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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란 혁명에서 배운다:
해방을 쟁취할 아랍 노동자의 잠재력

1979년 이란 노동자들이 악랄한 독재자 샤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좌파가 오류를 범한 탓에 권력이 다른 세력에 넘어가고 말았다. 2011년 시작한 이집트 혁명도 독재자 무바라크 타도 후 진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란 혁명의 교훈은 이집트 혁명과 좌파가 갈 길을 보여 준다. 비브 스미스가 이란 혁명을 살펴본다.

아랍에서 혁명이 일어나 주요 동맹 세력인 이집트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가 쫓겨나자 미국은 지금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집트 혁명을 보며 미국 지배계급은 1979년 이란의 악몽을 떠올린다. 당시 혁명으로 이란 지배자 샤가 타도됐다.

전제 군주 샤는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핵심 파트너 구실을 했다. 샤가 타도되자 미국 제국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 지배자들은 권위주의 정권을 이용해 자국에 이익이 될 정책을 관철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란 혁명은 미국을 겁먹게 했다. 국가 권력이 제아무리 억압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갈아 치울 수 있음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에서 서방의 석유 공급선을 보호했다.

미국의 이란 지배력은 1951년 민중의 지지를 받는 총리 무함마드 모사데크가 이란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이란의 석유 산업을 사실상 지배하던 영국의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오늘날 ‘BP’의 전신)는 모사데크의 석유 산업 국유화에 크게 반발했다.

1953년 CIA와 영국의 정보기관이 공모해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샤를 다시 권좌에 앉혔다. 미국 덕에 권력을 되찾은 샤는 이후 무자비하게 자본주의 발전을 추구했고 사회를 크게 바꿔 놓았다.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로] 종교 기관과 밀접한 전통적 중소기업과, 대규모 공장이 나란히 존재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농촌에서 밀려나 도시 빈민가로 내몰렸다.

미국은 이란을 CIA 중동 사령부의 근거지로 삼고, 2만 4천 명에 이르는 “군사 자문단”을 배치했다.

1970년 중반 경제 불황이 닥치자 노동자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했다. 그럼에도 샤는 무적인 듯 보였다.

샤는 비밀 경찰 사바크를 이용해 노동자와 좌파를 단속했다. 정치수 2만여 명이 투옥되고 고문 당했다. 또한 국가가 통제하는 어용 노조만 허용됐다.

1977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이란을 두고 “세계적 분쟁지인 중동에서 홀로 안정을 누리는 섬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검은 금요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판자촌 주민 약 5만 명이 철거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14년 만에 처음으로 샤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이란 주재 영국 대사는 1978년 이렇게 주장했다. “샤는 여전히 나라와 정부를 완전히 틀어쥐고 있다.”

샤 또한 이렇게 호언했다. “그 누구도 나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나는 70만 군대, 대다수 국민, 노동자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다.”

샤는 틀렸다. 판자촌 주민의 저항을 계기로 사람들은 자신감을 되찾았고, 수십만 명이 대중 시위에 나선 것이다.

샤는 혹독한 탄압으로 맞대응했다. 1978년 9월 8일, 탱크와 무장 헬기를 앞세운 군대가 테헤란 잘레흐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실탄 사격을 가했다. 약 1천6백 명이 살해됐고, 이후 그날은 “검은 금요일”로 불렸다.

그러나 이러한 잔인한 탄압으로도 저항을 막을 수 없었고 노동자들도 차츰 파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1978년 봄, 테헤란의 아즈마예시 공장 노동자들이 해고에 반대해 파업을 벌였다. 정원사들은 임금 불만 때문에 일손을 멈췄다. 4월에는 타브리즈 지역 벽돌공 2천 명이 파업에 나섰다.

파업은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다. 3주가 채 안 돼 석유 노동자 4만 명, 철강 노동자 4만 명, 철도 노동자 3만 명이 일손을 놓았다.

샤는 [사바크 총수를 해임하고 총선 실시를 약속하는 등] 어느 정도 양보하며 운동의 김을 빼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책략은 역효과를 냈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저항에 나설 자신감을 얻었다.

소수민족들이 해방을 요구하며 투쟁에 동참했고, 여성들은 성평등을 바라며, 농민들은 토지 개혁을 바라며 싸움에 나섰다. 매일매일 샤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샤는 계엄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학살했다. 샤의 군대가 학살한 민간인이 2천 명도 넘었다. 이러한 무자비한 학살에 항의해 석유 노동자 3만 명이 파업을 벌였다.

철도 노동자들은 경찰이나 군인의 수송을 거부했다. 항만 노동자들은 식량과 의약품, 그리고 반정부 운동에 쓰일 종이만 하역했다. 군대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 석유 공장 쟁의대책위원회가 작성한 요구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계엄령 해제, 모든 정치수 무조건 석방, 석유 산업의 국가 통제, 여성 노동자 차별 철폐.

경제적 요구로 시작한 개별 작업장 파업들이 정치적 요구를 포함하는 대중파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많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선출한 공장위원회, 이른바 “쇼라”가 건설됐다. 쇼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사장들이 도망가면서 내팽친 공장을 운영했다.

저항 운동은 점점 민중 반란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1979년 1월 16일 샤는 해외로 줄행랑을 쳤다. 최후까지 저항한 군대를 무장 민병대가 물리쳤다.

이란 국내는 열광의 도가니였고, 피억업자들의 축제의 장이었다. 감옥 문이 활짝 열렸고 공장들에 쇼라가 확산됐다. 농민들도 자체 쇼라를 건설하고 지주한테서 토지를 몰수했다.

쇼라는 노동자 권력의 맹아였다. 그러나 혁명에는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여러 사회 계층이 참여했다. 그 가운데는 자본가들도 있었다.

혁명이 나아갈 길을 두고 정치 투쟁이 벌어졌다. 불행히도 종교적 정치 세력(모자헤딘)과 세속 좌파(투데당과 페다인) 모두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망쳐 놓았다.

그들은 모두 이란 노동계급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정치적 지도력이 부재하고 자주적 노동계급 조직이 없는 탓에 공백이 생겼다.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개입해 그러한 공백을 메우려 했다. 호메이니는 1979년 1월 망명지 프랑스에서 돌아와 국가 원수를 자칭했다.

그러나 그는 곧 저항에 부딪혔다.

호메이니의 새 정부는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를 “비이슬람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당시 [석유기업] 쉘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노동자와 종교가 무슨 상관이랍니까? 노동자들은 모두 똑같이 착취받을 뿐입니다.

“우리 피를 빨아 온 잔혹한 경영자가 어느날 갑자기 선한 무슬림을 자처해 우리들을 종교에 따라 나눠 놓으려 합니다. 쇼라로 단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의 힘

1979~80년에 3백60건의 파업, 연좌 농성, 공장 점거 투쟁이 벌어졌다.

1979년 메이데이에는 약 1백50만 명이 테헤란에서 행진을 벌였다. 이처럼 노동자들의 힘은 막강했다.

호메이니는 민족 자본가, 상층 중간계급, 소상공인, 성직자 계층을 한데 모아 노동자들에 맞섰다.

호메이니는 이슬람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구호를 내걸고 불한당들을 모아서는 좌파와 소수민족 운동을 공격하고 “이슬람 율법”을 따르라고 강요했다.

좌파적 언사를 차용하며 미국 제국주의를 공격했다. 호메이니 자신에 대한 지지를 굳힐 요량이었다. 1979년 11월 호메이니는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습격했다.

공장에서는 경영자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이슬람주의자들을 앉혔다.

호메이니는 미국 제국주의를 물리치려면 모든 이란 사람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누구든 혁명의 적이라고 말했다.

좌파는 이란이 아직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준비가 안 됐다고 믿었으므로 “민족 단결”의 기치 아래 자본가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 호메이니에 맞서는 방식으로] 좌파는 게릴라 투쟁에 집중했고 이 때문에 그들은 대중한테서 더욱 고립됐다. 좌파가 노동자와 빈민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조직하며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호메이니가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 지배자 사담 후세인에게 자금을 제공해 그가 1980년에 이란과 전쟁에 나서게 했다. 호메이니는 이를 “하늘이 내린 기회”라 불렀다. 호메이니는 반정부 인사들을 모두 외국 첩자로 몰아세웠고, 이슬람 정권은 이를 이용해 모든 반대 세력을 진압했다.

8년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지만 호메이니의 승리가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다. 이란 혁명은 중동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보여 줬고 노동자 권력의 실현 가능성을 키웠다.

노동자들은 샤를 타도하는 데서 핵심 구실을 했다. 노동자 권력의 가능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것을 실현하고자 분투하지 않은 좌파의 오류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기회가 사라졌다.

오늘날 미국은 이란의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정권과 맞서고 있다. 미국이 아마디네자드 정권과 대립하는 것은 평범한 이란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다.

미국은 이란 사람들의 친구인 척한다. 그러나 사실 미국이 바라는 것은 장차 믿을 만한 동맹이 될 자가 집권하는 것뿐이다. 그가 독재자든 아니든 말이다.

추천하는 책

《이슬람주의, 계급 그리고 혁명》

크리스 하먼 지음, 이수현 옮김, 책갈피, 128쪽, 4,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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