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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정부를 통해서만 실질적 개혁이 가능하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대표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2012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를 만들고, 대선에서 진보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진보 양당의 통합만으로는 이런 목표 달성이 힘드니까 참여당과도 통합해 덩치를 키워 민주당과 대등하게 연립정부를 추구하자는 것이 개혁주의 지도자들 상당수의 생각인 듯하다.

자주파 경향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국민참여당 8문 8답’이란 문건은 “2012년 … 진보개혁진영의 다수파 국회를 형성하여 … 각종 노동개혁입법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 [그것이] 노동운동의 어려움을 뚫고 나갈 전략적 돌파구”라고 주장한다.

진보신당 심상정 전 대표도 “대선을 통해 진보정당이 연합 정치를 할 때 공정거래위원장, 국세청과 같은 곳의 인사권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실제 개혁이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참여당 대표 유시민도 최근 〈레디앙〉 인터뷰에서 “[진보 양당 통합으로] 무슨 현실을 바꾸는 일을 도모하겠는가”라며 “권력의 일부로 노동·사회 정책을 바꾸는 것이 싫다면 정치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의회나 정부에 진출해서 권력을 공유해야지 실질적인 진보·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물론 진보정당이 원내교섭단체를 이루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의회나 국가기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아래로부터 투쟁을 건설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관료 집단

이 때문에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참여당과의 통합이나 민주당과 연립정부 구성하기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의회와 정부에 진출한다 해서 그것만으로 사회를 뜻대로 바꿀 권력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노무현이나 오바마는 정권을 잡고 의회를 장악하고 나서는 약속했던 개혁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정책을 추진했을까.

이에 관해 노무현 정부 내내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던 김병준은 시사적인 증언을 했다.

“관료집단 커뮤니티는 … 관료조직 외부의 이해관계자와 고객 집단까지를 포함[한] … 일종의 네트워크이고 … 커뮤니티의 정서가 때로는 대통령이나 집권세력의 철학이나 정책보다 우선합니다. … [예컨대] 정확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데 … 기획재정부의 세제실이나 국세청이 쥐고 … 청와대에서 가져오라 해도 안 가져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나 대통령도 대기업과 관료, 보수 언론 등이 맺은 이 항구적 “네트워크”의 전방위적 압력과 노하우를 극복하기 힘들다. 국가기구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겨레21〉이 인터뷰한 대기업의 고위 임원도, 지금은 한나라당마저 ‘좌클릭’하며 재벌을 욕하지만 “선거만 끝나면 다시 우리를 찾아와 앞으로 잘해 보자고 손을 내밀 것”이라며 “누가 집권하든 달라질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병준은 “집권해도 세상 그렇게 못 바꾼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유시민도 올해 1월 한 토론회에서 “막무가내로 대통령이 의지를 발휘한다고 해서 실제 그것이 현실로 가는 게 아닙니다” 하고 집권 시절 경험을 털어놓은 바 있다.

노무현이 4대 개혁 입법 실패 후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말했다가 퇴임 후에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강조하는 등 오락가락한 것은 이런 무력감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다.

주류 지배자들은 선출된 정치인들이 의회나 행정부에서 추진하는 개혁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여길 땐 그동안 구축한 “네트워크”를 동원해 가차 없이 선출된 권력을 무력화하려 한다.

우파들이 타협적이던 노무현조차 ‘탄핵’하려 했던 것이나,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던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조차 사법부가 위헌 판결을 내려 무력화했던 것을 떠올려 보라.

자기 제한

더 극단적인 역사적 사례들도 있다.

1970년 칠레판 민주대연합으로 집권한 ‘사회주의자’ 아옌데 대통령은 비밀리에 주류 엘리트들에게 기존 헌법 준수 서약까지 했는데도 집권 내내 관료 조직의 사보타주와 기업주들의 파업, 언론의 마녀사냥, 군부의 쿠데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아옌데는 자신이 임명한 참모총장 피노체트가 일으킨 유혈 쿠데타를 통해 제거됐다.

이런 사례들은 단지 의회·정부에 진출한다고 개혁이 가능해지는 게 아니라, 주류 지배자들의 비공식적 네트워크에 맞선 아래로부터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위로부터의 개혁 노선은 “투표로 심판하자”며 노동운동이 선거 때까지, 또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투쟁 방법뿐 아니라 투쟁 목표도 자기제한적으로 된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요구가 야 5당이 주도한 희망시국대회에서는 국정조사 요구 등으로 낮춰진 것이 한 사례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997년 대중파업으로 노동자들은 당시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섰다. 지배계급은 굴욕적으로 후퇴했고, 1년 뒤 일당국가가 해체됐으며,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주류 지배자들은, 특히 경제 위기 시대에 오직 대중투쟁이 자신들을 위협할 수준으로 발전해 적당한 양보로 대중과 온건파 저항 지도자들을 달래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느낄 때 양보에 나선다.

따라서 법 개정을 통해 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생각은 앞뒤가 바뀐 것이다. 대중투쟁의 힘이 강력해야 악법을 막거나 개혁 입법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1996년 민주노총이 민주적 노동법 개정을 위한 총파업 준비를 마치고도 국회 논의와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를 바라보며 파업 실행을 미루자, 김영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 정권은 도리어 그해 말 정리해고를 도입하는 악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버렸다.

뒤늦게 투쟁에 나선 민주노총은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지는 대중파업으로 이미 국회에서 통과된 ‘정리해고법’ 등 날치기된 노동 악법들을 철회시켰다. 진보 국회의원 한 명 없이도 투쟁의 힘으로 대통령 사과를 받고 악법을 막아 낸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그 노동악법들을 다시 통과시켜 노동자들의 뒤통수를 쳤다.

따라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보다 대중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의원단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조직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개혁의 진정한 동력이다.

“아래로부터 쟁취한 개혁은 계급 조직을 강화하고, 그리하여 미래의 진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위에서 선사한 개혁은 수동성을 부추기고,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포섭시키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영국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의 경고는 경청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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