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합의 이후:
불안정을 낳는 정치적 지뢰는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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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4일 비무장지대(DMZ) 지뢰 폭발 사건을 계기로 고조됐던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8월 25일 남북 고위급 접촉의 합의로 일단락됐다. 8월 10일 박근혜 정부가 지뢰 폭발 사건이 북측 소행이라고 발표하고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 후 긴장은 급속히 높아졌고, 불과 열흘 만에 DMZ에서 남북이 포격을 주고 받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됐다. 이번 사건은 한반도에 긴장이 계속 누적되면, 작은 우발적 사건 하나만으로도 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줬다.
한때 “준전시상태” 운운하며 강경 일변도로 나갔던 남북 당국들은 얼마 안 가 고위급 접촉으로 극적인 합의를 봤다. 냉전 해체 이후 한반도에서는 긴장이 고조되다가 극적으로 유화 국면으로 전환되는 상황이 숱하게 반복됐는데, 이번 사태도 결국 그 익숙한 패턴을 따른 것이다.
우파들은 이번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북한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북한의 의도적인 ‘선제 도발’(지뢰 매설, 선제 포격) 때문에 한반도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비롯해 남북 간에 벌어진 숱한 무력 충돌의 경험을 돌아보건대, ‘누가 먼저 총의 방아쇠를 당겼는가’에 초점을 맞춰서는 사태의 진정한 배경과 원인을 제대로 짚어낼 수 없다. 충돌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자면 동아시아 주요 각국의 역학관계와 갈등이라는 전체 맥락을 봐야 한다. 당장 DMZ에서 남북 간 포격이 벌어진 8월 20일 즈음에, 남쪽에서는 대규모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훈련 프로그램 중에는 대북 선제공격 개념을 담은 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8월 23일 중국과 러시아의 해군도 동해에서 미일동맹을 겨냥한 대규모 연합군사훈련을 시작했다. 북한의 ‘도발’을 이런 상황과 떼어놓고 봐서는 안 된다.
누가 한반도에서 위험을 키우는가?
지금 한반도 주변에서 한편으로 미국·일본과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 치열하게 지정학적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은 군비 증강 등 군사력을 키우는 데 여념이 없다. 미사일 같은 전략 무기를 개발하는 문제만 봐도, 이 국가들은 북한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주변 강대국들의 위험한 행보에 북한은 커다란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과 일본 등은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대북 제재와 군사 압박을 가해 왔다.
미국 정부가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할 조처들을 실행하는 데서 북한 ‘위협’론은 가장 좋은 핑계였다. 중국을 겨냥한 미사일방어체계(MD)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전진 배치할 때도, 여기에 한국을 편입시킬 때도,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약정을 체결할 때도, 사드(THAAD)의 한국 배치를 타진할 때도, 한반도 인근에서 한·미·일 연합군사훈련을 진행할 때도, 일본 아베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할 때도, 언제나 미국의 명분은 북한의 ‘위협’이었다.
이런 압박에 반발해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 오는 한편, 관계 정상화를 위한 미국과의 대화를 원했다.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고조됐던 긴장이 가라앉은 후, 북한은 기회가 될 때마다 미국에 대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이 제안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악행(핵·미사일 개발)에 보상하지 않겠다’면서 북한의 선先 핵 포기를 요구하며 “처벌적 대북 정책”을 고수했다.
대화
오바마 정부가 이란과의 핵협상에서 합의를 이끌어내자 일각에서는 다음 차례는 북한이 아니냐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이란과 북한은 다르다’며 기존의 대북 정책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지난 4월 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은 이렇게 지적했다. “중국을 견제하고 압박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하는데, 북핵은 그에 대한 명분이 된다는 점에서 미국으로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이런 행보는 북한과 중국의 반발을 초래했고, 이것은 한반도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도 일조했다. 박근혜는 한미동맹 강화 같은 친제국주의 정책에 우선순위를 부여했기에, 미국의 대북 압박에 협조하고 있다. 북한에 대화를 제안할 때조차 박근혜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라는 북한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했다. 박근혜는 국내 정치·이데올로기의 필요로도 ‘북한 문제’를 이용하곤 했다.
이처럼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진정한 ‘지뢰’는 동아시아 제국주의 간 갈등과 한·미·일의 대북 압박이다.
합의 과정과 이후 전망
이렇게 한반도에서 긴장이 누적된 결과가 바로 지뢰 폭발 사건과 8월 20일 DMZ 포격 사태였다. 바로 이때 북한이 남측의 대북 확성기 방송을 향해 불필요하고 과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포격 사태가 벌어진 직후 대화를 제안한 것을 보면, 북한은 이번 긴장 상황을 협상을 위한 지렛대로 삼고자 했던 듯하다. 그리고 자신들과의 대화를 계속 외면하는 미국에게도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런 행보는 늘 그랬듯이 ‘역효과’를 냈다. 남북이 ‘강 대 강’으로 부딪혀 긴장이 고조됐다. 긴장이 한창일 때 박근혜 정부는 미군의 “전략 자산(B-52 전략폭격기, 핵잠수함 등)”을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다고 을러대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 DMZ 위기 때 한미 양국은 “한미 공동 국지도발계획”을 가동시켰고, 이에 따라 동두천에 주둔한 주한미군 제210화력여단이 긴급 지원 태세를 갖췄다.
물론 이번 사태가 전면전으로 확전되긴 어려웠다. 한반도를 둘러싼 불안정의 핵심은 미국과 중국의 제국주의적 경쟁이다. 비록 이 두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미국과 중국 모두 동아시아에서 전면적 충돌을 감수할 의사는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미국과 중국 모두 한반도 긴장이 심각한 무력 충돌로 발전해 자신들까지 휘말려 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은 사태 초기부터 남·북 양쪽의 자제를 촉구하며 적극 개입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8월 24일 〈조선일보〉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 왔지만 내심으로는 대화로 수습하기를 희망했다고 보도했다.
박근혜 정부도 이 상황을 장기간 끌고 가는 것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우발적 사건으로 더 큰 ‘사고’가 일어나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질 수 있으니 말이다. 한국 지배계급 내에서 박근혜 정부가 대화에 나서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얘기도 점차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남북 고위급 접촉이 있었고 잠정적인 합의에 도달했던 것이다.
신호탄
이번 고위급 접촉으로 긴장은 일단 완화됐고, 이산가족 상봉 등으로 당분간 유화 국면이 전개될 듯하다. 박근혜 정부가 각종 인도적 지원과 경원선 복원 사업 등을 북한에 제안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이번 합의는 남북 간에 놓인 첨예한 쟁점들을 다루지 않거나 다음 회담으로 미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남북 대화를 향한 일각의 기대와 달리, 한반도에서 일시적 대화 국면은 긴장이 다시 쌓이는 새로운 순환 과정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인 경우가 빈번했다.
무엇보다 북·미 관계가 좋아질 조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지 오바마 정부는 북한에 대화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이 오바마 정부의 외교에서 우선순위에 올라가 있지도 않다. 설사 북·미 간에 서로 의중을 떠보기 위한 탐색적 대화가 있더라도, 그 대화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삼각 동맹의 강화를 계속 추진할 것이다. 예컨대 조만간 사드(THAAD)의 한국 배치가 다시 수면 위로 오를 수 있고, 한·일 군사협력의 강화도 다시 의제로 오를 수 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중국뿐 아니라 북한에도 위협적인 일들이다.
박근혜는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하면서도 무게중심은 한·미·일 삼각 동맹의 강화에 협력하는 데 둘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반발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도 계속 진행할 것이다. 북한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박근혜 정부는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것도 북한을 자극할 것이다.
그리고 남북 간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도 변수가 많다. 예컨대, ‘5·24 제재 조처’의 해제를 둘러싸고 남북 간에 이견을 해소하기가 만만치 않다. 최근 중국 경기 둔화에 관한 우려가 커지고 있어, 대중국 교역에 많이 의존해 온 북한으로선 더더욱 5·24 조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등에 관심이 많아졌을 테다. 한국에서도 여권 안팎에서 5·24 조처를 해제하거나 완화하자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5·24 조처 해제의 전제 조건으로 천안함 사건에 관한 북한의 “책임 있는 조처”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남북 관계를 다시 얼어붙게 만들 불안 요소들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머지않아 한반도에 새롭게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이 올 공산이 큰 것이다.
이번 사태에 관한 진보진영의 견해들
정의당은 8월 20일 포격 사태 직후 여러 차례 관련 입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의당은 북한의 “무모한 도발”을 “강력히 규탄”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심상정 대표는 8월 21일 상무위원회 모두 발언에서 “우리 군은 무모한 도발에 대해선 단호히 대응하는 한편, 철통 같은 대비태세를 확립해 북한의 도발 의지를 봉쇄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주문하며 “튼튼한 안보를 확립”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8월 22일 정의당 전국위원회에서 심상정 대표는 “[북한의] 추가 도발이 있을 때는 단호한 응징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정의당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남북 대화가 필요하다고 촉구했지만, 사태의 주된 책임을 북한에 물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정부의 강경 대응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됐다. 이래서는 향후 “튼튼한 안보”를 내세우며 정부가 내놓을 호전적 조처들에 정의당이 일관되게 반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냉전주의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커지자,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자국 지배계급에 협력해 소련에 반대하고 냉전주의에 힘을 실어준 바 있다. 정의당의 최근 행보는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냉전주의를 연상케 해 우려스럽다.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갈등이 커지고 남북 관계가 악화하면서, 정의당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지정학적 갈등에서 자국 지배계급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압력에 타협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노동당은 처음에는 양비론에 가까운 견해를 내놓았다. 지뢰 폭발 사건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강경책에 반대했지만, 동시에 북한의 “모험주의”도 거의 같은 비중으로 비난했다. 그러다가 8월 20일 상호 포격 사태가 터진 직후에 나온 논평에서는 “북한의 군사 도발 중단[을] 촉구한다”며 북한을 더 강도 높게 비난했다. 제국주의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 없다 보니, 남북 양측의 호전적 (군사) 행동을 모두 동등한 수준의 문제라고 보는 양비론이나 때로는 북한을 더 비난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당은 강령에서 “평화주의”를 표방하며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한반도 불안정 문제에서 노동당이 미국과 남한 지배자들을 주된 위험 요인으로 보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미국 등 강대국 중심 국제 질서를 극복하고 … 평화협력의 국제 연대를 실현”할 수 있을까?
물론 북한 지배 관료들의 행동은 진정한 반제국주의 투쟁이 아니고 좌파들은 이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좌파적인 스탠스를 분명히 한 채 그래야 한다. 즉, 명백히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한반도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더 큰 악惡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제주 강정 등지에서 평화를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정당성을 훨씬 더 잘 옹호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반자본주의
오늘날 한반도의 불안정은 제국주의 경쟁과 갈등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한반도 불안정에는 주변 제국주의 국가들의 첨예한 이해 다툼이 얽히고설켜 있다.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심장부로 떠오른 동아시아에서 세계 주요 열강(미국, 중국, 일본 등)들이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의 근저에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더 많은 잉여가치 획득을 둘러싸고 개별 자본들이 벌이는 경제적 경쟁과 국민국가들의 지정학적 경쟁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남북 당국 간의 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 긴장 완화와 평화를 실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남북 대화의 당사자들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에 몰두하고 있으며, 모두 남북 노동계급의 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동자 운동이 남북 간 대화가 성사되기 위해 애쓰거나 그 대화가 잘 유지되도록 뒷받침하는 데 복무해서는, 제국주의에 맞서 한반도 평화를 실현할 진정한 동력(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을 제대로 발현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궁극으로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자 운동이 성장해, 국내 지배자들에게 맞서면서 한반도 불안정의 원인인 제국주의에도 도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