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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정권들의 전철을 밟는 노무현 정부의 노사관계 구상:
해고는 더 쉽게 파업은 더 어렵게

노사관계 로드맵 최종안이 나오자 사용자 단체인 경총과 전경련은 불만을 터뜨렸다. 지난 9월에 발표된 안보다 “사용자 대항권”이 약화됐다는 것이다.

지난 9월에 발표됐던 노사관계 로드맵은 사용자들이 부당해고를 해도, 부당노동행위를 해도 형사 처벌받지 않게 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익사업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을 때 긴급 복귀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돼 있었다.

한 달 넘게 지속된 민주노총의 노동운동 탄압 항의 투쟁 덕분에 사용자들에게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주려는 노무현의 시도는 일단 어느 정도 좌절됐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노사관계 로드맵의 뼈대는 최종안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그것은 해고는 더 쉽게, 파업은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대로 남은 손배 가압류

경총과 전경련은 노사관계 로드맵의 최종안이 중간보고서와 달리 “파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종래 불법 파업이던 것이 합법 파업으로 변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이 보고서가 조정을 거친 뒤에야 파업이 가능했던 ‘조정 전치주의’를 없앴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조정 전치주의는 경총과 전경련이 환영했던 9월 중간보고서에서 이미 사라졌다.

조정 전치주의가 사라졌음에도 경총과 전경련이 지난 9월에 노사관계 로드맵 중간보고서를 환영했던 이유는 그것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한 파업 제한과 해고 요건 완화 조항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최종안에 거의 그대로 살아 남았다.

사용자는 합법 파업에 대해서도 직장 폐쇄로 대응할 수 있다.

김주익 열사가 죽음으로 항거한 손배 가압류는 여전히 파업 위협 수단으로 남아 있다. 신원보증인에 대한 책임 제한, 조합원 최저 생계비의 압류 대상 제외 등 별볼일없는 수준만 손봤다.

긴급조정 결정이 내려졌을 때 쟁의행위 금지 기간이 30일에서 60일로 연장됐다.

파업 효과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대체 근로가 공익사업에 허용됐다. 파업 때 최소 업무를 유지하라는 의무를 부과한 것도 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공익 사업장은 파업 예고를 의무화했는데, 이것은 사용자들이 파업을 무력화할 계획을 세울 시간을 주는 것이다.

파업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는 공익 사업의 범위를 크게 확대했다.

정리해고 요건을 한층 완화하고, 도산 절차에 있는 기업에는 이마저 적용 안 하거나 더욱 완화해 주도록 했다.

부당 해고였음이 드러나도 복직시키지 않고 금전 보상으로 대신할 수 있다. 이제 눈엣가시인 활동가를 돈 몇 푼 쥐어 주고 쫓아낼 수 있다.

전투성에 대한 공격

노무현의 노사관계 로드맵은 이전 정권들과 비교해 전혀 새롭지 않다. 해고를 쉽게 하고 파업을 어렵게 하는 것은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때부터 정부와 기업주들이 한결같이 추구해 온 것이다. 김대중은 IMF와 경제 위기를 구실로 노동자들을 몰아붙였다.

그 결과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는 어느 때보다 크게 벌어졌고 비정규직이 급격히 증가해 노동자들의 처지는 한층 불안해졌다.

《헤럴드경제》(5월 20일자)에 따르면, 최고경영자급 임원과 일반 직원의 연봉 격차는 계속 벌어져 왔다. 2001년 임원들의 평균 보수가 1998년보다 227퍼센트 오른 반면, 직원의 평균 보수는 157퍼센트 오르는 데 그쳤다. 국내 1백대 기업 임원들의 연봉은 2002년에도 30.5퍼센트 올랐다. 반면, 올해 8월 주류 언론이 ‘노동 귀족’이라고 물어뜯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률은 8.63퍼센트였다.

최고경영자급 임원들은 연봉 공개를 꺼리고 있지만, 공개된 것만으로 따져 봐도 1백대 기업 임원과 직원의 연봉 격차는 평균 7.6배이고 삼성전자는 1백 배가 넘는다.

김영삼과 김대중에 이어 노동자들의 처지를 공격하는 방향으로 노사관계를 수립하려는 노무현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완전한 위선이다. 노무현은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두 배, 세 배의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뭉쳐 최근 노동운동을 밀고 나가고 있다”는 비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이것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는 비열한 시도일 뿐, 노무현은 비정규직 차별 철폐 또는 비정규직 철폐에 관심이 없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 씨가 이를 죽음으로 입증했다.

노무현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노동조건 악화 기도에 맞서 저항해 온 조직 노동자들이 대부분 대기업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2001년 말 현재 조합원 5백 명 이상인 대기업 노동조합의 수는 전체 노조의 6.8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대기업 노동조합원의 수는 전체 노동조합원 수의 73.5퍼센트나 된다. 조합원 5백 명 이상 노조의 전체 조합원 수는 평균 2천7백66명이다.

특히 민주노총의 경우에는 대기업 노조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아진다. 민주노총 소속 노조의 평균 조합원 수는 4백25명이 넘는다. 그리고 1999년과 2002년 사이에 일어난 노동쟁의의 75∼90퍼센트가 바로 이 부문에서 일어났다.

요컨대, 노무현이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공격할 때 그것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는 조직 노동자 대부분을 공격하는 것과 다름없다.

노무현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조건이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월등히 낫다고 말한다. 역설이게도, 이것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세계은행이 지난 2월에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조직 노동자들은 미조직 노동자보다 15퍼센트 정도 많은 임금을 받으며, 그 밖의 선진국들에서도 5∼10퍼센트 정도의 임금 격차가 나타난다. 우리 나라의 경우 노조의 임금 효과는 1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한겨레21〉).

한편, 대기업 노조들의 전투적 투쟁이 그들 자신에게만 이익을 가져다 줬던 것은 아니다. 주요 업종 대기업 노조의 임금 교섭 결과는 전국의 모든 기업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노동연구원장 이원덕에 따르면, “이들 [대]기업은 상대적으로 지불 능력이 양호한 기업이었기 때문에 이들 기업에서의 고율 임금인상이 타결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고율 임금인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우리 나라 노동조합 조직률은 12퍼센트를 넘지 않지만, 1987년 이래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투쟁은 전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과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노동자들 내부의 조건 격차가 벌어진 것은 정부와 사용자들이 정리해고 등 노동조건을 강제로 악화시킨 결과다.

노사관계 로드맵의 밝지 않은 미래

노무현은 과거처럼 이념을 가지고 진보와 보수를 가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념이 아니고 대화와 타협을 추진하는 게 진보”(12월 5일 대전·충남 간담회)라는 것이다.

그 동안 노무현은 투쟁을 하면 대화와 협상을 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 애써 왔다. 손배 가압류도 이를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다. 함부로 파업에 들어갔다가는 조직(특히 재정)을 지키지 못할 수 있다고 노조 지도자들을 협박하는 것이다.

지난 1년을 돌아보건대 그의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성난 부안 주민들 앞에 정부가 사죄했고, 노동운동 탄압 항의 운동의 핵이었던 한진·근로복지공단·세원 노동자들은 요구를 어느 정도 쟁취했다(근로복지공단과 세원은 한진만큼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노무현과 대화한 결과가 아니라 노무현에 맞선 결과였다. 취임 첫 해 동안 노무현은 우호적 지지자들을 많이 잃었다. 한 인천지하철 노동자는 자신이 느낀 배신감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사모 회원으로 오프 모임에 참석하였고 결국 개혁당에 입당해 ‘돼지저금통’을 털었다. … 지금은 좀 어이가 없다. 왜 그 때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향하는 심정’이라는 유시민의 감정과 나의 감정을 동일시했는지…

“철도 파업에 공권력을 투입하고 대통령이 ‘귀족 노조’ 운운할 때도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라며 노무현을 붙잡기 위해 최면을 걸었던 나였다. …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이용석 본부장의 유서를 읽으며 너무도 외로웠을 그들의 절박한 투쟁을 생각하며 비로소 나는 노무현을 버렸다.”(‘디지털 말’에서)

노무현은 정부에 친화적이고 노사정 협상을 중시하는 세력이 민주노총 4기 지도부가 되기를 바라며 은밀히 지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런 세력이 지도부가 된다 해도 노사관계가 노무현 뜻대로 정착되기는 쉽지 않다. 1998년 초에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정리해고제를 합의해 줘 김대중 정부로부터는 환대를 받았지만 며칠 뒤 민주노총 대의원들로부터는 불신임당했다.

노무현 정부는 노사관계 로드맵 최종안이 노사간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그 안대로 법제화하겠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노사관계 로드맵을 지지하는 사람조차 “[이렇게 되면] 참여정부의 노동정책 기조와는 관계 없이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노동배제전략이 될 것”(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이라고 꼬집는다.

노무현이 해고를 더 쉽게 하고 파업권을 제한하는 노사관계 로드맵을 법제화하려 한다면 거대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시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노사정위 안에서 발휘하는 협상력보다는 협상장 밖에서의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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