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1960년 안보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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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귀중한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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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베 정부는 군사 대국화에 속력을 내고 있지만, 다수 일본인들은 이를 환영하지 않는다. 얼마 전 도쿄 도심에서는 군사 대국화 추진에 반대해 5천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관련기사 ‘[일본 4·8 대집회] 아베의 군사 대국화 추진에 많은 일본인들이 반대한다’를 보시오.)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적도 있지만 인류 최초로 피폭을 당한 적도 있는 일본에는 강력한 평화운동의 전통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투쟁은 195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에 맞선 투쟁, 이른바 ‘안보 투쟁’이다. 안보 투쟁은 일본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중 투쟁이었다. 안보 투쟁의 전개 과정과 성과, 한계 등을 돌아보며 오늘날 일본 평화운동이 교훈 삼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1960년에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해 일본을 더한층 미국의 군사전략에 편입시키려 했다. 새 미일안보조약은 미군이 일본에 계속 주둔하는 것뿐 아니라, 미일 간 공동작전과 일본의 군비증강을 새로운 의무로 규정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전쟁과 핵폭탄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히 남아 있던 시기에 다수 일본인들이 미일안보조약 개정에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사람들은 일본이 다시 전쟁에 휘말릴까 봐 불안했다.
1950년대 내내 평화를 염원하는 일본인들은 여러 평화운동을 펼쳐 왔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과 일본 지배자들이 헌법 9조를 수정하려 했을 때, 평범한 일본인들은 거세게 반발해 개헌파의 시도를 좌절시킨 바 있다. 1954년 비키니섬(미국의 핵실험 장소로 쓰이던 태평양의 작은 섬) 앞바다에서 조업하던 일본 어선이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에 피폭된 사건을 계기로 반핵 운동도 시작됐다.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도 벌어졌다. 안보투쟁은 이런 저항들의 연장선이었다.
1959년 3월 사회당과 공산당, 총평(일본노동조합 총평의회) 등 1백34개 진보단체가 함께 ‘안보개정저지 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를 결성했다. 1950년대에 원·수폭 금지 운동(비키니섬 수소폭탄 실험을 계기로 시작된 반핵 운동)과 경찰관 직무집행법 개정(경찰력 강화를 위한 것)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진보진영이 단결했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전후 일본 진보운동 내 반목이 심각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공동 행동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날치기
공청회·서명운동·청원운동에서 시작된 운동은 1960년 5월 19일 기시 내각이 안보조약 개정안을 중의원에서 날치기 통과시킨 후 한 달 동안 격렬한 대중투쟁으로 발전했다.
대중은 경찰 수백 명을 동원한 날치기를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운동은 ‘안보조약 저지’와 함께 ‘내각 총사직’, ‘국회 해산’도 요구했다. 미조직 대중의 참가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1960년 4월 한국에서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한 사건[4월 혁명]도 일본의 대중투쟁을 고무한 한 요인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연일 항의 시위가 열렸다. 도쿄에서는 수만~수십만 명의 시위대가 국회의사당과 총리 관저를 포위하는 시위를 벌였다. 저항이 얼마나 거셌던지 기시 내각이 한때 자위대 투입을 고려할 정도였다.
6월 15일에는 전학련 소속 학생들이 국회 진입 시위를 벌이던 중 경찰 폭력으로 여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대중의 분노에 더 불을 지폈다. 6월 18일 33만 명이 국회를 에워쌌다. 전국 대학에서는 교수들도 참가한 항의 집회가 잇따랐다.
이 투쟁은 지배자들에게 일본 민중의 강력한 평화 정서를 확인시켰다. 결국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일본 방문은 좌절됐고, 기시 내각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대중적 항의 시위는 안보조약 개정을 막아내는 데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먼저, 개혁주의 문제가 있었다. 사회당·총평과 공산당 등이 이끄는 국민회의 지도부는 이 투쟁을 국회 청원운동 방식으로 제한하려 했다.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평화적으로 돌아오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국회 주변에서 시위를 못하게 하는 규제를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 국민회의 지도부는 시위대가 깃발과 배너도 들지 못하도록 했다.
사회당과 총평은 6월 19일 하네다 공항에서 하기로 예정된 아이젠하워 방일 반대 시위도 취소시켰다. “국내 정책 문제는 뒤로 미루고 국민적인 환영 분위기를 고조시키자”는 정부의 ‘정치 휴전’ 제안에 응한 것이었다. 아이젠하워가 안보조약 개정을 위해 방문하는 것이 매우 명백했는데도 말이다.
개혁주의
전학련은 이런 국민회의 지도부의 온건함에 반발했다. 전학련은 국회 청원 방식의 투쟁이 ‘죽은 사람에게 향 바치고 돌아오는 식’이라며 ‘분향 데모’라고 비난하고, 국회의사당 진입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전학련은 의사당 진입 자체에 정치적 의미를 뒀다. 이들은 그런 행동을 통해 대중을 ‘자극’하면 대중이 혁명적으로 행동하게 될 거라고 봤다(초좌파주의). 또한, 국민회의가 주도하는 운동을 ‘소부르주아적 시민운동’이라고 폄하하면서 따로 집회를 여는 등 종파적으로 대처했다.
전학련 학생들은 매우 전투적이었지만 학생이라는 한계 때문에 개혁주의와는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운동을 건설하면서 참을성 있게 운동이 나아갈 바에 대해 주장하고 실천에서 입증해 나가는 혁명가들이 이끄는 노동계급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본의 혁명가들은 노동계급이 가진 고유한 힘을 거의 사용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 점이 이 투쟁의 가장 커다란 한계였던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은 거리 시위의 커다란 일부였다. 하지만 이것은 조직적 참가가 아니었고 개개의 ‘시민’들로서만 참가한 것이었다.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 방식 ― 이윤을 공격하는 ― 이 실질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실종된 고리
총평은 6월 동안 세 차례 총파업을 벌여 노동자 수백만 명이 파업과 직장 시위에 참가했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세 차례 ‘총파업’은 매우 제한적 수준이었다. 예컨대, ‘총파업’의 중심에 있던 국철 노동자들조차 이른 오전에 2시간 부분파업을 벌이는 데 그쳤다.
이윤 체제를 멈출 노동자들의 잠재력이 현실화되지 못한 것, 그리고 이를 위한 혁명적 정치조직이 부재했던 것이 1960년 안보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실종된 고리였다.
지난 2012년 핵발전소 재가동에 맞서 총리 관저 앞에서 10여만 명이 시위를 벌이자, 많은 이들이 과거의 안보 투쟁을 떠올렸다. 안보 투쟁 이후 50여 년 만에 이런 규모의 대중 시위는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소개되는 안보 투쟁 관련 글들을 보면, ‘신좌파’나 ‘시민운동’과 같은 ‘새로운 운동 주체’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큰 의의를 두고 안보 투쟁을 평가하는 이들은 많지만(실제로 일본의 진보운동은 일찍이 1960년대부터 풀뿌리 시민운동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 투쟁의 진정한 약점(노동자들의 이윤 체제 공격의 부재)을 지적하는 이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일본 평화운동이 극복해야 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최대 약점이다.
이 약점이 극복되려면 일본 노동운동이 1950년대에 겪은 패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투쟁성을 회복하는 일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동시에 노동자 운동의 잠재력에도 주목하는 진정한 좌파가 성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