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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데타와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은 12·12 쿠데타가 일어난 9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79년 12월 12일 권력 찬탈을 노린 ‘하나회’ 일당이 전두광(전두환)의 계획하에 정상호(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일단 체포한 뒤, 하극상을 무마하기 위해 뒤늦게 대통령(최규하)에게 재가를 받으러 가는 9시간을 너무나 생생하게 잘 다루고 있다.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면 꼭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영화 속 전두광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던가. 이는 사실 검찰이 1995년 7월 18일 5·18 광주 민중 항쟁을 유혈 진압한 것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리면서 한 말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필자는 목이 터지도록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하라”고 외치며 항의 시위에 참여했다. 결국 우리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으로 보냈다.

배신적이게도, 민주당 김대중 정부가 국민 화합의 명목으로 2년여 만에 사면했지만 말이다. 노무현 정부도 전두환·노태우에 대해 전직 대통령 예우를 취소하긴 했으나, 무궁화대훈장 수훈은 박탈하지 않았다. 현재 무궁화대훈장 추탈 촉구 10만 인 서명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죽을 때까지 반성하지 않았던 전두환은 결국 죽어서도 무덤을 갖지 못했다. 죽은 지 1년 동안 매장을 못하다가 최근 전두환 유족들이 파주에 유해를 묻을 거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파주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쿠데타와 광주 학살, 군부 독재, 민중 탄압의 상징인 전두환이 편히 잠들 곳은 없다”며 반발해 무산됐다.

2022년 국민의힘 대선 주자 시절 윤석열은 “전두환 대통령이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애써 두둔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민중 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은 전두환의 ‘정치’의 핵심이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 10만이 모인 신군부 성토 대회

1979년 부마항쟁과 10·26

전두환의 12·12 쿠데타를 알기 위해서는 박정희 사살 사건인 10·26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자신의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죽었다. 이날 궁정동 술자리에 있었던 인물은 두 사람 외에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계원 비서실장이 있었다. 이야기의 핵심 화제는 부(산)마(산)항쟁과 앞으로 서울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저항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직접적 계기가 됐다. 1979년 10월 16일 ‘유신대학’의 오명을 쓴 부산대에서 학생들이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학생들의 시위는 그동안 고통받아 왔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퇴근하는 노동자와 도시 하층민들이 “부가가치세 철회하라,” “언론 자유”를 외치며 대거 참여했다. 학생 시위는 순식간에 민중 항쟁으로 발전했다.

17일 아침 일본 언론들은 16일의 부산 시위가 민중 봉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산에서 유신 체제 철폐를 주장하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저항이 절정에 이르렀던 10월 17일 저녁, 청와대에서는 유신 7주년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권은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위는 이미 마산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마산 시위는 그야말로 김재규가 말한 대로 민란에 가까웠다. 파출소나 관공서뿐 아니라 부유 상점가, 고급 주택가들도 공격의 대상이 됐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민란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이 “이 사태는 계급 전쟁의 요소가 있다”며 사태의 심각성을 지적할 정도였다. 당시 체불 임금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창원공단의 현대양행 노동자들도 10여 대의 버스틀 타고 퇴근하다가 시위에 참여했다. 유신 정권은 20일 마산에도 위수령을 선포해 잔인하게 진압했다. 부마항쟁의 불길이 인근 대구로 북상할 조짐을 보였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5개 도시로 확산될 위험성이 있었다.

이때 10·26이 발생한다.

부산에 계엄을 선포한 직후 방문한 바 있었던 김재규는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160명 연행자 중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구호를 보니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이 심각했습니다” 하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김재규는 부산 시위 사태가 대중 봉기의 성격이 있으며 전국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서울에서 4·19와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대통령인 나를 사형에 처할 수 있을 것인가”라며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경호실장 차지철도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00~300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진다”고 맞장구 쳤다.

유신 체제 7년 동안 강경책으로 일관해 온 박정희는 한 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계속 밀릴 거라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반면, 김재규는 체제를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유화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마항쟁이 지배계급의 분열을 낳았다.

일부에서는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위해 나섰다고 강조하지만, 김재규는 박정희를 제거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체제를 구하려 했을 뿐이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같은 육사 2기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군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일 회담에 반대하는 6·3시위 때는 이를 진압하는 서울지구 계엄부대장이었다. 박정희의 최측근만 역임한다는 보안사령관을 거쳐 1976년부터는 중앙정보부장으로 활동했다.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1979년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에 경찰을 투입해 강제 해산을 시킨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명령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했다.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마산역 앞 전투경찰과 싸우는 시위대 ⓒ출처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신군부의 부상과 쿠데타

사람들은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유신의 심장’이라 표현한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박정희 없는 유신 체제’는 신군부 체제로 이어졌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하나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전두환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는 1961년 말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조직됐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 직후 현역 대위로서 육군사관 생도들의 5·16 지지 시위를 조직해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박정희는 하나회 회원들에게 특전을 베풀며 친위 세력으로 키웠다. 박정희는 1979년 1월 국가비상사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지휘하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3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최규하가 대통령이 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군부에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가 긴급조치 폐기, 김대중 복권 등 유신 완화 정책을 취하자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과 하나회 군부 세력은 위기감을 느끼는 한편, 불만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박정희 피살 사태에 정승화가 연루됐다는 핑계를 내세워 정승화를 제거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영화 〈서울의 봄〉이 다루는 핵심 장면이다.

12·12 쿠데타가 발발한 다음 날 글라이스틴은 “우리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겪고 있다. 민간 합헌 정부는 명목상 유지되고 있지만 모든 징후는 군의 중추기관들이 일단의 야심적인 젊은 장교들에 의한 치밀한 계획에 의해 장악됐음을 보여 주고 있다”고 밝혔다.

안정을 중시하며 관망하던 미국은 곧바로 새 군부 지도자들과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도 전두환 정권 초기 40억 달러를 융자해 줌으로써 전두환 정권에 상당한 힘을 실어 줬다.

쿠데타 성공 후 기념 사진을 찍은 전두환 등 신군부 실세들

고개 든 노동자·학생 저항과 광주항쟁

영화가 제목으로 상징한 다른 그림이 있다. 바로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담아 1979년 10월 26일에서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1980년 5월 17일까지의 시기인 ‘서울의 봄’이다. ‘서울의 봄’이라는 표현은 1968년 소련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선 체코 민중의 저항 ‘프라하의 봄’에서 따온 말이다.

10·26을 계기로 유신 체제에 억눌려 왔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저항이 분출했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 이후 곧바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핵심 이유일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 교수는 “5·16 쿠데타나 다른 지역 쿠데타와 달리 전두환과 신군부는 왜 2단계 쿠데타로 갈 수밖에 없었는가. 12·12 쿠데타가 일어날 때에는 대세가 민주화로 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사망 후 유신 체제의 질곡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대학생들은 학생 활동의 완전한 자율화와 학원 민주화를 요구했다. 10·26 이후 최초의 학생 시위가 11월 22일 서울대에서 벌어졌다. 학생들은 “유신 체제 완전 철폐”와 “조기 개헌”을 외쳤다. 11월 24일에는 재야 민주화 세력인 민주통일국민연합이 주도해, (유신헌법에서 설치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YWCA 위장 결혼식’도 열렸다.

최규하가 여전히 유신헌법 아래서 12월 6일 체육관 선거로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곧바로 긴급조치 9호 해제와 김대중 연금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이어 긴급조치 관련자 561명이 특별 사면됐고, 1130명이 석방됐다.

물론 언론·출판·집회·시위를 전적으로 금지하는 비상계엄은 해제하지 않았으며, 일명 ‘K-공작’으로 불리는 언론에 대한 통제와 검열은 오히려 강화됐다.

1980년 봄이 다가오자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저항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 밑바탕에는 악화되는 경제 위기가 깔려 있었다. 1976년 14.1퍼센트까지 성장한 경제가 1979년에는 오일쇼크까지 겹쳐 6.5퍼센트로 하락한 상황은 박정희 죽음의 한 배경이었다. 1980년에는 상황이 더 나빠져 마이너스 5.2퍼센트로 폭락했다. 경제 위기의 고통은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전가됐다.

이를 바탕으로 신규 노조 건설과 기존 노조 민주화, 임금·근로조건 개선, 체불 임금 지급, 휴·폐업 반대,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한 투쟁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노동운동이 급격히 분출했다.

경제 위기

1980년에 들어서부터 같은 해 4월 말까지 809건에 달하는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는 1979년 1년 동안 발생한 노사분규 건수의 8배이며, 유신 시절 전체 파업 수보다도 많았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에선 탄광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지도부 재선거”를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고 급기야 사북면 전체를 장악했다. 계엄군 투입까지 고려될 정도였다. 부산 동국제강 노동자 1000여 명도 임금 문제로 본사 사무실을 점거했다. 일신제강, 동명목재, 인철제철 등지에서도 파업이 잇달았다.

1980년 사북항쟁 당시 철로를 막은 광원과 그 가족들

3월 새학기에 제적 학생 759명이 복학됐고, 해직 교수 19명이 복직됐다. 이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와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다. 학생회가 부활되고 학도호국단이 폐지됐다. 유신 정권이 억압했던 학생 자치 활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4월에는 전국 대학에서 “학원 자율화,” “어용 교수 퇴진,” “교권 확립”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병영집체 훈련 거부 투쟁도 일어났다.

저항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4월 30일, 계엄사령부는 전군지휘관회의를 열어 “노동 문제, 학원 소요, 일부 정치인의 정치 집회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것”을 결의했다. 기존까지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던 신군부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맡게 된 것과 궤를 같이 했다. 이제 전두환은 국무회의에 참석해 국정을 운영할 뿐 아니라 국방장관을 제치고 군부를 장악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학내 문제에 집중했지만 전두환의 집권 음모가 명백해지자 신군부에 대항한 항의 시위에 나섰다. 대학생들은 5월 13일부터 전국적으로 “전두환 퇴진,” “계엄령 해제,” “직선제 개헌” 등의 구호를 내걸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 서울역에는 35개 대학 학생들과 시민 등 10만 명이 모여 민주화를 요구했다. 특히 ‘서울의 봄’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1980년 봄의 민주화 운동은 서울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울의 학생운동 지도부는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 결정을 내렸다. 김대중과 김영삼 등 자유주의 야당 정치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시위가 더 확산되면 신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준다”며 자제하라고 호소했다.

이미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14일에 육본 작전참모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소요 진압 본부를 설치하고 전군에 소요 진압 부대 투입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신군부는 북한의 위협, 경제 파국 논리 등의 온갖 이데올로기를 동원했다. 미국 국방부도 13일에 “휴전선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발표함으로써 이를 도왔다.

5·18 광주 항쟁 직전까지도 김대중과 김영삼은 시국수습 6개항을 발표하면서 평화 유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을 오히려 내란 혐의로 구속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5월 17일 제주를 포함해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하는 소위 ‘5.17 2단계 쿠데타’를 통해 사실상 군부 통치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최종적으로 권력을 잡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마치 이승만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제주 4·3 항쟁의 저항에 직면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두환은 광주 민중의 처절한 항쟁에 맞닥뜨려야 했다.

“우리가 저들의 총탄에 맞아 죽는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는 비록 패배하지만 역사는 반드시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죽음으로 저항했던 광주 항쟁 지도부 윤상원의 말은 7년 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부활했다.

신군부가 짓밟은 광주 항쟁은 1987년 항쟁의 밑거름이 됐다. 1987년 거리 시위에 나선 대우 거제조선소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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