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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개혁’이 아니라 ‘노동시장 구조 개악 저지’를 전면에 내세워야

민주노총 지도부는 올해 하반기 투쟁의 요구로 ‘사내유보금 환수 특별법 및 재벌 세습 금지법 제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검토 중이다. 그리고 11월 총파업의 핵심 요구로 ‘재벌 개혁’을 제안하려 하는 듯하다.

롯데 사주 일가의 경영권 분쟁과 삼성의 3대 세습 작업으로 재벌 개혁 여론이 확산된 것을 계기로 박근혜 정부의 ‘노동 개혁’ 프레임을 ‘재벌 개혁’ 프레임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그래서 7백10조 원으로 추산되는 3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에 과세하고, 순환출자제 금지 등으로 재벌 세습을 막고, 재벌 개혁으로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주장을 ‘재벌 개혁과 노동자·서민 살리기 5대 요구’의 첫째로 내세우려 한다.

그러다 보니 ‘노동시장 구조 개악 저지’는 ‘재벌 개혁’보다 후순위로 밀려난 듯하다. 박근혜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 개악’을 전면에 내세워 공격하겠다고 나섰는데도 말이다.

물론 매년 수십조 원씩 사내유보금을 쌓고 있는 재벌의 금고를 열어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정당하다.

순환출자제

그러나 재벌 개혁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이런 목표 달성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우선, 순환출자제 금지 등 기업 소유 구조 개편에 집중하는 재벌 개혁은 자유주의적 문제의식의 발로로, 노동자들에게는 득이 될 게 없다. 단적으로 말해, 재벌 개혁은 성공하더라도 재벌 총수 일가 수백 명이 갖고 있는 권력을 금융 자산가 수만 명에게 확대하는 것으로 끝날 뿐이다. 새누리당조차 롯데의 순환출자 구조를 문제 삼은 것을 봐도 노동계급에게는 재벌 개혁이 얼마나 부차적인 쟁점인지를 방증한다.

자본의 소유 구조 개편이 아니라 대자본에 맞선 노동자 투쟁이 대안이다. ⓒ이윤선

둘째, 재벌 개혁 요구는 비(非)재벌 자본과의 연대라는 덫으로 노동자들을 이끌기 십상이다.(자본 전체와 맞서 싸울 요량이라면 재벌 개혁 요구를 내세울 이유가 없다.)

사실, 재벌 개혁론은 재벌 같은 독과점이 없다면 시장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작동해 경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그릇된 전제를 갖고 있다. 그래서 흔히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과 함께 제시되곤 한다.(최근 ‘재벌 국유화’를 주장하고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을 제안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내에서도 이런 주장이 나온다.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의 이민수 씨는 재벌 국유화가 “중소기업 육성 정책”으로서 좋은 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재벌을 사회화(국유화)해야 하는 이유’, 〈변혁정치〉 7호). 재벌 국유화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점뿐 아니라 재벌을 국유화한 국가가 중소기업주들을 지원해야 할 것이라는 상상력이 놀랍기는 하다.)

그러나 당장, 민주노총이 하반기 주요 과제로 제시한 최저임금 1만 원,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전면 보장, 상시 업무 정규직화, 실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등을 달성하려면 재벌뿐 아니라 중소기업과도 싸워야만 한다. 중소기업을 지원하자면서 중소기업 노동자들한테 자신의 기업주에 맞서 싸우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런 점에서 재벌 개혁 요구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일관되게 싸우기 어렵게 하는 논리를 담고 있다.

셋째, 비(非)재벌 자본과의 연대라는 발상은 실천적으로 기성 야당과의 연대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재벌의 세금을 대폭 늘리는 데서나 노동시장 구조 개악을 저지하는 데서 새정치연합과의 연대는 전혀 믿을 게 못 된다. 새정치연합도 핵심 기반이 자본가 계급이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에도 새정치연합은 박근혜 정부와 마찬가지로 재정 감축 논리를 내세우며 공무원노조에 공무원연금 삭감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권유한 바 있다. 새정치연합은 속도와 방식 등에서 이견이 있을지언정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점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재벌에게 약간의 세금을 더 걷으려고는 하고 있지만, 총수 일가의 소유권 자체를 공격하거나 재벌 이윤 중 상당 부분을 회수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새정치연합에 종속되지 않고 재벌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려면 아래로부터의 독립적 계급 행동이 필수적지만, 재벌 개혁 요구는 독립적 계급 행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넷째, 이 모든 요인들 때문에 현 시점에서 민주노총이 ‘재벌 개혁’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행동을 고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자기 조합원들과 대다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생활조건이 공격받는데도 지금부터 단호하게 파업을 설득하지 않고, 재벌 개혁을 내세워 국민적 호평을 얻으려는 것은 계급을 초월한 포퓰리즘적 태도다. 민주노총이 ‘재벌 개혁’을 중심으로 국민투표를 제안하려는 것도 이런 발상의 일환이기도 하다.

포퓰리즘

게다가 재벌 개혁 요구를 앞세우다 보면, “재벌의 세금을 일부 올릴 테니 노동자들도 ‘노동 개혁’을 받아들이라” 식의 주장을 반박하기 힘들다. 청년 실업 등이 노동자 책임이 아니라 재벌을 비롯한 기업주와 정부 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시장 구조 개악 반대를 분명하게 앞에 내세워야 한다.

민주노총의 8~9월 주요 일정은 국정감사 대응, 주요 정당 설명회, 홍보전 등 재벌 개혁을 홍보하는 데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노동시장 구조 개악 강행 시 즉각 총파업” 방침을 유지하기로 했지만, “강행 시점”을 언제로 볼지 모호할 뿐 아니라 총파업 조직을 위한 8~9월 계획도 구체적이지 않다.

최저임금 1만 원, 정규직 확대, 법인세 인상처럼 재벌의 이윤과 권력을 공격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는데도, 온갖 함정으로 둘러싸인 재벌 개혁 요구를 전면에 내세울 이유가 없다. 임금피크제 등 노동시장 구조 개악으로 가장 큰 득을 보는 것도 재벌들이다.

사실 재벌의 이윤뿐 아니라 소유권까지 공격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재벌에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이 갖고 있다. ‘임금피크제 반대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이익일 뿐’이라며 이를 내세우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뒤로 미뤄 놓아서는 이들이 투쟁에 나서도록 설득하고 북돋을 수 없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재벌 개혁이 아니라 노동시장 구조 개악 반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총파업을 설득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시장 구조 개악을 막는 것뿐 아니라 재벌의 이익을 환수하는 데서도 더 효과적이다.

재벌 개혁은 왜 공상적인가?

김대중 정부는 IMF 위기 이후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 개혁에 훨씬 못 미치는 종류의 재벌 개혁을 추진했지만, 그 표피적인 ‘개혁’조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지난 십여 년간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더욱 강화됐다.

이처럼 소수 거대 자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라고 《자본론》에서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집적은 개별 자본이 축적되고 그래서 더 크게 성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소규모 기업은 대기업이 되고 대기업은 거대 기업이 된다.

“집중 운동”

마르크스는 집적의 심화는 자본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켜 “집중 운동”을 낳는다고 봤다. 집중은 일부 자본이 제거돼서 살아남은 자본이 전체 체제의 더 큰 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현재 기능하고 있는 자본들의 배분을 변경”하는 것으로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의 수탈이며, 다수의 소자본을 소수의 대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대자본은 더 많은 노동자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두게 되는데, 이는 또한 “사회적으로 결합되고 과학적으로 편성된 생산과정의 창출”이기도 하다. 요컨대 자본의 집중은 생산 능력의 비약적 발전의 원동력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반대하고 다수의 소자본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공상적일 뿐 아니라 반동적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의 소유구조는 진정한 관심사가 아니다. 대자본에 맞선 투쟁으로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고, 더 나아가 노동자 국가를 통해 집중된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통제해 대중의 삶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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