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인터뷰:
자본주의 이후의 삶 ― 미친 시장의 대안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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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하면서 갈수록 많은 사람이 우리 삶을 더 낫게 만들 대안을 찾고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자본주의 이후의 삶’에 관해 말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교수이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SWP)의 중앙위원장이다. 국내 번역된 주요 저서로는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과 《반자본주의 선언》, 《무너지는 환상》,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등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분배할지를 시장이 결정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시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시장이 자원을 분배하고 물건들의 가치를 매기는 방식은 문제가 많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의 생산자원이 극소수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1퍼센트’가 대기업·은행·국가를 지배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더 많은 이윤과 권력을 차지하려고 다툽니다. 생산과 분배의 우선순위는 이런 미친 경쟁을 통해 결정됩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자원이 낭비됩니다. 예컨대, 현 경제 위기가 발생한 이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낭비됐는지 생각해 보죠.
자본주의 경쟁 과정은 가격 변화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진정한 사물의 가치와는 상관없는 황당한 결과를 낳습니다.
헤지펀드를 운영하는 사장 같은 쓸모 없는 인간들은 간호사와 교사처럼 꼭 필요한 사람들보다 수백 배나 많은 보수를 받습니다. 또, 자본주의 가격 시스템은 이 체제가 초래한 환경 파괴와 같은 중요한 비용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민주적 계획경제에서 자원의 분배와 사용에 관한 결정은 이 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토론과 투표를 통해 내릴 것입니다.
오늘날 경제는 한줌의 ‘전문가’만이 아는 자연 법칙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에서는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이 경제를 결정할 것입니다.
현대 경제를 민주적으로 계획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투표로 결정하기에는 너무 복잡하지 않을까요?
민주적 계획경제에서는 특정한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권력이 대대적으로 탈집중화돼야 합니다. 자본주의를 뒤엎는 혁명을 통해 그런 탈집중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후의 삶에서는 최대한 많은 결정이 지역 수준 ― 작업장, 주민위원회, 혹은 위원회에서 선출된 대표자 회의 등 ― 에서 내려져야 합니다.
좀더 복잡하고 큰 결정을 내리려면 다른 방식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원을 더 거시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분배하려면 시, 주, 전국, 심지어 전 세계적 수준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주류 정치는 대다수 사람들이 수동적이고 중요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자기 일상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쟁취한다면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입니다.
계획경제는 정말 비효율적일까요? 그래서 동유럽이 망한 것일까요?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도 이미 많은 계획이 있습니다. 긴밀히 연관된 복잡한 경제 체제는 서로 협력하고 미래를 내다보려는 노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계획이 매우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계획은 경쟁하는 기업과 국가 들이 정한 우선순위를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주의’라고 잘못 불린 동유럽과 소련은 이 문제를 잘 보여 줬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패배하면서 이 혁명을 만든 노동자평의회가 몰락했습니다. 당-국가가 권력을 독점하게 됐습니다.
이 새로운 지배계급은 서방 제국주의 열강과 경쟁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서방과 대적할 수 있는 무기를 생산하려고 중공업을 건설하는 데 자원을 집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련식 ‘계획’이었습니다. 국가의 손에 권력이 엄청나게 집중됐습니다. 이 계획은 보통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군사 경쟁의 필요에 종속됐습니다.
따라서 소련의 사례는 민주적 계획이 불가능함을 보여 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래전에 칼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것을 입증했습니다. 즉 사회주의는 국제적 수준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일시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떨어져 나온 고립된 사회가 생기더라도 결국 자본주의의 경쟁과 축적 논리는 다시 강요될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구성물 중에서 새로운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용한 것이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밑바닥부터 사회를 새로 건설해야 하나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인류의 생산력을 급격히 발달시켜 이른바 “문명화”하는 구실을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가 매우 착취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그 구실을 한다는 전제 조건을 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구실은 이런 생산력, 간단히 말해 여성과 남성의 능력을 자본주의의 족쇄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능력을 되찾아 집단적이고 민주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가 성취한 생산력의 바탕 위에 건설될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들 가운데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릴 것입니다. 게다가, 자본주의 틀 내에서 발전된 기구들 중에는 인간의 필요를 우선시하라는 노동운동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들도 있습니다. 공공의료 제도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우리는 전국민의료보험제도(NHS)의 관료적 구조를 그대로 보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NHS에는 새로운 사회에서도 가치있을 만한 요소도 꽤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불평등을 낳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그것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회주의 혁명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돼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남반구일 수도 있습니다. 21세기 투쟁의 최선두에 서 있는 곳은 이집트와 볼리비아 같은 곳입니다.
남반구의 노동자, 농민과 빈민은 사회 변혁에서 주도적 구실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주도적 구실을 하면 할수록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재생산될 위험이 낮아질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에서 우선적으로 처리할 것 중 하나는 저탄소 경제로 신속하게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혼란을 낳을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는 수십억 명이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기후변화는 왜 계획이 필요한지 잘 보여 주는 쟁점입니다. 이번 남아공 더반에서 열리는 기후변화 회의에서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는 진지한 조처를 도입하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면 국제적 수준에서 자원이 분배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쟁 체제의 법칙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를 구하려면 민주적 계획이 필요합니다.
좀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사회주의 사회는 인류의 보편적 필요에 바탕을 둔 사회일 것입니다. 이 사회가 어떤 수준의 물질적 복지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든 그 복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