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마저 사라지고 있는 개혁
〈노동자 연대〉 구독
헌법재판소의 수도 이전 위헌 판결 이후 자신감을 얻은 우파는 열린우리당의 개혁 법안들이 “하나같이 헌법 소원 대상”이라며 공세의 고삐를 죄고 있다.
우파의 이러한 공세에 더 밀려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 이해찬의 ‘야당 폄하’ 발언의 배경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호루라기’를 불어 잠시 흐름을 끊은 것과 같다.”(열린우리당 관계자)
압력은 오른쪽으로부터만 오지 않았다. 우파들이 “좌파적 정책”이라며 광분하는 ‘개혁 법안’들에 대해 왼쪽에서는 “사실상 개혁 포기이며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불만이 불거졌다.
그러므로 ‘호루라기’는 껍데기뿐인 개혁에 실망한 왼쪽 지지 기반의 이탈과 반발에 제동을 거는 효과도 노렸다.
노무현을 대신해 “총대를 멘” 이해찬은 우파의 반동과 민주화 추세 역전에 대한 대중의 경각심에 기대는 낯익은 방식으로 양극화 압력을 무마하려 들었다. 〈조선〉, 〈동아〉에 대한 비난이 오랜만에 다시 등장했다.
진보진영 일각에서 “반(反)수구냉전 전선으로 결집하는 것이 우선”(〈민중의 소리〉 9월 10일치 사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고, 심지어 민주노동당 지도부 일부에서도 “반한나라당 공동전선의 필요성”(김창현 사무총장)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반면, 이해찬의 경고에도 우파들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지금이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의 일대격전, 일대 아마겟돈으로 치닫는 형국”이고, “한편의 막판 뒤집기”를 위해 “과감히 치고 나가야 한다”(〈조선일보〉 류근일)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었다.
4일 열린 ‘이해찬 총리 망언 규탄 및 파면 촉구대회’는 이들의 역겨운 입장을 그대로 드러냈다.
“빛나는 역사를 기록했던 시기를 냉전수구꼴통으로 분류하며 지배세력을 교체하겠다는 이 막가파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쌀푸대를 주는 ... 이들(현 정부)이야말로 냉전수구 꼴통세력”이다.(한나라당 김문수)
우익 선동은 5일 《월간조선》의 조갑제가 주최한 ‘이론무장을 위한 대강연회’에서도 계속됐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말하는 진보는 ‘사회발전’이 아니라 ‘역사적 반동’ … 민주노총과 같은 극소수의 귀족노조를 지지하고 … 교육평준화를 주장해 강남 8학군 학생들만 좋은 대학에 가게 하는 게 386이다.”(〈바른사회를 위한 시민연대〉 홍준표)
국가보안법의 “글자 한두 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했다가 〈조선일보〉에게 “기회주의”라는 핀잔을 들었던 박근혜도 이번에는 “끝을 보이는 모습을 보이겠다”며 팔을 걷고 나섰다.
기세등등한 우파의 영향으로 정통부는 국정원과 경찰청의 요청을 받아 해외에서 운영되고 있는 ‘친북’ 사이트 31곳을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200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지난해 말 인권단체의 반발로 무산됐던 테러방지법 제정의 재추진을 결정했다. 10월 28일에는 홍익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김상민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됐고, 27일에는 한총련 조통위 의장이었던 이동진 씨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부자를 없애면 우리가 잘 산다 … 는 식의 공산당 사고에 빠져 있다”(박홍)는 기득권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부자들과 기업을 위한 정부 정책들이 쏟아졌다.
기업도시특별법, 한국판 ‘뉴딜’ 정책 등 재벌과 기업들에게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특혜를 주는” 법안이나 계획들이 속속 국무회의를 통과하거나 추가 발표됐다.
“땅부자, 집부자”에게 세금을 물려 조세 평등을 실현하겠다던 종합부동산세는 곳곳에 구멍이 뚫려 넝마가 됐다. ‘조세저항’을 이유로 과세대상은 절반으로 줄었고, 거래세는 오히려 절반 가까이 삭감됐다. “투기만이라도 철저하게 잡겠다”(5일 MBC 라디오 〈여성시대〉)더니 노무현은 되레 지난 9일 부동산 투기 억제정책 완화 방안을 내놓았다.
노무현은 또 부시의 재선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부시와 친미 수구 세력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달 19일로 예정된 부시와의 정상회담에선 또 무슨 역겨운 찬사를 늘어놓을지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경제 위기 상황에 직면해 노동자들의 고용 조건을 공격해야 한다는 사용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여념이 없다. 지금도 차고 넘치는 비정규직을 더욱 양산할 법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고, 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나 다름이 없다.”(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
지난 9일 이해찬의 사과성 ‘유감 표명’은 이렇듯 거듭된 후퇴의 당연한 결과였다. 계속된 국회 공전과 터무니없는 우익 선동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의식해 한나라당도 일단은 등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나라당 김덕룡의 말처럼 “이제 전선은 ‘4대 개혁’ 저지”라는 본게임으로 넘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우파의 공세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 박근혜도 “‘4대 개혁’ 저지를 위해 등원하는 것”이라며 “나라를 지키는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반면, 열린우리당에서는 벌써부터 4대 개혁 법안에 대해 한나라당과의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산이 높으면 돌아가고, 물이 깊으면 얕은 곳을 골라가야 한다”(이부영)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폐지 후 형법보완’에서조차 후퇴한 ‘대체입법’이 거론되고 있고, 아예 이번에 통과시키지 말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우파의 공세에 기가 질린 나머지 열린우리당은 아예 ‘4대 개혁’이라는 말도 쓰지 않기로 했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중도개혁’ 정부의 한계를 거듭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