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기:
미국 ‘매카시즘’ 마녀사냥의 진실과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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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2월 9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휠링 시에서 한 상원의원이 종이 뭉치를 치켜들고는 소리 높여 외쳤다. “여기 제 손에 국무부에서 일하는 친소련 공산당원 2백5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사실 이 종이는 명단도 아니었고, 아무 내용도 없는 소품에 불과했다. 이 상원의원이 나중에 반공주의 히스테리의 대명사가 된 조지프 매카시였다.
매카시는 유대인 포로를 학살한 나치 전범을 옹호한 반유대주의자에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경쟁자들의 전력을 날조하는 수작으로 상원의원이 된 자였다.
이처럼 매카시는 미치광이였다. 그럼에도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반공주의 마녀사냥을 몇몇 정신 나간 개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린 사건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 마녀사냥 뒤에는 미국 지배계급 전체의 단호한 의지가 있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퍼부은 1945년,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1945년 미국은 전 세계 석탄의 절반, 전기의 절반 이상, 석유의 3분의 2를 생산했다. 미국 지배자들은 세계대전의 정치적·경제적 승리자로서 미국과 전 세계에서 기업 자본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다.
동시에 미국 지배자들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1945년 말과 1946년 초에 미국 전역의 고무·철강·광산·자동차 노동자 들이 파업에 나섰다. 1946년 상반기에만 3백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난 이 파업은 미국 지배자들이 직면한 사상 최대 규모의 노동자 운동이었다.
미국 민중만 저항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인도·인도네시아·필리핀 등 아시아 곳곳에서 식민 지배에 맞선 무장 반란이 일어났다. 아프리카에서는 대륙 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총파업이 벌어졌다. 중국에서는 민족해방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의 영향력하에 있던 서유럽과 일본에서도 반란의 조짐이 보였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경제, 강력한 공산당, 레지스탕스 투쟁으로 단련된 투사들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면 체제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 몰아친 공산주의 혁명의 물결을 잊지 않았던 미국 지배자들로서는 악몽 같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과 소련 제국주의가 세계 패권을 둘러싸고 벌이던 경쟁이 냉전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속에서 동유럽 전역에 소련을 모방한 위성국가들이 들어섰다. 소련은 미국에 이어 1949년에 핵폭탄을 보유하게 됐다.
미국 지배자들은 이 모든 것을 연결시켜 “문명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트루먼). 반공주의는 대외정책과 국내정책 모두에서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는 반공주의 운동을 대대적으로 조직했다.
1947년에 통과된 태프트-하틀리 법이 그 출발이었다. 이 법은 연대 파업을 금지하고, 피켓라인 고수를 불법화했다. 공공부문 노동자의 파업은 금지됐으며, 살쾡이 파업으로 입은 피해의 책임을 노조가 지게 함으로써 현장노동자들에 대한 노조의 관료적 통제를 강화했다.
무엇보다 이 법은 공산당원이 노조 간부가 될 수 없게 했다. 투사들은 노조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자신이 공산당원이 아님을 밝혀야 했다. 이 ‘충성 서약’을 거부하면 해고당했다.
미국에서 공산당은 1930년대 전투적 노동운동 속에서 급격하게 성장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미국 전역에 당원이 수천 명뿐이었지만, 몇 년 뒤에는 11개 언어로 신문을 발행하고 노조원 수백만 명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됐다.
공산당의 기층 투사들은 대공황 시기에 들불처럼 일어난 노동자 파업의 최선두에 섰고, 좌파적 노조연맹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건설에 기여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민중전선(계급연합) 전략을 받아들인 공산당 지도부는 루스벨트의 민주당과 뉴딜정책에 무비판적 지지를 보냈다. 제2차세계대전 때 공산당 지도부는 파시즘에 맞선 전쟁에 방해가 될까 봐 무파업 선언을 했다.
그럼에도 기층 당원과 지지자들은 전쟁 기간 동안 수만 건이나 벌어진 살쾡이 파업의 선두에 섰다. 이들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과 파시즘에 맞선 운동에서도 가장 효과적 투사들이었다.
후버가 작성한 ‘공산주의자’ 명단에 올라간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투사들이었다. 명단에 올라가면 조사위원회에 출두해 ‘과거를 뉘우쳐야’ 했고, 다른 투사들의 이름을 대야 했다. 그들은 직장을 잃고 임대 주택에서 쫓겨났다.
오리
스페인 반파시스트 지지 운동이나, 흑백 분리 정책 반대 운동에 참가한 것도 공산주의자라는 증거가 됐다. “오리처럼 걷고, 오리처럼 헤엄치고, 오리처럼 꽥꽥거리면 그건 오리”라는 일명 ‘오리 판별법’이 판쳤다. 지배자들은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공격해 투쟁의 중핵을 파괴하고자 했다.
물론 지배자들은 그럴 듯한 명분을 대며 마녀사냥을 정당화했다. 지배자들은 공산당원들을 ‘핵무기로 우리를 위협하는 소련 독재 체제를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공격했다.
이 공격은 소련이 실제로 그런 체제였기 때문에 효과적이었다. 소련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억압·착취 체제였다. 공산당원들은 투쟁을 이끈 투사들이었지만, ‘적의 적은 친구’라는 생각 때문에 소련을 지지했다. 그래서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당당히 주장하기 힘들었다.
그 대신 투사들은 “공산당은 1백 퍼센트 미국주의(Americanism)다”, “헌법을 어기지 않았다”, “증거가 없다”는 논리로 탄압에 맞서면서, 민주당과 자유주의자들이 방어에 동참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트루먼의 민주당 정부 자신이 탄압의 주체였다. 트루먼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 볼 수 있는가? 모든 곳에서!” 같은 백문백답이 실린 소책자를 수백만 권 쏟아 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상의 자유를 보호하려고 설립된 연대체의 창립자가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그를 연대체에서 제명했다. ‘사상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면서 공산당원들이 끌려갈 때 방어 입장도 내지 않았다.
냉전
이때 냉전의 막을 올리듯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지배자들은 마녀사냥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적을 이롭게 하는 자를 처단해야 한다’는 논리로 결집했다.
정부와 언론은 소련에 대한 공포감을 퍼뜨렸다. 대중 잡지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당신의 아이를 노리고 있다’는 따위의 기사를 써댔고, 초등학교에서는 “공습에 대비해” 사이렌이 울리면 책상 밑으로 숨는 대피 훈련을 했다.
마녀사냥의 광기는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에 핵무기 관련 비밀을 넘겨줬다는 혐의로 사형당했을 때, 그 참혹한 절정에 이르렀다. (로젠버그 부부 마녀사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본지 웹사이트에 재게재된 ‘냉전기 매카시즘 마녀사냥의 속죄양 로젠버그 부부’를 참고하시오.)
매카시도 이 물결을 탔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의 마녀사냥이 어찌나 철저했던지, 중간에 끼어든 매카시는 정말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찾아내 공격해야 했다. 심지어 나중에 그는 군대도 공산주의 소굴이라며 날뛰었다.
매카시가 날뛰는 것을 이용해 의회 내 다수파가 된 공화당은 매카시가 군대를 비난하자 그를 의회에서 제명했다.
그러나 이미 두 명이 사형당하고, 수백 명이 투옥되고, 2만여 명이 직장에서 쫓겨난 뒤였다.
헌신적 투사들이 소련에 대한 혼란 속에 민주당에 의존하다가 제대로 된 방어도 못 해보고 무너졌다. 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이었던 미국 노동운동은 이후 후퇴하며 민주당에 더 종속됐다.
작업장을 덮친 마녀사냥
마녀사냥 열풍 속에서 숙청된 사람들 중 단일 최대 집단은 전투적 파업으로 명성이 높았던 항만 노동자 3천여 명이었다. 공공기관 중 최다 집단은 강력한 노조를 건설한 전투적 흑인 집배원 노동자들이었다.
할리우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최초로 공격당한 사람들은, 당시 단일 노조로서는 영향력이 가장 컸던 영화배우조합에 속한 활동가들이었다.
월트 디즈니처럼 공산당이 조직한 애니메이터 파업 때문에 공산주의를 증오하던 대자본가나, FBI의 밀정이었고 나중에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 같은 영화배우조합 우파 지도자들이 할리우드 마녀사냥의 선봉에 섰다.
노조 상층 관료들은 마녀사냥에 적극 동조했다. 그들은 현장조합원들의 전투성을 통제하고 민주당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려 했다. 따라서 전투적 투쟁을 부담스러워했고 이를 주도하는 기층 투사들을 껄끄러워했다.
노조 관료들은 기층의 좌파적 투사들과 공산당원들을 FBI에 밀고했고, 반공주의자들을 결집시켜 노조 내 통제력을 강화했다.
지배자들은 이런 ‘전향’을 환영하며 널리 선전했다. 노조 관료들이 ‘과격파’를 무장해제하는 대가로, 정부와 사장들은 75~1백 퍼센트 임금 인상, 의료보험, 연금, 휴가 같은 ‘실리’를 제공했다.
이는 당시 미국 경제가 역사상 최대 호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80년대에 미국 경제가 불황으로 접어들자 이런 ‘실리’는 눈 녹듯 사라졌다.
좌파적 노조연맹 CIO는 우경화하다가 1955년에 우파 노조연맹 미국노동총동맹(AFL)에 통합됐고, 통합 노조는 민주당의 강력한 지지단체가 됐다. 엄청난 보수성, 관료적 태도, 실리주의는 노동조합의 대명사가 됐다.
이듬해 소련의 수장이 된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만행과 소련 체제의 참상을 폭로하자, 이 모든 탄압에도 끝까지 지조를 지키던 극소수의 투사들마저도 무너져 내렸다.
이런 침체는 1960년대에 흑인 공민권 운동이 성장해 미국을 뒤흔들 때까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