를 해 온 덕분에 우리는 두 은행 파업에 유효적절하게 개입할 수 있었다.
우리는 6박 7일 동안 두 은행 노동자들과 진정한 일체감을 느꼈다. 우리는 파업 노동자들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 ― 분노·불만, 기쁨, 열정, 순수함, 동료애, 긴장과 초조감, 설레임, 실망감 ― 을 함께 나누었다. 또, 파업을 통한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 획득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며칠간의 파업 농성을 통해 투사로 변모해 가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물론 모든 파업 노동자들이 균등한 수준으로 이 과정을 밟은 것은 아니지만, 집단으로서 은행 노동자들은 "나약한 화이트칼라"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새로운 물결에 합류했다.
학생 당원들은 이 파업을 진정 자신의 투쟁으로 여겼다. 투쟁의 중요성을 옳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 당원들은 시험과 강추위와 농성장의 갖은 불편에도 불구하고 182명이나 참여했다.
반면, 대부분의 정치 좌파들은 은행 파업에 기권했다. 이 파업에 개입한 학생 정치 조직은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과 노학연대선봉대뿐이었다. 노학연대선봉대는 23일부터 15명 안팎의 동지들이 파업 농성에 꾸준히 참여했다. 노학연대선봉대는 지난해 하반기에 벌어졌던 주요한 노동자 투쟁들에 열의를 갖고 참가한 바 있다. 이들이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처럼 은행 파업에 대해 신문이나 리플릿이나 대자보 등을 통해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 않아, 나로서는 은행 파업에 대한 이 동지들의 입장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동지들이 일산연수원에서부터 27일 고려대에서의 무산된 집회까지 은행 노동자들과 함께한 것은 좋은 일이고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적절한 상황이 오면 특정 쟁점을 놓고 그들과 함께 공동 행동을 조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 당원들의 헌신성
학생 당원들은 은행 파업에서 은행 노동자들 못지 않은 놀라운 헌신성을 발휘했다. 우리는 12월 21일부터 27일까지 은행 노동자들과 내내 함께했다. 더욱이 학생 당원들은 12월 17일부터 21일까지 4박 5일을 한국통신 노동자들과 함께 명동성당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보낸 직후였다. 학생 당원들의 육체적 피로는 심각했다. 일산 연수원의 첫날 밤도 비닐 한 장에 의지해야 했지만 대다수 당원들은 아무 불평 없이 대열을 지켰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우리의 대열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전날보다 더 늘어났다. 우리는 파업 노동자들과 함께 '레드' 크리스마스를 한껏 즐겼다. 한 노동자는 "다른 학생들은 크리스마스에 연인과 놀텐데 학생들은 여기에 있다니 대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학생 당원들은 겨우 비바람을 막아 줄 뿐인 텐트에서 쪼그리고 자면서도 제시간에 맞춰 정확히 사수대를 서곤 했다.
우리 당원 몇 명이 속해 있는 한 학생회는 연계맺고 있던 지하철과 한통 노조의 지부를 방문해 지지 대자보를 조직해 오기도 했다. 은행 노동자들은 이 대자보를 보면서 노동자 연대의 소중함을 느꼈을 것이다. 어떤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알리겠다"며 대자보 내용을 수첩에 옮겨 적기도 했다.
은행 노동자들은 "학생 그룹을 보면 정말 힘이 난다. 우리처럼 생존권이 달린 문제도 아닌데 이렇게 열심히 하니 정말 고맙다."는 등의 칭찬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이 말들은 학생 당원들의 활동을 고무하는 상쾌한 청량제가 되곤 했다.
파업이 끝나고 직장에 복귀한 뒤에도 노동자들은 학생 그룹을 잊지 않았다. 한 주택은행 노동자는 파업이 끝난 뒤 금융노조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놓았다.
"조금 전 방송에서 일부 부유층 자녀들의 비뚫어진 행각을 보고 일산에서의 여러분들의 모습들이 생각나는군요. 우리야 나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여러분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대학 다닐 때부터 노동 운동하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좋은 느낌이 아니었는데 여러분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항상 그렇게 무언가에 열중하며 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노동자들 속에서 의미 있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우리는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노동자들 속에서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두 번의 호외 제작과 판매 그리고 파업 노동자들과 토론하기, 세 번의 대자보 부착, 열정적인 피켓팅, 규율 있게 조직된 사수대 등을 통해 파업 노동자들의 진정한 일부가 됐다.
우리는 은행 노동자들의 파업 기간 동안 호외를 두 호 제작하고 판매했다. 파업에 들어가자마자 발간된 〈열린 주장과 대안〉 호외 6호는 노동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2천1백 부가 순식간에 판매됐다. 겨울비가 내려 판매하기가 수월하지 않은 조건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많은 노동자들이 호외를 구입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