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차 투쟁이 남긴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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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는 파업 농성 노동자들이 밥을 먹고 있는 사이를 틈타 2월 19일 오후 6시경 경찰력을 투입시켜 부평 공장 안의 노동자들을 쥐 잡듯 연행해 갔다.
헬기 두 대와 포크레인 네 대, 소방 사다리차를 동원한 4천2백여 명의 경찰은 소방차까지 동원해 물대포를 쏘아 대며 곤봉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경찰은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는 어린아이가 넘어지건 말건 조합원들을 찾으러 공장을 휘젓고 다녔다.
84명의 조합원들을 연행한 경찰은 그들에게 건조물 침입 혐의를 적용했다. 자기 직장에서 농성을 했던 것이 건조물 침입이라는 것이었다. 농성장에서 빠져 나와 산곡 성당을 향하던 조합원들을 마치 범죄자 다루듯 연행해 가는 바람에 놀라 뛰어가던 한 조합원은 어깨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경찰은 노동자들이 경찰력 투입에 항의하는 것도 필사적으로 막았다. 경찰력 투입 항의 시위가 벌어진 뒤 부평은 ‘계엄령이 내려진 도시’를 방불케 했다. 24일에는 전경 69개 중대 7천여 명을 부평 일대에 배치했다. 역 승강장에서 대기하던 경찰은 역사 안에까지 들어와서 폭 10미터 가량의 승강장을 모조리 차지하기도 했다. 경찰은 군사 독재 정권에서도 없었던 성당 난입까지 시도했다.
절망 센터
사상 최대의 정리해고 규모를 놓고도 김대중은 뻔뻔스럽게도 “그래도 아픔은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정리해고 통보 철회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치유될 수 없다. 정리해고 통보서를 받은 한 조합원의 부인은 혼절해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통보서를 보자마자 전신이 마비된 조합원 부인도 있었다. 해고 노동자들은 임대 아파트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다.
여론의 비난 때문에 나중에 철회하긴 했지만, 회사측은 산재 요양소에 있는 노동자들한테까지 정리해고를 불법 통보하기까지 했다. 부평공장에 함께 다녔던 일가 친척 6~7명에게 한꺼번에 정리해고 통보서가 날아 오기도 했다.
대우차 회사측은 23일에 희망센터 개소식을 하면서 온갖 생색을 냈다. 김호진 노동부 장관, 최기선 인천 시장, 장영달 민주당 대우차 대책위원장, 이종대 회장 등이 모여 마치 노동자들을 크게 걱정하고 염려하는 듯이 458억 원을 들인 실직자 구제 프로그램이라며 역겨운 생색을 냈다. 그러나 대우차는 노동자들에게 몇 달치의 임금 체불을 해왔다.
한 대우차 조합원은 ‘희망 센터’를 ‘절망 센터’라고 불렀다. “희망센터에 가봤더니 신공항에 일자리가 있다고 하더군요. 한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 도착하니 청소일이고 급여는 육십만 원이었습니다. 이것이 정부와 회사에서 알선하는 재취업입니다. 이것도 3차 하청업체입니다. 그리고 이것마저도 언제 잘릴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절망 센터라고 부릅니다. 희망 센터 기자 불러 놓고 홍보 말고 당장 폐쇄하라.”(2월 25일 한 조합원의 글)
2월 23일에는 부산 금사 공장에서 일하던 한 대우차 노동자가 체불임금 등에 시달리는 자신의 삶을 비관해 20층 계단에서 투신 자살했다.
“너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집회장에 나왔다.”는 한 나이 많은 부평 조합원의 얼굴에서는 한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정작 대우차 부실의 주인공인 김우중은 세계를 활보하고 다니고 있다.
정부는 경찰력을 투입시킨 바로 그 날 전 대우 사장 등 경영진 34명을 분식 회계 묵인 혐의로 구속했다. 노동자만 ‘징벌’하는 게 아니라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정부가 마치 공평무사한 것처럼 보이려 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체포영장을 발부한 노동자 34명과 숫자도 똑같았다.
김대중은 3월 1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노동자만 구속시키는 게 아니다.”라며 경영진들 구속에 온갖 생색을 다 냈다.
그러나 사법 처리된 34명의 경영진들은 얼마 안 가 자유로운 신세가 될 것이다. 다른 여느 사건 때처럼 감옥에 간 기업주들은 금방 감옥에서 출옥하거나 보석으로 풀려나게 될 것이 뻔하다.
지금 정치인들 가운데 김우중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없다. 김우중은 이미 1988년 5공 청문회 때 전두환에게 백억 대의 돈을 뇌물로 바쳤다고 밝혔고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때에도 수백억 원의 뇌물을 제공했다. 김우중과 김대중 사이를 연결시키는 인물로 대우 그룹의 무기거래상이었던 조세중이라는 자가 언론에 폭로되기도 했다.
해외매각
정부는 부평 공장에 경찰력을 투입하자마자 해외매각을 추진하겠다고 재빨리 발표했다. 채권단은 경찰력이 투입된 바로 다음 날 그렇게도 몸을 사리던 자금 지원을 재개했다.
정부·채권단·회사는 해외매각이 대우차 부실의 구세주가 될 거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해외매각은 순전한 도박이다.
지금 GM은 대우차를 거저 주면 가져가겠다는 식이다. 대우차 실사를 진행중인 GM은 대우차 존속가치(최하)로 산정된 3조 7천5백79억원의 10퍼센트도 안 되는 가격을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평 공장이 제외될 것이라는 예측도 잠재워지지 않고 있다.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청춘이 어린 그 공장을 폐쇄시킨다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의 자동차 기업이 보통 50만 명의 고용 효과를 낸다. 해외매각되면 자동차 관련 노동자들의 고용을 해쳐 대중 소비를 둔화시켜 결국 경제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GM으로의 매각이 도박인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대우차가 매각되는 게 기정 사실인 것처럼 말하지만 이것은 정부 관료나 채권단의 몽상이 될 수도 있다. “다음 달 초로 예정돈 GM 이사회에서 대우차 인수안이 부결되거나 미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통과되더라도 협상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세계일보〉 2월 24일자)
이런 미친 도박을 위해 김대중 정부는 노동자들을 제물로 삼는 것이다.
워크아웃 동의서
대우차 노조의 투쟁은 지난해부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한판 대리전으로 여겨졌다. 대우차 노동자들이 부평 공장에서 쫓겨난 지 열흘이 지난 지금, 대우차 노동자들이 승리하기를 바랐던 많은 사람들은 왜 사태가 여기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물론 대우차 노조의 투쟁은 여전히 불씨를 남기고 있다. 쌍용차 본관을 점거한 정비 지부 노동자들의 투쟁, 가족대책위의 헌신적인 활동, 좀처럼 씻겨지지 않을 대우차 노동자들의 응어리진 분노와 한숨, 무엇보다 GM으로의 매각 문제 등이 남아 있다.
김대중이 축배를 들기에도 아직은 이르다. 4천2백 명의 극히 잘 훈련된 경찰을 투입시키고 부평 시내를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로 몰아넣은 김대중 정부는 노동자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다. 정작 대우 부실의 장본인인 김우중은 그대로 놔 두고 애꿎은 노동자들을 제물로 삼았다는 비난 여론에서 김대중은 집권 기간 내내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대우차 노조의 투쟁이 패색이 짙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8일 금속연맹의 네 시간 부분 파업은 상징적인 시위로 마무리됐다. 안타깝게도 산곡성당의 농성 대오로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반전시키기에 턱없이 역부족이다. 김일섭 위원장이 “부평공장 탈환”을 말하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
도대체 대우차 노조의 투쟁은 어디에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일까? 양보에 양보를 거듭한 노동조합의 대응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경제 위기 때 노동조합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가? 노조 지도부가 무기력하게 대응한 원인은 무엇인가?
지금은 패인을 정확하게 짚어 보려는 용기가 아쉬울 때다. 대가가 큰 교훈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대우차 노조의 투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1999년 말 워크아웃 동의서 제출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1999년 대우 그룹의 몰락은 한국 사회에 깊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정부의 대우 정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했고 대우 처리 문제를 놓고 지배자들은 날카로운 긴장 속에 빠져 들었다. 결국 1999년 8월 26일 정부와 채권단은 대우차 워크아웃을 결정했다.
정부와 채권단은 워크아웃을 결정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용조정, 임금삭감, 상층 노조와의 연대 단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워크아웃 동의서를 대우 그룹 소속 노동조합들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채권단은 이미 이 때부터 노조 동의서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동의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신규 자금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부도 절차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에 노조 지도부들은 즉각 반발했다. 대우 그룹 노조 지도부들은 금감위 앞에서 총력 투쟁 대회를 열고 워크아웃 동의서 제출 거부를 결의했다.
그러나 제출 거부 결의와는 달리 11월 중순 대우조선 노조가 동의서를 제출했고 급기야 대우차 노조의 추영호 집행부도 워크아웃 동의서를 제출하고 말았다. 쌍용차 노조를 제외하고 모든 노조가 동의서를 냈다. 채권단의 기세는 등등해졌고 노조를 더욱 들들 볶기 시작했다.
워크아웃 동의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포함돼 있었다. “채권단이 기업 개선 작업 추진을 위해 요구하는 제반 사항을 노사합의를 통해 수용할 것, 노조는 기업개선 작업이 종료될 때까지 기업 개선 작업의 진행 및 생산에 차질을 주는 행위를 자제할 것”. 물론 추영호 집행부는 “워크아웃이 되더라도 기존 노사간 체결된 단협을 준수하고 고용안정을 보장하라”는 내용의 별도 합의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채권단한테 기선을 제압당한 뒤의 이 요구는 사후약방문격일 뿐이었다.
워크아웃 동의서 제출은 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노조 투쟁의 족쇄가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11월과 12월 중 총파업을 고려하겠다”는 대노협의 애초 선언은 워크아웃 동의서 제출 후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완성차 4사 공대위’의 해외매각 반대 투쟁
워크아웃을 전후로 김대중 정부 내에서는 대우차를 제3자에게 매각하자는 안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마치 노동자들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이제는 세계적인 메이저 자동차업체와 제후하지 않으면 국내의 일자리를 다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니 대우자동차도 매각하지 않을 수 없다”(〈조선일보〉, 1999년 7월 22일치)고 말했다. “대우차 경영진들도 워크아웃을 단지 해외 매각을 위한 수순 밟기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다. 오히려 경영진 내의 이권 다툼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주간 동아〉 8월 10일치)
급기야 2000년 1월 4일에는 대우차 입찰 사무국이 설치됐다. GM, 포드, 다임러 크라이슬러, 피야트, 현대차가 신청서를 냈다. 우선 협상 대상자로 포드가 선정됐다가 포드가 인수를 포기하기까지 김대중 정부와 채권단은 해외매각이 한국 기업들에 대한 국제적 신용도를 높일 것이라는 맹목적 시장주의 몽상과 근시안주의에 빠져, 인수 가격으로 4조 3천억 원을 제시한 GM보다 3조원 이상을 높게 책정한 포드로 대우차가 매각되는 게 얼마나 이상적이냐고 선전하기 바빴다. 당시만 해도 포드 인수 포기 가능성에 대해 정부나 채권단은 전혀 알아채지도 못했다. 정말이지 그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도 못하는 근시안주의자들이었다.
한편, 워크아웃 후 대우차 공장 가동률은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장 가동률은 30퍼센트까지 내려갔다. 대우차 노동자들은 잔업·특근 수당은 고사하고 쉬는 날도 많아져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미 1998년부터 급여는 70퍼센트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해외 매각이 고용불안을 낳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해외매각 논의에 제동을 걸고 생존을 지키기 위한 대중 행동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2000년 1월 25일 대우차 노동자들은 투표자의 93퍼센트 찬성으로 쟁의 행위를 결의했다. 이런 압도적인 파업 결의가 진정한 파업으로 이어진다면 워크아웃 동의서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그래서 다시 정부와 채권단에 역공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대우·쌍용차 해외매각 반대 완성차 4사 노조 공동대책위원회’는 3월 말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완성차 4사 공대위는 세 가지 핵심 요구를 제기했다. “대우·쌍용차 해외매각 반대와 공기업화”, “생존권 박탈하는 구조조정 반대와 노사공동결정제 도입”(일종의 경영참가권), “부품산업 노동자 생존권 보장”이 그것이었다.
대우차 처리 문제가 계속 쟁점이 되고 있는 터에 해외매각 반대와 공기업화를 제기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특히 대우차 노동자들은 2월 29일부터 3월 23일까지 여섯 차례의 부분 파업을 벌였고 3월 31일과 4월 1일에는 전면파업을 함으로써 완성차 4사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부평 공장 조립 사거리에서 열렸던 몇 차례의 공장 내 집회 분위기도 전에 비해 고조돼 있었다.
완성차 4차 투쟁은 4월 6일 동시 전면 파업으로 정점에 올랐다. 완성차 4사 노조는 4월 13일 초선 바로 전 날이었던 12일에는 전국 차량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완성차 4사 투쟁에는 중요한 약점들이 있었다.
해외매각 반대투쟁에 대한 평가
해외매각 반대 투쟁은 대우차 처리 문제에서 진정한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자신 있게 노조의 목소리를 내고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러나 해외매각 반대의 궁극적 목적은 다소 혼란돼 있었다. 해외매각 반대 투쟁이 “나라를 살리는 애국애족 투쟁”이라는 대우차 노조의 유인물 제목은 매각 반대 투쟁의 궁극 목적이 무엇인지를 의심케 한다. 그런 관점으로는 “집단 이기주의”라는 정부의 공격을 자신 있게 맞받아치기 힘들다.
공기업화가 대안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에 관해서도 충분한 토론과 교육, 입장 제시 등이 필요했다. 공기업화를 위해 필요한 ‘공적 자금’은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시원스럽게 논박할 필요가 있었다. 국민이 져야 할 부채 부담은 되레 해외매각이 될 경우 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점, 부유층한테서 세금을 거둬 공기업화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심지어 “그래도 포드가 GM보다는 점잖은 기업 아니냐”는 식의 입장에 대해서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은연중에 포드 인수가 그래도 차악(GM 인수보다는)이라고 여기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사측의 휴무 조치가 조합원들의 집결을 방해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집행부는 휴무 조합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서 “집행부는 휴무 조합원을 철저히 방치했다”, “조합원이 참여할 수 있는 실천 프로그램을 적극 개발, 배치하지 못했다”(‘대우차 노동자 투쟁 분석’, 노동자의 힘(준비모임) 발간 자료, 70쪽)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출근 투쟁을 하러 공장에 나온 노동자들은 집회에 참여하고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어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파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간부 파업으로 축소되고 있었다. 정부와 회사측의 파상 공세가 시작되자 이런 약점들은 특별히 더 부각됐다.
그렇다고 해외매각 반대 투쟁이 하지 말았어야 했던 파업이었다는 평가는 옳지 않다. 투쟁이 어떤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 항상 “투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식의 ‘무의미론’이 고개를 드는 경향이 있다. 해외매각 반대 투쟁이 일단락되자마자 대우차 사무노위가 ‘해외매각 불가피론’을 제기하고 나온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김일섭 노조위원장이 2000년 12월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공기업화 투쟁은 하지 말았어야 했던 투쟁”이라고 깎아 내렸던 것은 잘못이다.
정부와 회사측의 반격
그러자 정부와 회사측은 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막기 위해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2월 25일 이후 20여 차례에 걸친 부분 파업 때문에 대우차만 해도 완성차 6천여 대의 생산 차질로 5백억 원의 손해를 입은 터였다.
정부는 반격을 시작했다. 김대중은 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불법 파업”이라고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김대중은 아예 4월 9일 “불법파업과 집단 이기주의 근절을 위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노조의 집단 행동이 회복기에 접어든 한국 경제의 먹구름이 되고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우차 노동자들더러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 공세를 퍼붓던 그 자들이야말로 벤처 주식 열풍의 도가니 속에서 주가를 조작하고 벤처 투기 자금을 위해 불법 대출을 일삼고 있던 진정한 집단 이기주의자들이었다. 김대중은 의사들의 집단 휴진과 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동렬에 놓고 비난 공세를 퍼붓기도 했다. 선거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는 비난도 잊지 않았다.
김대중이 담화문을 발표하기 바로 전 날 검찰은 당시 추영호 대우차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28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회사측도 파업을 막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대우차 사장 정주호는 조합원들이 아예 공장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평 공장에 휴업 조치를 내리기까지 했다. 휴업 조치는 회사측의 파업 탄압용 단골 메뉴가 됐다. 회사측은 경찰력 투입도 요청했다.
해외매각 반대 투쟁이 4월 13일 총선이 끝나자마자 급속히 시들해졌던 것은 주되게 정부와 회사측의 파상공세 때문이었다. 정부와 회사측이 손발을 맞춰가며 퍼붓는 융단 폭격은 조합원들을 위축시켰다. 회사측은 파업과 집회에 참여한 조합원들에게 경고장을 날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부와 회사측의 역동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저항하느냐였다. 안타깝게도 노조 지도부는 정부와 회사측의 역공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회사측의 3월 말~4월 초 투쟁에 대한 앙갚음은 계속됐다. 임단협 교섭을 하려면 텐트 농성장을 철거하라며 협박하는가 하면, 조합비 30억 원을 가압류시키기까지 했다. 4월 투쟁에 참여한 조합원에 대해서는 파업 무급 근태 코드를 적용했다. 전투적인 활동가들이 집중돼 있는 조립부에 대한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조립 1부에서는 130여 명 정도의 인원 정리가, 조립 2부에서는 짭수 높이기(노동강도 강화)가 이어졌다.그러나 회사측이 역공을 가할수록 추영호 집행부와 상당수 대의원들은 뒷걸음질쳤다. 회사측이 임단협 교섭의 전제로 텐트 농성장 철거를 요구하자 급기야 4월 18일 중앙투쟁위(집행부와 대의원들 대표로 구성된)는 소위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네 개의 문에 설치돼 있던 텐트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체포영장 발부자 신변보호’와 ‘합법적 틀 속에서 2단계 총력 투쟁의 명분을 얻자’는 게 텐트 철거의 ‘변’이었다. 중앙투쟁위원회는 회사측에 25일 12시에 텐트를 철거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럴수록 회사측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임단협 회의 요청에도 정주호 사장은 불참했다. 지배자들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물리적 공세에 비해 추영호 집행부의 대응은 너무도 소심했다.
한편, 김대중은 부평 공장에 경찰력을 투입시키기 바로 전 날인 4월 24일 영수회담에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범국민적 지원을 호소하며 “집단 이기주의 근절”을 주장했다. 남북 화해 무드를 대우차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데에 이용한 것이다. 급기야 김대중 정부와 정주호 사장은 25일 새벽 3시 30분 경찰이 부평 공장에 들어가 추영호 위원장과 간부들을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추영호 집행부가 테트를 철거하겠다고 이미 약속했던 바로 그 날 새벽에 회사측은 다시 노조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추영호 전 위원장에게는 실형 1년 반이라는 중형이 선고됐다.)
그리고 회사측은 5월 4일 해외매각 반대 투쟁에서 가장 선두에 서서 싸웠던 노조 활동가들 23명을 해고하고 투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해 온 대의원들과 소위원, 조합원들에게 감봉 및 정직 등의 조치를 통보했다. 그리고 5월 임금 지급을 연기시켰다.
고용안정 협약서
한번 밀리면 끝간 데 없이 밀린다는 위기감이 헌신적인 현장 활동가들을 다시 모이게 했다. 추영호 위원장 연행 때문에 조합원들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분노 또한 컸다. 부당 해고자와 부당 징계자, 대의원 일부와 소위원들이 중심이 돼서 다시 회사측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부당 징계자들은 농성 투쟁, 현장 순회 투쟁, 중식 피켓팅, 출근 투쟁 등을 쉬지 않고 조직했다. 소위원들은 ‘전체 소위원회’를 만들어 다시 텐트 농성 투쟁을 이끌었다.” 진정으로 이들이야말로 현장 조합원들에게 살아 있는 투쟁적인 지도부였다.
회사측한테 이들은 눈엣가시였다. 회사는 6월 18일에는 조립 사거리에 있던 텐트 농성장에 용역 깡패를 동원해 강제 철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농성중이던 조합원들을 강제로 폭행하고도 사과 한 마디 없고 치료비조차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회사의 반격에 다소 주눅이 들어 있던 조합원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이번에는 조합원들을 채찍질했다.
6월 31일부터 7월 3일 사이에 있었던 임단협 쟁의행위 찬반 투표에서 회사측의 온갖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은 81퍼센트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했다.
노조 지도부는 세 번 정도의 두 시간 파업을 조직하는 선에서 파업 수준을 통제했다. 그랬어도 참가 인원은 3천여 명을 웃돌았다.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 조합원들이 투쟁하자 회사측은 임단협 협상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조는 대우차 처리의 전제 조건으로서 고용관련 특별요구안을 요구했다. “회사는 조합원의 고용을 최소한 향후 5년 동안 유지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그러나 임단협 교섭은 스무 차례를 넘기면서도 뾰족한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7월 말 노조와 회사의 타협안이 나왔다. 이 안은 잠정합의안 찬반 투표에서 41.95퍼센트 찬성으로 과반수를 못 넘겨 부결됐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해고자 복직 문제가 단 한마디도 거론되지 않았고, 5년 동안 정리해고는 안 하되 인원재배치(창원이나 군산으로 직장을 옮길 수도 있는)를 요구하는 잠정합의안을 조합원들이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특히 파업 무급 근태 코드도 그대로였다. 16대 노조 집행부가 회사측의 반격에 적극적인 방어 태세를 충분히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조합원들이 경고 사인을 보낸 것이다. 더구나 인원재배치는 조합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인원재배치는 정리해고의 수순이라는 것을 조합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잠정합의안 부결은 조합원들이 얼마나 고용안정을 열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랬다면 16대 집행부와 중앙투쟁위원회는 조합원들의 의사를 반영해 회사측에 더 나은 안을 요구하고 투쟁을 조직했어야 했다. 그러나 집행부는 잠정합의안이 부결된 후 회사측에 압력을 넣을 만한 투쟁을 조직하기는커녕 별다른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결국 기본급 3천 원 인상이라는 점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는 선의 재타협안이 제출됐다. 이번에는 1차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조합원들이 가결에 찬성표를 던졌다. 조합원들은 더 이상 추영호 집행부에게 뭔가를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물론 고용안정협정서는 대우차 노동자들에게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채권단은 이 협정서를 휴지조각으로 만들기 위해 벼르고 벼를 수밖에 없었다. 고용안정협정서는 해외매각의 최대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포드의 대우차 인수 포기
그러던 중 9월 15일 포드가 갑작스럽게 대우차 인수를 포기했다. 포드의 대우 인수 포기는 대우차 경영진들뿐 아니라 정부와 채권단에게도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언론에 발표된 ‘포드의 타이어 리콜’ 문제는 인수 포기의 핵심 이유가 아니었다. 포드가 대우차 대우차를 포기한 핵심 이유는 대우차 부실 규모 때문이었다. “대우차의 해외법인 부실 문제 때문이었다. 포드는 해외법인의 부채를 정확히 몰랐던 것이다.”(〈퍼슨웹〉과의 인터뷰에서, 최종학 대우차 노조 대변인)
포드의 대우차 인수 포기와 함께 마침 한보철강 매각 좌절, 주가 폭락, 유가 이상 등 한국경제가 갑자기 꽁꽁 얼어붙고 있다는 징후들이 언론을 도배하고 있었다.
당황한 정부 관료들 내에서 포드의 인수 포기 책임을 둘러싸고 여러 공방들이 오고 갔다. 대우차 인수 포기 사실이 알려지고 한 달도 안돼 GM-피아트 컨소시엄은 대우차 인수를 위한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GM으로의 매각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정부와 채권단과 회사측은 본격적으로 노동자들의 생계를 죄어 오기 시작했다. 임금 체불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채권단은 밥 먹듯 노동자들의 임금을 체불했다. 5월에도 임금이 체불된 바 있었는데 8월부터는 임금이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반면, 포드로의 매각 실패의 책임을 지겠다고 했던 대우그룹 구조조정 협의회 의장인 오호근은 월 5천만 원을 꼬박꼬박 받아 갔다.
대우차 노동자들은 가동률이 낮아져서 지난 3년 동안 이전의 70퍼센트 정도의 임금만을 받아 왔다. 1998년에 일자리를 위해 임금을 삭감하기로 양보하는 바람에 월급 봉투는 이미 얇아져 있었다. 그래서 “3년 동안 1백만 원을 넘는 월급을 받은 경우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민주노동당 서대문·은평·마포 지부의 소식지) 60만원∼70만원 정도에 4인 가구가 의지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임금 체불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했다.
한편 포드가 인수를 포기하자 해외매각 반대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마침 해외매각 반대와 공기업화를 분명히 내건 김일섭 후보가 노조위원장 선거에 당선됐다. 가장 전투적이 활동가들이 많이 속해 있다고 알려진 민주노동자회 출신인 김일섭 후보의 당선은 조합원들에게 여전히 싸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음을 뜻했다. 물론 조합원들의 사기와 자신감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우차 조합원들으 자신들의 생활고와 지긋지긋하고 고역 같은 고용불안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투쟁적인 지도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회사측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고 노동자들이 가장 절박하게 느끼고 있을 체불임금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면서 대중 행동을 벌였어야만 했다. 긴박한 사태 속에서 노조가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그것밖에 없었다.
한편, 10월 17일 김일섭 집행부가 들어선 뒤에도 회사측은 임금 체불 해결을 위한 긴급 노사협의회를 계속 유보했다. 뭐가 회사에 타격을 줄 만한 행동이 아니고서는 회사는 계속 모르쇠 하며 시간만 끌 것이 분명했다.
그러던 중 10월 31일 회사는 3500명 인원 감축이라는 자구 계획안을 발표했다. 마침 계속 유보되던 노사협의회가 열렸고 김일섭 집행부는 체불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러 협의회 장소로 갔다. 그러나 그 자리에 회사가 얼굴을 내민 것은 자구계획안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동상이몽이었던 것이다.
노조동의서 정국
11월 4일 산업은행 총재 엄낙용은 자구계획안에 대한 노조 동의가 없으면 부도가 난다고 발표했다. 정부와 채권단은 부도의 모든 책임이 노조에게 있는 양 노동조합에게 구조조정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악랄한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채권단이 목을 매고 있는 자구 계획의 총규모가 9천억 원 규모이고 공적자금 11조 9천억 원이 투입된 대우차가 고작 1천억 원 규모의 인원 감축이 되지 않아 부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노조 동의서 정국이었다. 감원 동의서가 애초에 부도를 막을 수 없었음이 분명한데도 정부와 채권단은 감원 동의서를 제출하라고 노조를 협박하면서 부도 처리를 여섯 번이나 유예시켰다.
정부는 마치 노조가 동의서를 제출하지 않아서 대우차가 부도에 직면했고 협력업체들이 부도 위기에 빠진 것처럼 몰아갔다. 〈조선일보〉는 우익 신문답게 대우차 노조의 전투적 조합주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비난 공세를 퍼부었다. 융단폭격과 파상공세였다. 하지만 채권단·정부·회사측과 노조가 감원 동의서로 서로 줄다리를 하는 동안 산업은행은 이미 “노조가 동의서를 써 온다 해도 자금 지원을 해 줄 수 없다”고 못박은 상태였다.
김일섭 노조위원장은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노조위원장에 선출된 지 한 달도 안 된 상태에서 너무 버거운 짐”을 지었다고 토로했다. 맞는 얘기였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됐던 이 ‘짐’을 덜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정부·채권단·회사에 대한 가차 없는 반격이었다.
약 20일 동안 김일섭 집행부는 노조동의서 정국을 힘겹게 버텼다. 김우중은 세계 곳곳에서 부유한 여가 생활을 누리는데 왜 노동자들이 부도의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그의 주장은 백번 옳았다.
그러나 ‘도대체 그렇다면 대안이 뭐냐’는 질책성 질문이 김일섭 집행부 앞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해외매각이 아니라 공기업화가 대안이라는 주장을 솜씨 있게 펴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했다. 첨예한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분명한 대안이야말로 승리를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조 지도자들의 대응은 불필요하게 수세적이었다. 어느새 공기업화 요구와 주장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11월 12일에 열린 노동자 대회에서 연설한 많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입에서 대우 문제가 거론되기는 했지만 공기업화의 ‘ㄱ’자도 거론되지 않았다. 공기업화를 주장하면 더욱 집중 포화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적 시각으로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매몰차게 대응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공기업화가 거론되더라도 ‘한시적’이라는 표현이 따라다녔다. 한시적 공기업화는 해외매각을 하더라도 일단 공장을 정상화시켜 놓고 봐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공장 정상화’라는 요구가 공기업화를 대체하고 있었다. 공장 정상화는 누구나 다 바라는 일이었다. 한나라당측 인사들로 구성된 대우차 국민기업 추진위도, 채권단도 공장 정상화를 원할 것이다.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요구를 내세우는 것은 입지 축소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공기업화를 비현실적인 요구라고 여기는 그 순간 노조가 밀릴 위험이 있었다.
집행부 내에서 뭔가 동요하기 시작하는 분위기가 엿보였다. SHH 동의서를 썼다는 연합뉴스의 몇 번의 보도는 오보라는 항의를 받기는 했지만 적어도 김일섭 노조위원장이 오해의 여지를 줄 만한 정황을 연출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협력업체 사장들이 노조 사무실로 ‘제발 살려 달라’는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부담을 엄청나게 느꼈다”고 김일섭 위원장은 나중에 토로했다.
사무노위는 너무 명분에만 집착하지 말라는 주장을 폈다. 사무노위는 회사가 정리해고 하겠다고 발표하자 희망퇴직을 하자고 노조에 제안했다. 사무노위는 퇴직자 인력뱅크 법인을 설립하자는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종종 사무노위는 대우차 회사측이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 때마다 은근히 회사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입장을 펴곤 했다.
물론 사무노위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김우중이 ‘생산직과 사무직 사이를 분열시키는 노무 관리’를 해 왔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다. 김우중은 특히 ‘운동권 출신’을 노무 관리나 사무직에 대거 채용한 바 있는데 사무노위에는 그 때 채용된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사무노위가 대우차 노조에 편입되기를 원했을 때 노조 편입을 거부한 추영호 집행부측의 잘못도 지적돼야 할 것이다)
실제로 대우는 운동권 출신자들을 1994년 11월부터 특채하여, 1996년 9월 현재 대우에서 일하고 있는 ‘운동권 출신 직원’은 1백30명에 이른다. 대우는 특채한 그 사람들을 해외 연수 보냈는데 연수 후에 한 ‘운동권 출신 직원’은 한 월간지에 ‘재벌 옹호론’을 피력하고 나서기도 했다. 대우측은 운동권 출신자 집단 채용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일부 노조원들은 이론적으로도 잘 무장돼 있어요. 우리 노무 담당 직원들이 딸려요. 그래서 노동운동한 학생들 30여 명을 채용해서 노무 관리를 맡겼습니다.”(‘존경받는 기업인’은 가능한가?, 〈인물과 사상〉 2호, 개마고원)
많은 노동자들도 대우차 회사측이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력하게 펴는 원인 가운데 한 가지로 김우중의 운동권 출신 대거 채용을 들었다. “대우의 기획조정실에 운동권 출신이 가장 많고 전 노무 담당 이사도 그런 사람이었지요. 주간으로 나오는 그룹측 사보도 운동권 출신인 사람이 만드는 방식으로 공세를 폅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작년 해외매각 불가피론을 설파한 장본인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강력하게 동의서 제출을 거부해야 한다는 압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조합원들은 몇 달째 계속되는 체불임금, 자신들이 회사에 계속 끌려 다니는 상황, 생활고와 스트레스 등으로 지쳐 있었다.
많은 조합원들은 공장이 가동되지 않는 바람에 생계 유지를 위해 영종도 공항과 월곶 아파트 건설 현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4층에서 질통을 매고 떨어진 조합원의 소식, 연수동에 사는 한 조합원 부인이 투신 자살했다는 얘기, 분유값도 없다는 얘기….
조합원이 많이 사는 태산 아파트 앞의 투다리라는 술집에서는 피처 3천cc 컵에 소주 다섯 병을 붓고 난 후 맥주를 채워서 마시는 게 유행할 정도였다. 술을 안 먹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대우차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41세였다. 자녀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버지들이 특히 많다. 한 조합원은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게 너무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내가 이 회사를 위해 얼마나 희생을 했는데 그냥 나가라는 거냐”는 분노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노동자들의 가슴을 엄습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월 말∼4월 초 투쟁 당시 휴무 조치로 어느 정도 재미를 본 회사측은 두 주일 동안의 휴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이 노조 동의서 제출의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사태를 그저 좇고 추수하기 위해서 투쟁 지도부가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때일수록 대중 투쟁에 대한 확신을 주고 지친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북돋우고 그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려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노조동의서를 왜 쓰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득하고 회사한테 양보하면 회사가 더 큰 양보를 요구해 올 것이라는 점을 미리 경계하도록 하고, 공기업화가 왜 유일한 대안인지를 설득하는 게 가장 필요했다.
그러나 대우차 노조 지도부를 포함해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노조 지도자들은 대중적인 파업 투쟁을 선전·선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고무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연맹 지도자들과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정부·채권단·회사측이 노조동의서 협박을 비난하기는 했지만 노조동의서 제출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노조 지도부는 여섯 차례에 걸친 노사협의회에서의 합의가 실패하자 뒤늦게나마 대의원 대회에서 쟁의발생을 결의했다. 그 때라도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열린다면 상황은 어쩌면 반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1월 27일 오전 10시에는 부평 공장 구식당에서 조합원 공청회가 열렸다. 약 1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모였다. 자리가 모자가 벽 둘레에 조합원들이 겹겹이 서 있을 정도였다. 조합원들은 공청회에 참가하지 말라는 회사측의 경고성 전화를 무시하고 달려 왔다. 많은 노동자들은 집행부의 입장과 앞으로의 지침 등이 궁금해서 왔노라고 말했다.
오전 집회 내내 김일섭 위원장은 “동의서를 제출하라는 협박이 많았지만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를 잘 따를 수 있겠느냐”고 여러 차례 다짐을 받기도 했다. 뭔가 굳은 결의를 확인하는 자리인 듯했다. 구식당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그 때만 해도 김일섭 위원장이 노조동의서를 제출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점심 시간이 끝난 뒤 동의서 제출 건이 대의원대회의 안건으로 상정됐다는 얘기가 사람들 입에서 들려 왔다. 공청회가 끝나고 집에 가지 않은 조합원들이나 소위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대의원대회에서 동의서 제출은 그만 통과되고 말았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말이다. 노조동의서 제출은 전투적인 노조 활동가들에게 충격이었고 조합원들의 사기를 다시 떨어뜨리는 노릇을 했다.
대우차 노조 지도부가 노조동의서를 제출한 직후 김대중 정부는 은행 노동자들에게도 동의서 제출을 강요했다. 금감위는 각 은행 노조 지부들한테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대신 1인당 목표 생산성을 달성하겠다는 동의서를 제출하라고 닥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조 동의서 제출이 전체 노동자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도 김일섭 위원장은 노조동의서 합의가 인원 감축 합의가 아니라고 말했다. “노조동의서 제출은 공장 정상화를 위해 논의를 하겠다는 합의의 정신이었을 뿐 인원 감축 합의가 아니었다”는 식의 회피성 변명은 군색하기 그지 없었다.
전투적인 노조 활동가들은 동의서 제출을 비난했다. 그러나 공개적인 비난은 아니었다. 또, 주로 동의서 제출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동의서 제출 방식을 문제 삼는 식이었다. ‘왜 아침에는 그렇게 해 놓고 아무런 상의도 없이 동의서에 사인했냐’는 식이었다. 물론 옳은 지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왜 우리가 부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의서에 합의해야 하느냐’ 하며 김일섭 집행부는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는 주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것은 전투적인 조합원들의 사기를 다시 북돋아 새로운, 진정한 지도부를 건설하는 발판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대기업 노조와 노조 간부
김일섭 집행부의 동의서 제출을 추인한 대의원들도 굴복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많은 노조 활동가들은 대공장 노조의 대의원들 가운데 일부가 친회사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일명 ‘회사측 대의원’이라는 표현을 노동자들한테서 쉽게 들을 수 있다.
많은 현장 조합원들과 소위원들한테서 ‘회사측 대의원’에 대한 일종의 증오심 같은 정서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 대의원들은 걸핏하면 현장에서 빠져 나가 소위 시간외 근무를 하다 오는데 많은 경우 놀다 오는 거다”, “말만 앞세우고 정작 파업할라치면 슬쩍 빠젼간다”. 상당수 대의원들이 현장의 불결함이나 힘든 노동 과정에서 나름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1백여 명의 대의원 가운데 절반 정도가 여기에 해당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퍼져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전체 소위원회의에 속한 소위원들은 대부분 정리해고 통보서를 받은 반면, 정리해고 통보서를 받은 대의원들은 전체 대의원 가운데 30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현 대우차 노조 집행부는 이것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계략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사실은 투쟁의 발목을 잡아 온 상당수 대의원들에 대한 회사의 ‘예우’라고 봐야 정확하다.
실제로 대우차 노조의 대의원대회나 간부합동회의는 현장 조합원들의 사기를 북돋고 끌어 올리기 보다는 현실의 “불가피성”을 강변하고 때때로 투쟁의 발목을 잡는 노릇을 해왔다. 투쟁 방향과 계획이 논의되는 바로 그 곳이 사태를 더 꼬이게 만들고 조합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투쟁 회피를 정당화하는 곳이 돼 왔다. 물론 전투적인 현장 활동가 역할을 해 온 대의원들도 있다. 그러나 전투적인 현장 조합원이나 소위원들이 중심이 돼 조직적인 대안적 세력으로 떠오르지 않는 한 그들의 전투적인 목소리는 종종 묻히고 말았다.
그 동안 회사측이 대의원들 가운데 일부를 적절하게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소문이다. 심지어 회장 이종대가 조 간부와의 협상장에서 “어제 너무 대의원들과 술을 진창 마셨더니…”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얘기에 대해 조합원들이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늘상 있어온 일이라는 반응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해 준다.
어쩌면 이것이 단지 대우차 노조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의원들을 포함한 노조 간부들이 회사측과 조합원들의 통제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돼 있다는 사실은 특히 대기업 노조에서 더 두드러진 현상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대우차 노조가 특히 더 심하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지적도 있다.
김우중식 노조 간부 통제
소위 ‘회사측’ 대의원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김우중식 노무 관리의 뿌리를 들춰 내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김우중식 경영은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에 김을 뺌으로써 투쟁을 무마하는 역할을 하는 간부들에 대해서 ‘포용력’을 행사해 왔다.
김우중은 노조 지도부가 “말이 통하는” 집행부로 교체되면 신임 간부들을 힐튼 호텔로 불러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들려 주기도 하고, 노조 간부들이 구속되면 찾아가 봐야 하는데 못 가니 돼지고기라도 사다주라며 수표 1천만 원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것은 노조 간부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한 집요한 작전의 일부였다. 한 대우 노동자는 1992년 월간 〈길〉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김우중은) 무노동 무임금의 도입, 민사상 손해보상소송 등을 처음으로 이 땅에 들여왔지요. 헬기를 타고 다니며 쟁의로 구속된 노동자들을 면회하러 다니지만 집요한 자신의 논리를 펴기 위한 것입니다. 반성문을 쓰라고 강권하는 거지요. 자기 논리가 먹히면 상당한 급부를 주고 자기 사람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냉혈적인 자본가의 모습입니다.”
물론 현장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통제와 감독을 해대며 옥죄어 왔다.
“사람들이 견디지 못해 현장을 떠나고 있습니다. 15분마다 30분마다 작업량을 체크하고 작업장마다 벽에는 조퇴, 지각, 결근, 월차 사용자 현황표를 붙여 놓고 집단 채점하여 7천 원에서 3만 5천 원까지 수당을 조별로 자동 지급합니다. 조합원에 대한 모든 정보가 기록된 개인별 실적 평가서와 매주 개인별 평가표는 개인별로 부여된 코드에 따라 컴퓨터에 모두 입력돼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해 1991년 24퍼센트, 1992년 20퍼센트의 생산성 향상 기록을 세웠습니다.”
김우중은 대우조선에서 용접 때 나오는 가스가 무해하다고 교육하고, 정문에서 몸수색을 해서 매직, 줄자, 하다못해 헌 장갑이라도 나오면 물품 절도로 해고시켰다. 대우가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기업들에 비해 오히려 더 철저하고 치밀한 노동통제를 구사”하는 바람에 “노동자의 입장에서 활동하기가 정말 어려운 그룹”이라는 탄식이 줄을 이었다.
한 동안 현대의 노무 관리는 ‘무식한’ 반면 대우의 노무 관리는 ‘세련되고 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김우중의 소위 ‘세련되고 합리적인 노무 관리’가 뜻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투적이고 헌신적인 활동가들과 조합원들을 분리시키기, 노동자들을 이간질시키기, 뒤통수치기, 철저하게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이런 야비한 방식에 대해서는 1991년 대우 노사관계가 첨예한 갈등 국면에 있었을 당시 〈말〉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우 그룹의 노조 전략이 탄압보다는 개량적이고 온건한 편이었다는 평가는 사실 김우중 회장 한 사람의 이미지로 인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쟁의가 발생하면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나 노조 간부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는 재벌. 수많은 조합원들 앞에서 눈물로 자제할 것을 호소하는 재벌. 연행·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해 정부 당국에 선처해 줄 것은 간곡히 애원하는 재벌…. 이런 것들이 지금까지 김우중 회장의 이미지였다. … 그러나 조금만 더 살펴보면 이러한 눈물 어린 호소 뒤엔 늘 탄압의 채찍이 있어 왔다.”
실제로 김우중은 1987년 대우차 노동자 투쟁에서 마이크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타협을 호소했다. 그리고 다음 날 협상을 마무리 짓자고 해서 노동자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협상이 끝나고 김우중이 간 곳은 경찰서였다. 그는 일부 간부가 감금돼 있고 노동자들이 기물 파괴 등 난동을 부리고 있으며 대화 진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야밤에 습격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결국 새벽 4시에 경찰이 농성장을 덮쳐 2백여 명을 연행해 그 가운데 80여 명을 구속했다. 마치 추영호 집행부와 텐트 철거를 협상해 놓고 새벽에 기습적으로 경찰력을 투입한 것처럼.
19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가 경찰이 쏜 직격탄에 맞아 숨졌을 때 김우중은 뻔뻔스럽게도 열사의 분향소에 찾아와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구사대인 상록회를 만들었다. 이 상록회에 항의해 1989년 두 명의 대우조선 노동자가 분신했다. 그러나 김우중은 더 이상 분향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감추어진 독점 재벌의 역사〉, 돌베개, 121쪽)
문제는 이런 김우중식 노무 관리에 상당수 노동조합 간부들이 어느 정도 타협해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김우중식의 야비한 분열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특히 군산이나 창원 공장의 경우에 회사 측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철저하게 분열시켰다. 예를 들어, 군산 공장은 회사 측의 자구안에 맞춰 지난달 중순 외주업체 직원(용역)과 중국에서 온 이주 노동자, 직업 훈련생 등 1145명을 감원했고 노조원은 단 한명도 감원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군산과 창원 지부 지도자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정규직인 비노조원들을 정리해고하는 대신 노조원들은 정리해고하지 말라는 식으로 회사 측과 협상을 해 왔다. 노조가 임금 삭감을 감수해 가면서 일자리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방패막이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공장의 비정규직 동료에게 연대를 하지 않는 노조 간부들이 다른 공장의 동료들을 위해 전면적으로 싸우지 못할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부평 공장에 경찰력이 투입된 뒤에도 군산과 창원에서 항의 파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1월 24일 부평에서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파업에 돌입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자 군산과 창원 공장 소속의 일부 대의원들은 “부평 파업은 의미가 없으며 군산, 창원의 파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 의견을 줄기차게 펴서 파업 방침을 철회시킨 바 있었다.
경영혁신위원회
처음에 노조동의서 제출 불가 입장을 표명했던 시점에서 김일섭 집행부는 명실상부한 한국 노동자 운동의 ‘전위’였다. 그러나 노조동이서 제출 뒤 대우차 노조 지도부의 처지는 꾀죄죄함 그 자체였다.
대우차 노조 지도부가 노조동의서를 제출한 뒤 체불임금은 겨우 12월 7일에 딱 한 달치가 나왔을 뿐이다. 김일섭 노조위원장은 경영혁신위원회 회의를 노조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회사가 주도한 경영혁신위원회는 당연하게도 주로 인력 감축에 초점이 맞춰졌다.
회사 측은 12월 16일에 5,347명에 대한 인력감축안을 내놓았다. 부평공장을 폐쇄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엄청난 규모의 감원은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김일섭 집행부의 말처럼 합의서 파기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대응은 이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합의서의 목적 자체가 인원 감축이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미 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조 지도부는 경영혁신위원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무려 12차례나 경영혁신위 회의에 참가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회사에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된다는 압력을 느꼈던지 노조 지도부는 12월 20일 나름의 경영혁신안을 제시했다. 노조 지도부의 안은 자동차 생산 대수를 줄이기보다는 늘리는 방식의 독자 생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안에는 조합원들이 퇴직금 등의 일부를 경영기금으로 내놓을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투자 재원 유치는 임금 퇴직금의 출자 전환, 부품업체 컨소시엄 출자 전환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체불임금이 쌓여 있는데 노동자들이 경영 기금을 내라는 것은 정말이지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노조 안이 고용 유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냐?”는 〈한겨레〉 기자의 질문에 한 노동조합 간부는 “인력 감축을 하지 않고 버티겠다는 것은 아니다”며 수세적으로 답하기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한겨레〉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더욱 수세적이었다. “1월 말~2월 초가 어려운 상황이나, 찬반 투표 이후 준비를 마치고 회사 쪽과 성실한 협상을 할 것이다. 노조는 모든 수순을 밟겠다. 그러나 회사 쪽이 경영혁신 합의 정신을 일방적으로 위배했다고 판단할 경우 행동을 감행하겠다”
노조 지도부는 더 이상 밀릴 곳이 없었다. 더 이상 양보할 것도 없었다. 너무 많이 밀렸고 너무 많이 양보했다. 노조 지도부가 ‘우리는 회사를 위해 이만큼 양보할 태세가 돼 있으니 회사도 양보하라’는 식으로 양보할수록 기세가 오른 회사 측은 더욱 가차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회사 측은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아예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사기가 오를 리 만무했다. 대우차 노조 홈페이지에서 분노와 낙담이 교차하는 조합원들의 목소리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회사 측은 뻔뻔스럽게도 스스로 자진해서 나간다는 이름의 “의원퇴직”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고 희망퇴직을 속속들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막 승부수
더 밀릴 곳이 없었던 노조 지도부는 마침내 파업을 선언했다. 1월 10일부터 파업 찬반 투표가 예고돼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투표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일부러 휴가를 내도록 강요하고 직장·조장들을 동원해서 투표에 참가하지 말라고 종용했다. 회사는 직·조장들한테 조합원들의 투표 용지를 직접 거둬 제출하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가 노조 집행부에 보고된 것만 해도 30여건이나 됐다. 기술연구소 조합원들의 투표를 막기 위해 1백여 명에게 집단 월차를 강요했다.
그러는 바람에 투표율이 50퍼센트를 밑도는 참혹한 결과가 빚어졌다. 12일에는 투표율이 상당히 올라갔다. 그러나 대의원들이 선거구별로 직접 투표를 강행하자 다시 직·조장들을 동원해 투표를 거부하라고 협박했다.
다행스럽게도 파업 찬반 투표는 53.5% 찬성으로 파업이 가결됐다. 회사 측의 투표 방해가 낮은 파업 찬성률을 설명하는 주된 이유이기는 했지만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종종 조합원들은 조합 지도부가 충분히 미덥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뛰어넘을 자신감은 없을 때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기 쉽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파업 찬반 투표가 끝나자마자 회사 측은 생산직 2,794명을 정리해고 시키겠다는 계획서를 노동부에 제출했다.
정리해고 명수까지 발표되고, 회사 측은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태세이고, 조합원들의 사기는 떨어져 있고, 뾰족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 상황….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간부합동회의(집행부와 전직위원장들 그리고 대의원)는 어떻게 해서라도 조합원들을 북돋울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고 대량 해고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수단인 점거 파업을 실제로 준비하는 자리가 됐어야 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간부합동회의에서는 심지어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진정한 투쟁 방법 등을 둘러싼 생산적 논쟁이 아니었다. 책임 떠넘기기에 불과했다. 현장 써클의 이해 관계를 배경으로 했다는 이 난투극은 대우차 노조 간부들이 얼마나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주는 우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2월 16일이라는 정리해고 날짜까지 발표되자 이제 노조는 정말이지 뭐라도 해야 했다. 2월 1일부터 대우차 노조는 파상 파업을 시작했다. 정리해고 날짜는 자꾸만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투쟁이 시작될라치면 휴무를 때려 짭짤한 재미를 본 회사 측은 아예 3월 6일까지 휴업 공고를 내렸다. 그리고 출근 투쟁에 참가하는 조합원은 정리해고 1순위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휴업 조치가 내려진 2월 12일부터 시작된 출근 투쟁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조금씩 참가 인원이 늘기 시작하는 조짐은 있었다. 80여 명 규모는 다음날 150명, 200명, 500명, 700명 식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정비지부 노동자들은 천군만마의 역할을 했다. 사실, 정비 지부 노동자들은 이미 정리해고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쌍용차는 쌍용차로 전출된 836명의 노동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 터였다. 이들 가운데 2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부평 공장의 농성에 처음부터 참가했다.
점거 파업은 고려 대상이었을 뿐
파업 농성이 공장 점거로 이어지냐 아니냐가 핵심 관건이었다. 정부와 채권단과 회사를 굴복시킬 유일한 수단은 공장을 점거하는 것뿐이었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사측과 비길 수 있었던 비결도 거기에 있었고 대공황기였던 1936년에 GM의 플린트 공장 노동자들이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대중적인 공장 점거 덕분이었다.
그러나 공장 점거는 애초에 대우차 노조 간부들에게 하나의 ‘고려대상’이었을 뿐 유일하게 효과적인 전술로 여겨지지 않았다. 대우차 노조 지도부는 농성 규모가 일정 규모로 늘어나면 그 때 가서 점거파업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수백 명의 인원으로 공장을 점거하기란 역부족이다. 그러나 실제로 점거 파업을 하려 했다면 점거 파업을 이해 어떤 실질적인 준비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미리 토론하고 조직해 두었을 것이다.
“한번 손상될 경우 복구에 수개월이 걸려 (회사의) 우려가 컸던 도장 공장, 엔진 공장, 전산소·연구소” 같은 공장의 핵심 시설은 농성 기간 내내 아주 ‘안전’했다. 핵심 시설만이라도 노동자들이 장악하려 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정부·채권단·회사 측 모두가 파업 농성을 지켜보며 유일하게 ‘걱정’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아예 회사 측은 도장부 출입구를 용접해 버렸고 컨테이너를 밖으로 빼내 갔다. 다행히도 정비 지부 노동자들이 컨테이너 일부를 다시 공장 안으로 가져오긴 했다. 그러나 위의 사실은 대우차 노조 지도부가 점거에 대한 어떤 대비도 진지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정말이지 노조 집행부는 소심했다.
“바리케이드 구축용으로 쓰인 부품 수만 점도 대부분 온전했다”. 바리케이드조차 허술했던 것이다. 반면, 1998년 현대차 노동자들은 승용차 에쿠스를 겹겹이 쌓아 경찰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꼼꼼하게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아예 연합뉴스가 “이같이 큰 손실 없이 농성 사태가 마무리된 데에는 경찰이 조기 사태 진압, 도장 공장 등에 대한 사측의 자체 방어조 투입 등과 더불어 노조의 자체 질서 확립 노력도 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각 라인을 통제하는 전산망인 중앙통제실(CCR)이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회사는 다행스러워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1936년 GM의 플린트 공장 노동자들은 당시 GM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4공장(셰브롤레를 만드는)을 점거해서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회사가 음식물 반입을 막고 출입문을 폐쇄하고 난방 장치를 꺼 버리자 공장으로 다른 노동자들이 연대를 하러 왔다. 연대를 막으려는 경찰에 맞서 작업장 안의 사람들은 볼트와 너트를 던지고 소방 호수로 물을 뿌려 경찰을 내쫓았다. 노동자들은 그 전부터 파업위원회를 세워 날마다 대중 집회를 통해 어떻게 싸울지를 결정했다.
공동투쟁본부의 문제점
노조 지도자들은 김우중 체포 결사조의 ‘여론전’에 훨씬 열의를 보였다. 물론 대우차 부실의 책임자인 김우중 문제를 폭로하고 쟁점화 시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특히 2월 9일 대우차 공투본 소속의 체포결사대와 청년진보당 당원들의 김우중 사택 점거는 연행을 무릅쓴 전투적이고도 용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체포 결사대의 사택 점거가 아무리 전투적인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대중 투쟁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계를 결정할 정리해고 통보 날짜가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을 막아낼 수 있는 동력은 공자 점거 여부에 달려 있었다. 공동투쟁본부(이하 공투본)의 김우중 체포 결사대 활동은 한마디로 본말이 전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김우중 체포조가 한 활동도 김우중에 대한 비난 여론을 국제적으로 넓히는 데 긍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우중 체포조의 ‘여론전’과 공장 점거 파업을 대립시킬 필요는 없지 않냐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문제는 공투본이 공장 점거의 필요성을 사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투본은 공장 점거를 단 한번도 공개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공투본은 공기업화라는 대안에 대해서도 사실상 침묵했다. 공투본 내에는 ‘공기업화는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대안’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더구나 공투본은 노조 지도자들의 노조 동의서 제출을 비판하지 않았다. 모두 노조 동의서 제출을 이해한다는 식이었고 심지어 두둔하기까지 했다. 11월 29일 청년진보당 기관지 〈청년 좌파〉에서 인천노동자운동연대의 성명서를 인용하면서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이기를 바란다”(〈청년 좌파〉 11월 29일치)고 말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비 문서”라는 별명이 붙었던 노조 동의서 제출을 이보 전진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간 노동자의 힘 준비호〉는 “노조위원장의 지도력? 돌파력? 배포? 이런 것이 일차적인 책임 소재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곽탁성 정책위원장)고 말했다. 물론 노조 지도부의 굴복은 김일섭 집행부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연맹이나 민주노총 상급 단체의 지도자들의 묵인·방조에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일섭 위원장의 잘못을 비판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앞서 지적했듯이 동의서 제출을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당시 현장 활동가들의 기운을 북돋고 투쟁 의지를 곧추세울 수 있게 할 계기였다.
희망퇴직안 제시
회사 측이 정리해고를 통보하겠다고 밝힌 2월 16일 오전 김일섭 노조 위원장은 출근 투쟁에 나온 조합원들에게 “단 한 사람의 정리해고도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김일섭 노조 위원장은 자신을 따라 정리해고 철폐 투쟁에 끝까지 가겠다고 거듭 다짐을 받아 놓고서 갑자기 회사가 요구한 협상 자리에서 희망퇴직안을 제시했다. 교섭 대표들은 “희망퇴직 위로금을 회사와 노조가 5대 5이 비율로 지급하자는 협상안”을 내놓은 것이다. 말과 행동이 180도 달라지는 사람을-그것도 몇 차례씩이나-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마지막 협상 직후 간부합동회이 자리에서 위원장을 비판한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의 한 조합원의 발언은 현재 조합원의 심정을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이었다. “순환휴직제(무급휴직)라는 대안도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희망퇴직안을 내놓을 수 있는가”, “아침에는 단 한 사람의 정리해고도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이렇게 하지 않겠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열성적인 조합원과 소위원도 여기(간부합동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핵심을 찌른 이 말에 대해 김일섭 위원장은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박수를 치는 대의원들도 없었다. 몇 분간의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고 누군가가 해복투 위원장의 팔짱을 끼며 그를 자제시키는 모습이 오갔을 뿐이다. 희망퇴직안을 제시했다 회사한테서 퇴짜를 맞은 바람에 교섭 대표들의 체면은 완전히 구겨졌다. 16일 저녁 마무리 집회 때 김일섭 위원장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희망퇴직안 제시는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원래 나는 그 안에 반대했다. 더 이상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일섭 위원장은 경찰력 투입 후 산곡성당에서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망신만 당했던 희망퇴직안을 다시 회사가 고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어쨌든 노조 지도부의 마지막 협상은 지도부에 대한 신뢰를 완전하게 떨어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마지막 협상안 제시는 정리해고 통보서가 조합원 가정에 발송이 뒤에도 농성 참가자 숫자가 크게 늘지는 않았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경찰의 공장 점령
그럼에도 정리해고 통보서가 노동자들의 가정에 우송된 2월 19일부터 새롭게 농성에 참가하기 시작한 조합원들이 생겨났다.
연대의 움직임들도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소하리·화성 공장의 기아차 노동자들 가운데 약 1백여 명이 농성에 참여했다. 현대차 노조는 조합원들을 상대로 1인당 1천 원씩 대우차 노조의 파업 지원 성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고 정리해고 반대 파업 홍보를 위한 대자보와 현수막 등 필요 물품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현대차 정공 본부 소속 노동자 1백여 명은 부평 공장을 방문했다. (〈매일노동뉴스〉 2월 20일치)
한편, 경찰은 농성에 연대하러 온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부평 공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공장 주변을 에워쌌다. 경찰 병력이 증강되고 있었다. 아예 경찰은 부평구청역 입구까지 막았다.
경찰은 19일 아침에 “경찰력 투입은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그들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바로 그 날 노동자들의 마지막 투쟁 수단이었던 공장을 점령하고야 말았다.
부평 공장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 나왔을 때의 심정은 한마디로 “허탈” 그 자체였다. 많은 노동자들은 심지어 비참함까지 느꼈다고 말했다. 평소에 자신들의 손때가 묻은 공장에서 경찰에 쫓겨 나온 것이 너무 기가 막혀 분하여 처참한 심정을 가누지 못했다.
2월 20일에 전국의 정비 지부 노동자들을 데리고 부평 공장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정비 노동자들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허탈감과 분노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고 말했다.
경찰력 투입에 항의하는 집회가 부평역에서 계속 예정돼 있었지만 경찰력은 21일부터 부평역을 봉쇄했다. 부평 내에서 노동자와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무조건 연행하라는 지침이 있었을 정도였다.
연대파업 불발
정부와 회사 측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부와 회사 측한테 실질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한 대규모 파업 물결 밖에 없었다. 금속 연맹과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의 연대 파업이 벌어진다면 상황은 반전될 가능성이 있었다.
금속연맹과 민주노총의 노조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파업을 호소하고 조직하는 게 사활적으로 중요했다. 부평 공장 경찰력 투입 장면을 바라보며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노하고 있던 터였다. 20일 부평역 집회로 단숨에 달려온 현대차 노조 가족대책위의 한 아내는 “울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며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월 28일 파업은 54개 사업장 소속 3만여 명의 네 시간 파업에 그쳐 단지 상징적 파업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해고 통지서를 받은 대우차 노동자들은 28일 연대 파업에 거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연대 파업이 네 시간의 상징 파업으로 단명하자 28일 파업에 대한 기대는 곧바로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금속연맹과 민주노총의 노조 지도자들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3월 1일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일부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동원해서 조직한 신촌의 화염병 시위는 연대파업 ‘불발’에 대한 일종의 면피용이었던 셈이다.
애초에 서울역에서 열린 ‘개혁 실종 김대중 정권 규탄 3·1 시국대회’가 끝난 뒤 민주노총과 시민단체들은 명동성당까지 함께 거리 행진을 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약속을 어기고 거리 행진에 불참하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화염병 시위를 ‘고집’했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뇌 함몰 환자, 30 바늘 꿰매야 할 정도의 안면 부상자가 속출했을 정도로 격렬했던 이 날의 전투적인 무력 시위가 연대파업 불발이라는 책임을 가려 주기를 바랐던 듯하다.
교훈을 배우는 용기
김대중은 노동자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어느 때보다도 가차 없었고 단호했으며 신속했다.
김대중 정부는 1750명을 정리해고시킴으로써 해외매각의 사전 준비를 마친 셈이다. 하지만 1750명의 해고가 해외매각이라는 최종 목표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이다. GM이 대우차를 인수하지 않게 되면 김대중의 위험한 도박은 완전한 실패로 끝날 것이다.
IMF 서울사무소장은 “대우차 문제는 한국 경제의 분명한 걸림돌이었다”고 말했지만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는 대우차 부실을 해결해 주는 대안이 결코 될 수 없다. 1750명 노동자들의 인건비는 연간 6백억 원, 월 50억 원에 불과하다. 달마다 발생하는 1천억 원 가량의 영업 손실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최대 규모의 정리해고라는 만행 뒤에도 대우차의 방향은 계속 불투명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한국 경제에 최대의 저주가 될 뿐 아니라 지배자들 내의 날카로운 긴장과 쟁투를 불러 일으키는 촉발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한편 대우차 노조는 쓰디쓴 패배를 맛보았다. 한국 노동자 운동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던 부위가 말이다.
대우차 노조 투쟁의 좌절은 한국 노동자 운동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금속연맹의 대공장 노동자들도 정리해고에 저렇게 무참히 깨지는 데 우리라고 별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다. 계급투쟁은 매우 불균등하게 진행되고 있다. 작년에 조종사 노조 같은 새로운 부문이 승리를 거두고, 은행 노동자들이 커다란 힘을 보여주었다. 한국전력 노동자들은 다시 전력 민영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일 태세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2월 28일 외환은행과의 합병에 반대하며 은행장실 점거 농성에 돌입했다.
중요한 것은 투쟁의 교훈이다. 대우차 노조의 패배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대우차 노조 지도부는 주저하고 동요하고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다. 그 결과 사측의 공세에 대응하지 못하고 기회를 거듭 상실했다.
1985년 대우차 파업으로 대공장 노조 투쟁의 포문을 열었던 바로 그 대우차 노조는 15년이 지난 지금, 경제 위기 시대에 노동조합의 불가피하지 않은 양보가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비극적으로 보여 줬다.
대우차 노조의 투쟁은 노동자 운동이 현장 노동자들의 힘을 충분히 사용하도록 이끌 계급 정치와 그에 바탕을 둔 전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