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30년:
박정희의 18년 독재를 무너뜨린 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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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0월 26일은 박정희가 궁정동 술자리에서 중앙정부장 김재규에게 사살된 지 30년 되는 해다. 박정희의 죽음은 단순히 그가 자주 즐겼던 퇴폐적이고 ‘마초’적인 ‘엽색행각’을 동반한 술자리가 끝났다는 것만 뜻하지는 않는다. 박정희의 죽음의 배경에는 유신독재의 모순과 이에 저항한 부마항쟁이 있었다.
유신체제는 1972년에 선포됐다. 이 체제는 박정희의 종신집권, 권위주의적 억압책 강화, 중화학공업화 정책과 이를 위한 사회적 동원이 결합한 것이다. 박정희는 이를 통해 사회를 준전시(準戰時) 상황처럼 통제했다.
박정희는 주로 “안보 위기”를 근거로 들어 권위주의적 억압을 정당화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고, 그에 뒤따른 패권의 공백을 ‘공산 중국’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메우려 했다.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는 박정희가 “안보 위기” 운운한 것을 “순전히 아전인수적인 것으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의 대외정책상의 극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남한은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아시아의 마지막 도미노처럼 보였다.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의 은밀한 뻬이징 방문(은) … 타이완의 중화민국에 대한 미국 지원의 사실상 종결로 이어졌다. 닉슨 독트린은 … 베트남전으로부터 승리 없이 철수하겠다는 신호를 분명히 보냈고, 그럼으로써 남한 정권과 유사한 처지의 사이공 정권을 위태롭게 했다.”
국내 상황도 박정희에게 불리했다. 극단적 저임금 노동에 기반을 둔 급속한 수출주도 경제성장 전략의 모순이 터지기 시작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많은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의 양심을 자극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겨우 94만여 표 차이로 박정희에게 패했는데, 박정희의 대규모 부정 선거 운동을 감안하면 사실상 박정희가 진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국가 예산의 10퍼센트를 선거 운동에 썼다. 거기에 미국 정유자본(걸프, 칼텍스)이 제공한 자금(7백만 달러)을 더해야 한다.
유신체제는 광범한 민심 이반을 막지 못했다. 유신체제는 1974년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며 더욱 극단화하지만, 이런 극단적 억압 조처는 결국 박정희의 무덤을 파는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 들어 지식인·학생 들의 민주화 투쟁은 점점 강경해졌다. 이와 함께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운동도 활발해졌다. 1979년 YH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여성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은 부마항쟁의 한 배경이 됐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대 학생들의 요구안에는 “YH사건에서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의 엄단”이 들어 있었다.
커피 한 잔 값
어떤 점에서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항쟁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근거는 반공과 더불어 경제성장이었다. 부산의 사상공단, 마산의 수출자유구역은 박정희의 ‘성공적인 수출지향적 경제발전 전략’의 상징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지적대로 박정희의 특혜를 입은 이 지역, 다시 말해 박정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역이라고 여겼을 이 지역이 박정희의 무덤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모순 그 자체가 큰 몫을 했다. 많은 농민들이 박정희식 경제성장 정책을 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로 여기기도 했지만, 막상 그들을 기다린 것은 비인간적인 노동규율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었다. 그나마 “선성장 후분배”를 내세운 박정희 정권 시절에 경제성장의 과실도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았다. 경제성장률은 높았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했다.
우파들의 과장과 달리, 특히 제조업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은 매우 느렸다.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평화시장 여공들의 시급은 커피 한 잔 값에 지나지 않았는데, 거기서 9년이 지난 1979년 YH 농성 여공의 시급 수준도 그와 같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재벌과 부자 들은 급속히 부를 늘렸다. 우파와 보수적인 학자들은 박정희 정권이 비교적 평등한 분배를 이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빈부 격차는 박정희 정권 내내 심해졌다. 1978년 원풍모방 노동자 장남수는 이렇게 말했다. “100억불 수출을 달성했다고 거리는 들떠 있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외로워야만 합니까. 다들 잘 살게 되었다는데, 모두들 경제가 성장했다고들 하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배가 고픕니까 … 알 수가 없습니다 … 저희들은 누구를 위해 일해 왔으며 또 일해야 합니까?”
당시 경제 위기도 박정희 정권의 기반을 흔들었다. 경제는 1976년 14.1퍼센트 성장했지만, 성장률이 1978년에 9.7퍼센트로 떨어지더니 ‘오일 쇼크’가 강타한 1979년에는 6.5퍼센트, 급기야 1980년에는 마이너스 5.2퍼센트로 폭락했다.
위기의 대가는 서민들이 치렀다. 1979년 박정희는 전기요금을 35퍼센트나 올려버렸다. 물가가 22퍼센트 올랐고 해고와 실업도 늘었다.
박정희의 중공업 주도 성장 정책이 ‘역사의 복수’를 초래한 측면도 있다. 당시 부총리 자문역을 했던 김기환은 “중화학 공업에 치중하다보니 1975~77년 섬유산업에 대한 은행대출이 전체의 40퍼센트에서 절반으로 줄고 말았는데, 그 결과 노동집약적인 중소기업들이 몰려 있던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터졌다”고 분석했다. 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배에 달했고, 수출증가율 역시 전국증가율인 18.4퍼센트에 훨씬 못미치는 10.2퍼센트로 둔화했다.
민심이 돌아섰다는 사실은 1978년 12월 총선에서도 드러났다. 야당인 신민당이 32.8퍼센트를 득표했다. 신민당보다 더 선명한 야당을 표방한 통일당도 7퍼센트를 얻었다. 반면 박정희의 공화당은 31.7퍼센트를 얻어 사실상 패배했다.
부산과 마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의 의석 수 10석 중 공화당은 4석, 신민당은 5석을 차지했다. 서중석 교수는 “그나마 당선한 공화당 4명도 1위가 한 명도 없었고 다 차점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공화당의 열세가 두드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야당 탄압을 더 강화해 신민당 당수인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했는데, 이는 들끓는 부산 민심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유신대학’
한국 역사에서 자주 그랬듯이 부마항쟁에서도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방아쇠 구실을 했다. 유신에 항거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켜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들어온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누구도 항쟁이 폭발적으로 벌어질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한 부산대학교 활동가는 항쟁 하루 전에도 “역시 부산대는 안 돼” 하며 술을 퍼마셨다고 회고했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4천여 명이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진출했다. 이어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자 시위대 규모는 점점 늘었다. 저녁이 되자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합류해 시위대는 5만~7만여 명에 달했다. 상인, 접객업소 종업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까지 가세했다. 시위의 성격은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점점 격렬해졌다. 경찰서, 어용 언론사, 도청 등이 불에 타거나 파손됐다.
부마항쟁 당시 현장을 시찰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항쟁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었습니다.]”
항쟁의 규모와 격렬함에 놀란 정부는 신속하게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다. 마산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촉발했다. 부산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유신대학’이던 경남대학교 학생 1천여 명이 거리로 나섰다.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해 피를 뿌리고 있다. 나가자!”
마산에서 항쟁은 더 격렬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도시하층민이 항쟁의 주력이 됐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의 항쟁이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로 확산하려 하자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진압부대로 투입된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대검을 꽂은 채 잔인한 진압 작전을 폈다.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은 이렇게 말한다.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해] 데모 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 이는 다음해 광주를 피로 물들인 공수부대의 야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부마항쟁은 군대의 폭력으로 잦아들었지만, 항쟁이 지배자들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권력자들이 분열했다. 박정희는 강압적 지배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 박정희는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했고, ‘2인자’인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 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고 거들었다.
‘온건파’를 대변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강압적 지배방식 사용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10.26 박정희 사살 사건은 이런 분열의 결과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부마항쟁은 김재규의 손을 빌어 박정희 유신체제를 끝장낸 셈이다.
사람들은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곧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짧은 해빙기는 끝났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광주항쟁과 6월 항쟁에 이르는 민중항쟁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게다가 부마항쟁은 박정희의 지역 차별적인 지배방식의 모순과 한계를 보여 줬다. 무엇보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모순을 밝히 드러내면서 군사독재 아래서도 저항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