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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박정희 사망 40년:
노동자·민중의 항쟁이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그의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죽었다.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겠다고 공언했던 박정희가 비극적으로 소원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독재가 끝나길 바랐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1979년 부산의 시위대 행렬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보고 체제를 구하려면 박정희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출처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하지만 단순히 김재규가 박정희 독재를 끝장냈다고 보는 것은 망치가 못을 박았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시야를 더 넓혀 망치를 쥔 사람과 주변의 환경까지 살펴봐야 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과 모순

박정희의 죽음은 박정희가 만든 체제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했다. 즉,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박정희 시대에 일어난 급속한 산업화(자본축적)는 몇 가지 조건 하에서 가능했다.

첫째, 미국의 구실이다. 미국과 소련 제국주의는 해방 직후 각각 남과 북을 점령해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분쇄하고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권을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과 소련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냉전)이 본격화하는 맥락 속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에 개입한 미국은 한반도 남쪽을 소련의 남하를 막는 ‘반공의 보루’로 삼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1960년대 중반 미국은 남한에 자신의 시장을 개방하고 일본의 기술과 자금이 제공되도록 하면서 남한의 초기 산업화의 길을 열어 준다.

둘째, 국가의 구실이다. 국가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서 중심적 구실을 했다. 국가는 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도로와 항만을 건설하고 어떤 것을 생산하고 어디로 수출해야 할지를 지도했다. 이런 국가 주도 자본축적(국가자본주의)은 당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적 양상이기도 했다. 여기에 미국의 구실이 결합되면서 소련이나 북한, 남미와는 다르게 수출 지향적인 국가자본주의 방식으로 자본축적을 하게 된다.

셋째 요소는 둘째 요소와 결합되는 것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억압이었다.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가혹한 착취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국가는 값싸고 체제에 순응하는 노동력을 공급하고 관리함으로써 자본축적의 강력한 추진자 노릇을 하게 된다. 국가는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권리도 주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 결과 한국 자본주의는 성장과 함께 몇 가지 모순이 자라났다.

세계경제에 깊숙이 편입되는 방식의 자본축적은 세계경제의 등락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아 한국 자본주의가 주기적인 위기에 노출되게 했다. 1970년 전후 그리고 박정희가 죽은 1979년과 1980년이 그랬다.

산업화 이후 처음으로 위기가 왔을 때 박정희 정부의 대응은 강력한 국가 개입과 억압적 착취 체제의 강화였다. 이런 맥락에서 1972년 유신이 선포됐다. 물론 이것이 위기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말 더욱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다. 그 위기는 대중 저항과 맞물리면서 박정희 체제의 최상층 관리자들 가운데 하나를 사형집행인으로 만들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이 낳은 또 다른 모순은 대규모 노동계급의 창출이다. 마르크스 시대 전 세계 노동계급 수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이 시기 한국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을 강력하게 떠받치고 있던 노동자들이 저항에 나서면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군사 독재 정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경제적 불만이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불만과 결합돼 표출되거나,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때로는 폭발적인 성격을 띠었다.

저항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초기 저항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으로 표출됐다. 전태일의 희생으로 소수의 노동자들은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저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 청계피복, 동일방직, 방림방적, YH무역 등에서 국가와 회사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지키기 위한 투쟁이 이어졌다.

국가는 이런 움직임을 집요하게 탄압했다. 그래서 경제 투쟁이 이내 정치·사회적 문제로 발전하기도 했다.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중앙정보부까지 개입해 탄압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았다.

1979년 YH무역 투쟁도 한 사업장에서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 초점이 됐다.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

정부는 야당인 신민당사로 들어간 노동자들을 강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씨가 사망했다.

YH 투쟁은 부마항쟁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부마항쟁의 시발점이었던 부산대의 선언문에는 YH 탄압에 대한 항의가 주요 내용으로 담겨 있었다.

부마항쟁은 학생들의 투쟁으로 시작했지만 노동자와 도시 하층민이 대거 참가하면서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 그동안 쌓여 왔던 불만이 격렬하게 표출됐다. 관공서와 파출소가 공격받았고 박정희 초상화가 불탔다.

많은 기자들이 당시 분위기를 ‘축제’로 묘사했다. 숨막히는 억압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해방감을 만끽했다. 사람들은 잠시나마 세상이 변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부마항쟁은 누적된 계급적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와 서민에게 떠넘기려 했다. 1979년 전기료가 30퍼센트 오르고 물가도 22퍼센트나 올랐다. 체불임금과 실업이 증가하면서 노동자들의 고통이 심해졌다. 부산과 마산의 부도율과 체불임금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항쟁 기간 고위층이나 부잣집이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부마항쟁은 군대를 동원한 박정희의 탄압으로 ‘강요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부마항쟁의 영향으로 지배자들의 분열이 가속됐다.

김재규는 부마항쟁이 소수의 폭동이 아니라 누적된 계급적 불만이 폭발한 민란이나 대중 봉기의 성격이 있으며 전국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따라서 체제 자체가 위험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유화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박정희는 부마항쟁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자신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며 강압적 통치를 더욱 강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임으로써 위기에 처한 체제를 구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박정희 사후 상황을 결정지은 것은 김재규의 손끝이 아니었다.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를 죽이게 한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박정희의 뒤를 이어 억압적 착취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전두환이 대립했다. 전두환은 지배자들의 분열과 혼란을 뚫고 분출하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유혈 낭자하게 짓밟고 나서야 겨우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

한편 박정희 시대의 진정한 유산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노동계급은 1980년 패배를 겪기는 했지만 1960년대 이래 양적·질적으로 계속 성장했다. 이렇게 형성된 노동자들은 19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박정희가 만들고 전두환이 이어받은 억압적 착취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교훈

문재인 정부는 올해 부마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리고 부마항쟁은 광주항쟁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항쟁”의 일부이며 자신들이 그 전통을 승계하는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정부 지지율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독재를 계승하는 우파의 부활을 막기 위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음을 설파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독재에 맞선 항쟁들의 정신을 대변할 자격이 없다. 우선 민주당은 일련의 민중항쟁에서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이며 대중이 요구한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옹호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이야말로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부독재를 무릎 꿇리고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6월 항쟁의 성과를 공고히 했고 1989~1991년 군부 회귀 시도를 좌절시키고 1996년 12월~1997년 1월 대중파업을 통해 일당국가를 무너뜨리며 민주주의를 확대해 온 주역이다.

그 덕분에 1997년 12월 민주당이 처음으로 집권할 수 있었다. 민주당이 민주주의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확대한 민주주의의 수혜를 민주당이 입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부마항쟁을 비롯한 민중항쟁은 계급 적대의 표현이기도 했다. 과거에 탄압받았지만 이제는 몇 차례 집권까지 경험한 민주당은 기성 권력 집단의 일부가 됐다. 지금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계급 불평등에서 보듯이 민주당도 부의 축적과 대물림에서 다른 지배자들과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현 집권 세력이 말하는 진영 논리에 계급을 욱여넣을 것인가. 아니면 계급 문제를 제기하면서 전통적인 우파뿐 아니라 현 집권 세력에게도 맞설 것인가.

민주당은 박정희에 대해 독재는 문제가 있지만 경제성장의 업적은 인정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우파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위해 독재가 필요했다고 반박한다. 즉, 정치와 경제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파의 주장은 박정희 독재를 옹호하는 역겨운 주장이긴 하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박정희 망령의 부활을 막으려면 단지 박정희의 정치적 독재에 대한 비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억압적 착취 체제(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 결합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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