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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회주의자가 전한다:
그리스 노조 지도자들이 특별히 더 전투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에서는 지난 5년 동안 긴축에 반대해서 서른 번이 넘는 총파업이 벌어졌고, 이는 연초에 시리자가 집권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사회주의자들이 기층에서 꾸준히 개입한 결과라고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SEK)의 활동가 니코스 루도스가 전한다. 이 글은 경제 위기의 비교적 초입이었고 사회당이 집권하고 있던 2010년 11월에 발표됐다.

가장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은 긴축 정책에 맞선 투쟁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정부가 긴축을 선언하자마자 바리케이트가 쌓이고 전투가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럴 까닭이 없었다. 자본주의 위기 자체가 질질 끌리며 장기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므로 그에 맞선 반격도 장기적 관점으로 봐야 한다.

많은 그리스인들에게 경제 위기는 충격이었다. 친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경제 위기를 마치 기상이변처럼 설명한다. 즉,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조용히 숨죽이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경제 위기 초입인 2009년 12월에는 정부를 믿고 따르자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과 결별하게 됐느냐는 것이다.

그런 결별 과정은 자동으로 일어난 일도, 순전히 자발성에 의해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사회 운동은 결코 통째로 전진하는 법이 없다. 노동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노동운동의 가장 선진적인 부문이 다른 부문을 투쟁에 끌어들이려 하고, 관료들의 훼방을 극복하며 투쟁의 본보기를 만들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리스의 노조 관료가 유럽 다른 나라의 관료들보다 더 전투적이거나 좌파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당 소속 간부들이 대부분의 노조를 통제한다. 사회당은 2009년 10월에 집권하자 한동안 파업을 벌이지 말라고 노조들을 설득했다. 사회당 정부 하에서 일어난 첫 파업은 총연맹급 노조가 아니라 교사노조의 특정 지역 지부가 벌인 파업이었다. 이 파업의 압력을 받은 교사노조 전국 지도부는 전국적 3시간 파업을 선언했다. 이후 도미노 효과처럼 다른 작은 노조들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병원노조 지부들이 파업에 나서고, 뒤이어 공산당이 이끄는 노조들이 참가했다.

2009년 12월 17일 파업에 참가한 노조들은 그리스에서 가장 취약한 노조도 아니었지만, 가장 강한 노조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투쟁한 경험이 있고 좌파, 특히 반자본주의 좌파가 강력하게 자리 잡은 노조들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2009년 12월 17일 파업은 중요했다. 더 큰 노조들을 끌어들이며 성사됐다는 점에서도 중요했지만, 긴축에 맞서 싸우려면 투쟁을 아래로부터 조직해야지 상부의 지침을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많은 활동가들에게 분명히 보여 줬다는 점에서 더 중요했다.

이후 양대 노총이 총파업을 호소하자 이 점이 더 분명해졌다. 더는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었던 두 노총의 지도자들은 파업을 선언하면서도 조합원들을 제한적으로만 동원할 심산이었다. 그래서 노조가 손실을 입으면 가장 전투적인 노조와 좌파들에게 책임을 물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노총 지도부의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조합원이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다.

여기서도 자발성은 여러 요소의 하나였을 뿐이다. 변화를 낳은 진정한 동력은 몇몇 작업장의 노동자들이 난생 처음으로 피켓 라인을 조직해 최대한 많은 동료들을 시위 현장에 데리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집회 참석률은 작업장마다 달랐는데, 집회 참가를 직접 조직하려는 노동자 2~3명이 작업장에 있느냐 없느냐가 그 차이를 낳은 주요 요인이었다.

2010년 5월 5일 총파업 때 그리스노총 위원장은 연단에 섰지만 엄청난 야유 때문에 결국 연설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규모가 큰 노동조합, 즉 철도·전력·통신·지방정부 노조들과 사회당이 통제하는 노조에 속한 노동자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노동자들은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면서 지도자들이 설정한 한계보다 더 나아갈 자신감을 갖게 됐다.

지금까지는 수십만 명이 파업에 참여하고[양대 노총의 조합원은 모두 73만여 명이다] 십만여 명이 거리 시위에 나와 의회를 거의 에워싼 5월 5일 총파업이 투쟁의 최고조였다. 그러나 5월 5일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더 작은 규모의 파업이 여럿 있었다. 정부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후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정부는 5월 5일과 비교하면서 ‘그때조차 국회 포위에 실패했잖아? 그러니까 그 이상의 투쟁은 불가능해’ 하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불장난은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5월 5일 총파업 이후 그리스 노동계급 안에서는 한층 더 복잡한 움직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첫째, 그 투쟁의 정치적 효과가 엄청났고 심지어 정부 최상층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회당 의원 3명이 긴축에 반대하는 표를 던져서 제명당했다. 심지어 신민당 의원들도 긴축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이는 그리스의 정치적 불안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둘째, 파업을 거치면서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이 이기려면 더 전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7월 1일 버스 노동자들은 노조의 파업 지침도 없었는데 버스 운행을 거부했다. 임금이 하루 늦게 지급됐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파업을 벌이며 한 줄 논평도 없이 월드컵 경기 일정만 송고했다.

화물차주의 파업도 중요한 사례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중간계급이다. 그런데도 화물차주들은 법원의 업무 복귀 명령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정부가 차량을 압수하겠다고 윽박질렀는데도 파업을 이어갔다. 이는 결과적으로 철도노조와 전력노조의 지도부가 투쟁의 판돈을 키우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노조 지도부가 법원의 업무 복귀 명령을 핑계 삼아서 파업을 철회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셋째, 5월 5일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새로 눈뜨게 됐다. 정부는 당일 시위에서 은행원 3명이 비극적으로 숨진 것을 이용해서 불안감을 부추기고 투쟁이 전진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다. 노조는 경찰·정부·사측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급진화한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이런 급진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재무 장관은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금 개혁안 준비를 위해 6개월 정도의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는데, 6개월 뒤에는 우리가 그 개혁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외국에서 보면 마치 그리스에서 전투적 파업이 잇따라 일어나기만 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내부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부침 없이 투쟁이 순조롭게 성장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의식이 바뀌는 과정, 정치적 학습 과정, 노조 관료에 맞선 조직적 대응이 있었다. 이 모든 일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이 몹시 중요했다.

이런 투쟁을 전개할 때,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경제 위기의 기원과 성격을 놓고 토론하는 것이 중요했다. 향후 사태 전개를 예상하고 지배자들의 선전을 반박하려면 현장의 활동가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으로 무장해야 한다.

또한 총파업에 이민자들이 참가한 것도 사회주의자들이 노력한 결과였다. 이는 인종차별이 긴축 반대 투쟁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선진적 노동자들이 진정한 현장 조합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게 돕고 관료가 투쟁을 뒷받침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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