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현대판 매카시즘에 맞서기:
                        
                                    
            
            
                미국 통치자들의 1950년대 ‘빨갱이 마녀사냥’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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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는 1950년대 혹독한 마녀사냥을 설계했던 자다.
매카시는 민주주의를 전복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 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에서 매카시즘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노동운동가들, 인종차별 반대 운동가들 모두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미국과 소련 간 제국주의 경쟁으로 막 시작된 냉전이 미국에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의 동인이었다.
1950년에 매카시는 미국 정부 내에 암약하는 첩자 200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매카시는 그 명단을 끝내 공개하지 않았지만, 그 쇼 덕에 매카시는 반공 마녀사냥을 벌이기에 충분한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악명 높은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의 조사관들은 조사 대상자들에게 미국공산당(CPUSA) 당원이거나 당원이었던 적이 있는지 추궁했다.
청문회에 소환돼 증언대에 선 사람들은 다른 공산당 지지자들의 이름을 불라는 압력을 받았다.
 
 마녀사냥
매카시의 마녀사냥은 공산당만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공산당과 연계가 있는 광범한 진보 단체들도 겨냥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발목을 잡아챌 자들은 드러내고 활동하는 공산당원들이 아니라, 중립을 지키는 자들, 유화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 국제 공산주의의 목적을 까맣게 모르는 자들이다.”
‘빨갱이 마녀사냥’은 물리적 공격과 살인을 낳았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반공 우익 러돌포 세레로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곧 노동운동가 로버트 나우를 총으로 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세레로는 나우를 총으로 쏴 죽였지만 법정에서 나우가 “검둥이 옹호자”라고 진술했고 과실치사로 고작 3년 징역형을 받았다.
매카시즘 마녀사냥 광풍 속에 에설 로젠버그와 줄리어스 로젠버그 부부가 간첩 혐의로 체포돼 처형당했다.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구명 운동이 국제적으로 벌어졌지만, 그들은 1953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흑인 공동체는 물리력을 동원한 공격에 특히 취약했다.
예술가 폴 로브슨은 1949년 8월 뉴욕주 픽스킬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로브슨이 픽스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지역의 반공 우익 폭도가 야구방망이와 돌멩이를 들고 공연을 보러 가던 사람들을 공격했다.
픽스킬 경찰은 공격 몇 시간 후에야 현장에 도착했고 도착 후에도 개입하기를 거부했다. 열세 명이 중상을 입었고, 로브슨을 상징하는 인형이 [19세기부터 미국 인종차별 극우가 사용한 흑인 린치 방식인] 교수형을 당한 모양으로 나무에 매달렸다.
 
 흑백 인종 분리
사회주의 언론인 칼 브래던은 미국 내 흑백 인종 분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백인 동네에 집을 사서 흑인 가족에게 임대했다. 누군가가 그 집에 폭탄을 설치했다.
이후 브래던은 인종 갈등을 부추긴 혐의로 체포돼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52년에는 당시 82세였던 흑인 사회학자 W E B 두보이스가 “외국 첩자” 혐의로 체포됐다.
‘빨갱이 마녀사냥’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성소수자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라벤더 마녀사냥’도 함께 벌어졌다.
1953년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연방정부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을 체계적으로 수사해 색출하라는 행정명령 10450호를 내렸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협박에 굴복하기 쉽고 “도덕성이 취약”하기 때문에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혹독한 수사 끝에 약 1만 명의 공무원이 해고됐다.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과 꼭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강제추방이 무기로 쓰였다. 1952년 제정된 이민국적법에 의거해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회주의자, 급진적 언론인, 노동조합 투사 수백 명이 추방당했다.
흑인 공산주의자 클라우디아 존스도 그렇게 추방당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존스는 체포·수감돼 1955년에 영국으로 추방당했다. 또 다른 공산주의자 비어트리스 존슨도 네 살배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준 직후 끌려가 추방당했다.
그러나 매카시는 지나치게 기고만장해졌다. 1954년에 매카시는 미 육군 내부에 공산당 동조자들이 있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그 후 열린 청문회들로 매카시는 몰락했다.
고립
‘빨갱이 마녀사냥’은 진보적 대의를 지지하고자 했던 사람들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주류 노동조합 지도자들 중 몇몇은 마녀사냥에 동참했다. 노동조합 연맹 산별노조협의회(CIO)는 공산당과의 연계를 이유로 산하 소규모 노동조합 열한 곳을 제명했다.
1950년대 마녀사냥이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공산당이 이전처럼 강력한 조직이 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관련 글: 《마르크스21》 51호, ‘패배를 부른 미국 공산당의 민중전선 전략’)
1930년대에 공산당은 전투적인 노동자 투쟁, 인종차별 반대 운동,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다.
당원 수가 6만 6,000명에 이르렀던 공산당은 연예인들과 주류 정치 인사들을 끌어들여 민중전선 조직을 만들었다.
마녀사냥이 거세지자 미국 공산당의 많은 “동조자”들이 자취를 감췄다.
공산당이 강제 해산당할 1954년 당시 당원 수는 1만 명으로 줄어 있었는데, 그중 1,500명 이상이 미국 정부가 심은 밀정이었다.
‘빨갱이 마녀사냥’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장기 호황기에 벌어졌다. 당시 호황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아메리칸 드림’ 신화를 믿기 시작했다.
혁명가 맬컴 엑스가 지적했듯, ‘미국의 꿈’은 어떤 이들에게는 악몽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미국 권력층은 빨갱이 마녀사냥과 일부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향상을 결합시켰다.
오늘날은 경제가 호황이 아니라 불황이고 위기에 처해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지배계급은 마녀사냥에서 시작해 완연한 파시즘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판 매카시즘에 맞서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할 기회가 열릴 수도 있다.
이 기사를 읽은 후에 ‘미국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말하는 “왕은 없다” 항쟁의 배경’을 읽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