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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항쟁 5주년:
새 저항 세대를 낳은 찬란한 정치 투쟁

2008년 5월 2일, 취임하자마자 역주행하는 이명박에 대한 분노가 타올랐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제안한 촛불 시위에 약 2만 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2007년 17대 대선과 2008년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이명박 우파 정부가 집권하고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이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이 때문에 ‘대중의 보수화’를 말하며 낙담해 있던 사람들에게 촛불의 분출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촛불 운동의 등장은 ‘한국 사회 보수화’론을 반박하는 통쾌한 증거였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결정은 촛불 시위의 방아쇠 구실을 했을 뿐이었다.

청소년들이 내건 ‘0교시에 아침 못 먹고 학교 급식에서 미친 소 먹어도 의료 민영화로 치료 못 받고 죽거든 대운하에 뿌려 주오’라는 구호는 사람들의 분노가 단지 광우병 문제에 갇혀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시위 참가자들은 대운하, 의료민영화, 언론 장악, 경쟁 교육 등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게다가 첫날부터 “이명박 탄핵”, “이명박은 물러가라”가 주요 구호였다.

즉, 촛불항쟁은 정치권력에 맞선 정치투쟁이었다. 촛불은 청소년에서 출발해 대학생, 청년, 노동자들에게 번져 나갔다. 거리로 나온 많은 청년은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찬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나흘 만에 1천 5백 개 단체가 모여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를 구성했다. 대책회의는 운동의 정치적 구심이었다.

우석균, 박상표, 우희종 등 전문가들은 정부의 ‘광우병 괴담’론에 맞서 운동의 정당성을 지키고 참가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5월 24일 시작한 거리 행진은 운동의 새로운 기점이었다. 대책회의 내 대다수 단체들은 ‘자발성에 개입할 수 없다’며 대책회의가 거리 행진을 조직하자는 의견에 반대했다. 그러나 노동자연대다함께 등 열의 있는 소속 단체들이 “행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이런 주도성 덕분에 대중의 자발성은 청계광장에 갇히지 않고 거리에서 폭발할 수 있었다.

실종된 고리

6월 10일은 이 투쟁의 정점이었다. 서울에서만 70만 명이, 전국에서는 1백만 명이 모였다. 1987년 6월 10일 다음으로 최대 규모 시위였다. 이명박 ‘불도저’의 엔진을 덜덜거리게 만든 것은 모두 촛불의 힘이었다. 결국 이명박은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들으며 뼈저린 반성을 했다’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6·10 이후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물음이 던져졌다. 이미 거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의제가 확대됐고, “이명박은 물러나라”는 구호가 압도하고 있었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경쟁 교육, 의료 사영화 등 정권의 정책 전반을 반대하는 운동은 정권 자체에 반대해야 한다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렀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40퍼센트가 퇴진을 지지했고 촛불 내에서는 더 높았다. 대책회의는 거리의 열망을 모아 운동의 정치적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노동자 파업을 호소했어야 했다.

2008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촛불항쟁 촛불항쟁은 거리 시위를 노동자 투쟁과 만나도록 하는 혁명적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사진 임수현

그러나 대책회의 내 다수는 아쉽게도 이런 방향을 지지하지 않았다. 대책회의 내 온건한 NGO와 개혁주의 지도자 들은 이 운동을 ‘제도화’하는 게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기성 정당과 국회로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정권은 반격을 퍼부었다. 이명박은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불법 폭력 시위는 엄격히 대처하겠다”며 선전포고를 했다. 폭력 진압과 무더기 연행이 이어졌다. 이명박은 촛불이 계속돼 깊어지는 세계경제 위기에 대한 불만과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고시 강행 시 전면 파업’이라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면 어땠을까? 거리의 촛불 시위와 “국가 골간 산업을 모두 틀어쥔 저력 있는 집단”인 조직노동자들의 파업이 결합했다면 그 효과는 엄청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은 거리 시위대에게는 없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윤 체제를 멈출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초기부터 ‘노조 조끼를 벗고 시민으로 참가하겠다’는 태도였고, 상징적 두 시간 파업을 하는 데 그쳤다. 노동자 투쟁은 1백만 촛불이 그토록 바라던 ‘실종된 고리’였다.

1백 회 넘게 계속됐던 촛불은 결국, 이명박의 집요한 탄압과 김빼기에 밀려 사그라지고 말았다.

퇴적물

촛불이 사그라진 후 이명박이 다시 개악을 추진하자 진보진영 내 일부는 ‘촛불이 성취한 것이 없다’는 식의 패배적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촛불항쟁은 이명박 정부를 1년 동안 통치 불능의 정치적 식물 정권으로 만들었고 주요 개악들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무엇보다 촛불항쟁이 낳은 최대 성과는 한 세대 전체를 거대하게 급진화시켰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를 두고 “언제든지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는 잠재적 시위자들이 생겼다”며 두려워했다.

일부에서는 ‘거리 시위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정치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그 정치는 촛불의 요구를 대변할 수 없는 민주통합당과의 동맹을 통한 의회 정치로 한정된 것을 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촛불항쟁은 거리 시위의 힘을 일관된 방향으로 모으고 이것이 노동자 투쟁과 만나도록 하는 혁명적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2008년 촛불항쟁은 우파 정부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인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이명박의 정책에 온몸으로 저항한 촛불항쟁은 박근혜 시대에도 불씨를 남기고 있다.

자생성과 리더십의 상호작용

촛불항쟁에서 나타난 대중의 자생성은 놀라웠다. 촛불 대중은 정부의 ‘배후세력론’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촛불을 치켜들었다. 이는 대중 자신이야말로 사회 변화의 진정한 주체임을 확인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반면, 운동 내 리더십은 ‘낡은 것’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순수한’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시위나 파업이라도 처음 호소한 사람이나 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동참시키려고 더 설득력 있고 효과적으로 제안하려는 노력도 하게 된다. 촛불항쟁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탄핵을 발의한 것, 촛불 시위를 제안한 것은 리더십이 아니었을까?

대중의 자발성은 그것을 일관된 방향으로 향하게 할 응집력 있는 조직, 올바른 전략과 결합할 때 사회를 바꿀 막강한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