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이 만든 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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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2009년 1월에 〈저항의 촛불〉 12호 온라인 기사로 실렸다. 당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전쟁이 지속되면서 이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 연대 운동이 벌어졌다. 영국 런던에서 20만 명, 프랑스 파리에서 10만 명,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10만 명이 모이는 등,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국가에서 수십만 명이 이스라엘의 학살을 규탄하는 활동에 참가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성장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뿐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 등 다양한 쟁점들이 논의됐다. 어떤 사람들은 오바마 정부에 기대를 표시하고,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독립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2국가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유엔에 기대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아래 글들은 이런 쟁점들을 포함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이 당하는 고통의 역사적 기원과 대안에 관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성됐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충돌의 배경은 무엇인가?
충돌의 기원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 국가는 시온주의 깡패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벌인 결과 탄생했다. 그 뒤 60년 동안 이스라엘 국가는 일상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탄압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모국’을 건설하려는 운동인 시온주의는 19세기 말에 유럽에서 성장하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처음에는 극소수의 유대인들만이 이 운동을 지지했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이 “땅이 없는 사람[유대인]을 위한 임자 없는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그래서 1897년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던 두 명의 랍비들은 “신부[팔레스타인 땅]는 아름답지만 아쉽게도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시온주의 운동의 성장은 더뎠다.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팔레스타인에는 겨우 5만 6천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반면에 아랍인들의 수는 1백만 명에 달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주요 열강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뺏으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는 영국과 손을 잡았고, 영국은 1차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미국과 손잡았다.
1947년 유엔은 시온주의 정착민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의 55퍼센트를 할애하는 ─ 그들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오직 6퍼센트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이 분할안도 성에 차지 않았다. 1948년 3월 시온주의 민병대들은 테러를 저지르며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땅을 뺏었다. 그들은 수백 명의 아랍 주민들을 살해했고, 75만 명을 고향에서 내쫓는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자, 서안지구, 다른 나라로 도피했고 빈곤한 삶을 살았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의 80퍼센트를 차지하게 됐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법률을 보면, 모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이주할 수 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원래 자기 고향으로 돌아올 권리는 부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의 나머지 지역도 점령했다. 그리고 가자와 서안지구를 약탈하고 모든 종류의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과 조직을 공격했다.
왜 이스라엘은 툭하면 전쟁을 벌이나?
이스라엘은 탄생 순간부터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왔다. 이스라엘은 매우 군사화된 국가며, 핵무기를 포함해 서방에서 최신 무기를 공급받는다. 이스라엘은 총인구가 7백30만 명에 불과하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현대화한 군을 보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 이유에서 군사력을 키웠다. 하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억누르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중동 지역에서 서방의 이익을 보호하는 “경비견” 구실을 하기 위해서다. 이스라엘은 군사력을 사용해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에 도전하는 모든 종류의 운동들을 굴복시켰다.
1956년 이스라엘은 영국·프랑스와 손잡고 이집트를 공격했다. 1967년에는 이집트·시리아·요르단과 전쟁을 치렀다. 1973년에는 이집트·시리아와 또 한 번 전쟁을 벌였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1978년, 1982년, 2006년 3차례나 침략했다.
또, 이스라엘은 툭하면 이집트·시리아·레바논 영토를 침범했다. 1981년에는 이라크의 핵발전소를 폭격했다. 이스라엘군은 1978년~2000년까지 남부 레바논을 점령했고, 헤즈볼라의 저항을 받고 2000년에야 물러섰다.
이번 가자 공격도 이스라엘의 마지막 전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의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성격 때문에 더 많은 충돌, 더 많은 폭격, 더 많은 죽음이 있을 것이다.
왜 서방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가?
19세기 말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했고 수에즈 운하를 통제했다.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는 군사적·경제적 이유 때문에 영국 제국에 매우 중요했다.
영국은 아랍세계에서 점증하는 저항 운동들이 수에즈 운하에 대한 통제를 위협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1차 대전으로 영국은 이집트의 북부 국경과 수에즈 운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기회를 붙잡았다.
1917년 영국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팔레스타인을 영국 제국의 식민지로 삼기로 시온주의 운동과 약속했다.
예루살렘의 영국 총독은 시온주의 국가가 “적대적 아랍주의의 바다에 떠 있는 충성스러운 작은 유대인 얼스터[영국 지배 시절, 북아일랜드의 친(親)영국 반동 지역]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51년 이스라엘 일간지 〈하아레츠〉는 나중에 유명해진 글에서 이스라엘과 서방 제국주의 간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스라엘은 [서방의] 경비견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미국과 영국의 바람과 노골적으로 모순되는 방식으로 아랍 국가들에 적대적 정책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방 열강이 묵인한다면, 이스라엘은 서방이 인내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전적인 아랍 국가들을 혼내주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미국이 영국 대신 중동에서 패권 국가가 되자 이스라엘은 곧장 미국편에 붙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의 군대를 제압해 자신의 유용성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 승리로 베트남에서 골치를 썩고 있던 미국은 이스라엘이 [자기 대신] 중동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 뒤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익은 밀접하게 연관됐다. 모든 이스라엘의 행동은 미국의 이익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1979년에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최근 미국이 이라크에서 재앙에 빠지면서 이 관계는 더 중요해졌다.
아랍 거리에서 분노의 싹이 자라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경비견’의 구실을 해 주기를 절실히 바랄 수밖에 없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원래 사이가 안 좋았나?
많은 사람들은 아랍인과 유대인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절대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둘 사이에는 원한 관계가 뿌리 깊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 갈등의 뿌리는 먼 과거가 아니라 당대의 역사에 있다. 그것은 시온주의 운동이 팔레스타인 땅을 뺏으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그 전에는 모든 아랍 수도에서 유대인들은 무슬림이나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살았다.
예루살렘, 카이로, 다마스커스, 베이루트, 라바트, 바그다드와 다른 아랍 도시들에서 유대인들은 아랍 도시 문화의 중요한 일부였다.
1920년대 영국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다 죽은 이라크인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1920~1930년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며 성장한 민족주의적 좌파 운동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상황이 변했다. 서방의 지원 아래 정권을 잡은 아랍 독재자와 왕 들은 아랍 유대인들을 자기 고향에서 강제로 몰아냈다. 이스라엘은 이런 과정을 고무했다.
이제 아랍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2등 시민이 됐다. 그들 중 이스라엘 상류층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많은 아랍 유대인들은 아랍 문화를 고수하며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했다.
전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동에서 사람들 사이의 분열, 갈등, 증오는 서방 제국주의의 유산인 것이다.
‘두 국가 방안’이 최선의 선택인가?
많은 사람들은 ‘두 국가 방안’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를 두 개의 국가 ─ 하나는 이스라엘 국가,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 국가 ─ 로 나누는 방안이다.
겉보기에 이것은 가장 현실적 방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국가는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날까?
대부분의 ‘두 국가 방안’은 가자지구와 서안에 있는, 이스라엘 영토를 사이에 두고 분단돼 있는 두 개의 작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하나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두 개의 조그마한 영토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고,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의 대부분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있을 것이다.
수백만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공정하고 영구적으로 해결하려면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두 국가 방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영토와 사람을 조화시킬 방법을 알지 못한다. 반면에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 전체를 포함하는 통일된 다인종 국가를 건설하는 ‘하나의 국가 방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마을들 대부분은 현재 텅 비어 있다. 이 마을들을 재건해서 원래 거주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도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난민들 문제도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 이주민들을 받아들였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해 주면 된다.
사실, ‘하나의 국가 방안’의 가장 큰 장벽은 현실적 어려움이 아니라 시온주의 자체의 성격이다. 시온주의는 유대인만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다. 따라서 ‘하나의 국가 방안’은 근본적으로 시온주의의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평화 프로세스’로 자신만의 독립된 국가 건설의 기회를 제공받지 않았나?
서방 정치인들과 언론은 미국이 중재하는 ‘평화 프로세스’만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고 중동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93년 발효된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서안의 17퍼센트와 가자의 60퍼센트에서 자치권을 부여하고 나아가 이것을 완전한 팔레스타인 국가로 전환시킬 계획이었다.
1987년 팔레스타인 항쟁, 즉 인티파다[아랍어로 ‘항쟁’]로 이스라엘은 모종의 합의를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독점하기를 원했고, 가능한 많은 땅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새로운 팔레스타인 정부의 지도자가 되도록 허용했다. 그 대가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에 많은 것을 양보했고, 이스라엘은 아라파트가 자기 대신 팔레스타인인들을 통제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수많은 도로·천연자원과 영토를 통제할 권리를 부여 받았다. 또, 평화협정 체결 후 2000년까지 점령지에 진출한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수는 두 배나 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투스탄’[과거 남아공 영토 안에 있던 아프리카인 자치구]과 닮았다. 말로는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과거 남아공의 흑인 차별제도] 내에 존재하는 흑인 자치 국가지만 실제로는 인종차별적 남아공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평화 프로세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을 조금도 나아지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선적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분노로 2000년 9월 2차 인티파다가 폭발했다.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정착민들과 병사들을 철수시켰지만, 가자의 영공·영해·국경에 대한 통제권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손에 남았다. 이스라엘은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당선한 하마스를 표적으로 삼아 팔레스타인 저항을 파괴하려 시도해 왔다.
하마스는 테러리스트 조직인가?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공격을 감행하자, 조지 부시는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하마스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하마스에 ‘이슬람주의 테러리스트’ 딱지를 붙이고 싶어 한다. 사실 미국은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에게 이 딱지를 붙이고 싶어 한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엄혹한 군사 통치 아래 수십 년간 지속된 팔레스타인인들의 끔찍한 현실 속에서 등장했다.
하마스는 미국이 지원한 ‘평화 프로세스’에 반대했고, 1993년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 민중의 삶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다.
당시 파타는 가장 유력한 팔레스타인 저항 단체였다. 그러나 파타의 지도자들은 평화 프로세스의 대가로 저항을 포기했다. 하마스는 파타가 곧 덫에 걸릴 것이라 경고했다.
팔레스타인인 압도 다수에게 ‘평화 프로세스’가 사기라는 것이 곧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은 계속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을 유린했고 요르단강 서안에 유대인 정착촌을 늘려 갔다.
하마스의 인기가 올라갔고, 하마스는 2000년에 폭발한 ‘제2차 인티파다(민중항쟁)’의 중심에 섰다. 2006년 1월 총선에서 하마스는 제1당이 됐다.
그러나 서방은 팔레스타인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마스 지도자들과 의원들은 연행되거나 암살 당했다. 하마스 지지자들은 감옥에 내동댕이쳐졌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은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역풍을 맞았다. 2007년 6월, 하마스가 이끈 민중 투쟁으로 이집트 정보기관과 파타가 조직한 쿠데타가 실패했다.
쿠데타 세력이 축출 당하자,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분쇄하고 하마스를 뽑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벌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하마스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의 합법 정부이며 저항의 전통을 잇고 있다.
왜 아랍 민중이 나서야 하나?
중동의 모든 문제는 결국 제국주의의 문제다. 제국주의가 과거 이스라엘을 건국했고, 오늘날 이스라엘을 돕고 있다.
중동에서 제국주의의 주요 이익은 수에즈 운하에서 석유 자원으로 바뀌었지만 세계 제국주의 열강은 여전히 중동을 “세계 역사상 최고의 선물” ─ 1945년 미국 국무부의 표현 ─ 로 여기고 있다.
제국주의는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으로서 이스라엘을 필요로 한다. 아랍 친미 독재 정권들은 대중 항쟁으로 전복될 위험에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아랍인들은 친서방 지배자들이 중동의 석유 자원을 탕진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 또, 토지, 일자리, 빈곤, 배고픔 때문에 분노하고 있다.
최근 이집트에서 발생한 시위들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정부도 비난했다. 모든 아랍 수도에서 비슷한 구호를 들을 수 있다.
대다수 아랍 정권들은 제국주의에 의존해 생존한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1950~1960년대처럼 중동의 부패 정권들을 무너뜨릴 대중 항쟁으로 발전할까 봐 두려워한다.
오늘날 이집트의 대중 저항들은 제국주의와 이집트 정부 모두에 대한 분노로부터 탄생했다. 민영화에 반대하고 최저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 파업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분노와 연결되고 있다. 이 분노가 이번에는 더 많은 파업과 시위 활동의 발생을 고무하고 있다.
그래서 아랍 정권들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나 레바논의 헤즈볼라 같은 저항 조직들을 두려워한다. 모든 저항은 이스라엘과 서방에 대한 도전이며, 결국 아랍 정권들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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