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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번 마틴 사건 이후:
“흑인이 죽이면 유죄, 백인이 죽이면 정당방위”

 〈레프트21〉 80호 ‘[기고-미국의 인종차별] 후드티 입은 흑인은 죽음을 각오하라?’ 기사에서 소개한 트레이번 마틴 살해 가해자가 지난 7월 무죄 평결을 받은 후,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 논란이 뜨겁다. 위 기사를 기고한 미국 국제사회주의조직(ISO) 활동가 크리스 킴이 평결 이후 벌어진 논쟁과 운동을 돌아보는 기사를 〈레프트21〉에 보내 왔다.

작년 2월 플로리다 주 샌퍼드에서 비무장한 17세 흑인 청소년 트레이번 마틴을 사살해 같은 해 4월 2급 살인 혐의로 구속된 자경단장 조지 짐머맨이 올해 7월 13일 무죄 평결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 특히 미국 전역의 흑인들은 이 평결에 큰 충격을 받았고, 분노와 실망을 금치 못했다.

플로리다 주 특별 검사 엔젤라 코리는 “이 사건에서 인종이나 총기는 결코 쟁점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 사건은 시작부터 끝까지 ‘트레이번 마틴이 백인이어도 그렇게 했을까?’하는 의문으로 가득했다.

사건 당일 911과의 통화에서, 911 대원이 마틴의 인종을 묻자 짐머맨은 “흑인인 것 같다”며 추격할 필요 없다는 대원의 말을 무시하고 비무장 청소년을 추격·사살했다. 마틴의 아버지가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911과 통화하던 24시간 동안 경찰은 마틴의 시신에서 발견된 핸드폰으로 가족을 찾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짐머맨이 비무장 청소년을 사살했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미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은 거의 한 달 반을 끌고서야 짐머맨을 체포했다.

사건 담당 판사 데브라 넬슨은 법정에서 인종에 대한 언급은 물론이고 “인종 프로파일링”*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지도 못하게 금지했다. 이 재판을 평결한 여섯 명의 배심원 중 다섯 명은 백인, 한 명은 히스패닉으로 흑인 배심원은 한 명도 없었다.

선제공격법

짐머맨의 무죄 평결에 적용된 정당방위법*도 쟁점이 됐다.

미국총기협회(NRA)와 미국입법교류협회(ALEC)와 같은 보수 단체들의 로비로 2005년에 통과된 이 법은 “선제공격법(‘Shoot First’ Law)”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플로리다 사법 당국의 통계를 보아도, 정당방위법이 통과된 후 5년 동안 ‘정당방위’로 무죄 선고를 받은 총기 살해가 그 전 5년에 비해 2백83퍼센트나 늘었다.

이 법은 분명 인종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미국 도시연구소 정의정책센터가 현행 정당방위법이 있는 주에서 일어난 4만 3천5백여 건의 살인사건을 조사한 결과, 백인이 흑인을 사살하고 정당방위법에 의거해 무죄 평결을 받을 가능성이 흑인이 백인을 사살한 경우보다 2백81퍼센트나 높았다.

짐머맨의 무죄 평결과 함께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마리사 알렉산더 건도 이 법의 인종차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작년 3월 플로리다 주에서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31세 흑인 여성 마리사 알렉산더가 정당방위 차원에서 벽에 위협사격을 했다. 그러나 마리사는 정당방위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징역 20년의 중형을 받았다.

비무장한 흑인 청소년을 사살한 짐머맨의 ‘정당방위’는 무죄고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흑인 여성 알렉산더의 ‘정당방위’는 피해자 한 명 없어도 20년 형을 받는 현실에서 “인종은 쟁점이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흑인이 죽이면 유죄, 백인이 죽이면 정당방위”(미국 반자본주의 언론 〈소셜리스트 워커〉)인 것이다.

정당방위법을 옹호하는 보수 단체들은 정당방위법 때문에 범죄율이 하락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범죄율이 지난 몇십 년 사이에 많이 하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2005년에 통과된 정당방위법 때문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투옥 비율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 법무부 통계를 보면, 미국의 투옥 비율은 “마약과의 전쟁”이 본격화한 레이건 정권 이래로 4배나 늘었다. 흑인 남성의 투옥 비율이 백인 남성의 투옥 비율에 비해 6배나 높다는 사실도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잘 보여준다.

이유 없이 단속·투옥·사살 당하는 흑인 피해자들과 평범한 미국인에게 이번 평결은 미국의 사법제도가 흑인들을 또다시 무시했다는 사실만을 보여줬다.

미국 전역으로 번지는 저항

언론에 무죄 평결 소식이 실린 후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던 흑인 복싱선수 테렐 가우샤는 다시는 성조기 디자인의 복싱 트렁크를 입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가수 스티비 원더, 마돈나, 로드 스튜어트 등은 정당방위법이 페지되지 않으면 플로리다에서 공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흑인 단체인 전미유색인종발전협회(NAACP)는 짐머맨의 무죄 평결 직후부터 시민권 위반 혐의로 짐머맨을 처벌할 것을 법무부에 요청하는 청원운동을 시작했다. 흑인 변호사·판사 들의 단체인 전국변호사협회(NBA)도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아래로부터 저항이 터져 나왔다. 짐머맨이 무죄 평결을 받은 날 밤부터 분노를 참지 못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그 주 주말에는 도시마다 수백에서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가한 시위가 [플로리다의 주도(州都)] 마이애미는 물론 뉴욕시,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워싱턴DC, 디트로이트 등 전국 1백여 곳으로 번져 나갔다.

전미유색인종발전협회와 내셔널액션네트워크(NAN)와 같은 흑인 자유주의 단체들이 주도한 이 시위에는 흑인학생조합(BSU), 혁명적흑인노동자연합(LRBW) 등 흑인 좌파 조직들을 비롯해 국제사회주의단체(ISO) 같은 급진좌파 단체들도 인종을 불문하고 함께 참여했다.

연대는 인종을 뛰어넘어 계속됐다. 동양계 미국인들의 여러 단체들도 “동양계 미국인들이 트레이번 마틴을 위한 정의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며 “우리는 인종 프로파일링, 제도적 인종 차별인 현행 정당방위법, 소수 민족에 대한 폭력을 고착화하는 범죄적인 미국 사법제도를 규탄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성소수자 활동가 키앤 오브라이엔은 뉴잉글랜드의 LGBTQ* 신문 〈레인보우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기본적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계속하는 우리 성소수자는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계속 싸우고 있는 흑인들과 함께할 의무가 있”으며 “분열을 넘어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모든 투쟁에 함께해야 이길 수 있다. 그것이 연대의 중요성”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흑인과 히스패닉 청년들이 트레이번 마틴 사살 직후 결성한 인종차별 반대 단체 ‘꿈을 지키는 사람들(Dream Defenders)”은, 공화당 소속 플로리다 주지사 릭 스캇이 인종차별적 현행 사법제도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며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31일 동안 플로리다 주의회를 점거했다.

〈마이애미 헤럴드〉는 이 점거 농성으로 ‘꿈을 지키는 사람들’이 “돌아오는 가을에 현행 정당방위법을 재심의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는 등 여러 가지를 따냈[으며] … 플로리다 사법 당국과 인종 프로파일링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도 갖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연대

이런 운동의 압력 때문에 오바마는 7월 19일에 기자회견을 열었다. 짐머맨 무죄 평결 직후 백악관이 발표한 첫 번째 성명과는 대조적으로, 이날 기자회견에서 오바마는 인종 차별을 당한 개인적 경험을 밝히고는, 흑인들이 겪는 일상적인 차별과 쓰라렸던 미국사를 돌아보며 현행 정당방위법의 개정을 촉구했다. 미국의 보수 세력들은 오바마의 이 기자회견을 한 것을 두고 오바마가 “미국을 망치려 한다”는 둥 “[미 대통령이 군 최고사령관인 것을 빗대] ‘역사상 최초의 인종차별 최고사령관’”는 둥 오도방정을 떨었다.

그러나 사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고 5년 동안 단 한 번도 인종차별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오바마는 흑인들 앞에서 연설하며 “[흑인] 빈곤의 악순환을 종식시키려면 [제도가 아니라]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문제를 피해자들에게로 떠넘겼다.

흑인 성인의 빈곤층 비율이 2007년 19.8퍼센트에서 2010년도 23퍼센트로, 흑인 어린이 빈곤층 비율이 2007년 34.5퍼센트에서 2010년 39.1퍼센트로, 흑인 공식 실업률이 2007년 9퍼센트에서 2010년 14.5퍼센트로 올라가는 등 오바마 정권 들어 흑인들의 처지가 더 악화됐는데도 말이다.

오바마 정권의 다른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오바마의 부통령 조 바이든은 대표적 인종차별 제도인 “마약과의 전쟁”을 지지한다. 오바마가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임명하려던 레이 켈리는 뉴욕시에서 인종 프로파일링 정책으로 악명 높은 ‘불심검문’ 제도를 통과시킨 경찰국장이었다.

정치 평론가 태이비스 스마일리가 논평한 것처럼 오바마는 “백악관 밖에서 1주일 동안 계속된 시위와 제기된 압력에 떠밀려 억지로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돌아오는 8월 24일과 8월 28일 이틀에 걸쳐 ‘워싱턴 대행진’* 50주년 기념 집회가 열린다. 짐머맨의 무죄 평결로 분노가 뜨거운 가운데 열리는 올해 집회에서는 특히나 제도적 인종 차별과 계속되는 실업·빈곤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가 높을 전망이다. 이 운동이 일회성 투쟁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많은 활동가와 조직 들이 ‘워싱턴 대행진’ 50주년 집회를 동원의 초점으로 삼고 있다. 또 여러 인종차별 반대 단체들, 소수 민족들, LGBTQ 단체들, 노동운동 단체들이 연대를 강화해 더 큰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용어설명

인종 프로파일링 : 인종적·집단적 표적을 대상으로 경찰이 범죄자 검거를 위해 불심 검문·수색을 하는 것.

정당방위법(‘Stand Your Ground’ Law) : 현행 정당방위법은 2005년에 플로리다 주에서 최초로 통과됐다. 기존의 정당방위법은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는 우선 그 자리에서 벗어날 것을 의무로 규정하고, 집이나 자동차 같은 사유 영역을 침범당한 경우에 한해 총기 사용을 허가한 법이었다. 반면 이 법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의무도 없고 사유 영역 바깥에서 총기를 사용해도 정당방위로 인정하고 있다. 플로리다 주에서 제정된 이래로 약 서른 개의 다른 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법이 제정됐다.

LGBTQ : 레즈비언(L), 게이(G), 양성애(B), 트랜스젠더(T), 퀴어 또는 성 정체성에 의문을 품은 사람(Q)을 통칭하는 용어.

워싱턴 대행진 : 흑인 공민권 운동이 성장하던 1963년, 노예 해방 1백 주년을 기념해 워싱턴에서 열린 수십만 명의 평화 행진. 이 집회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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