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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사랑, 그리고 가족 기획연재 ①:
가족은 변치 않는 인간 본성의 산물이 아니다

최근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를 보면 당시 가족이 현대와는 상당히 다르게 구성되는 걸 볼 수 있다. 왕건의 셋째 아들은 배다른 자기 여동생에게 청혼을 한다. 넷째 아들은 배다른 형의 딸, 그러니까 자기 조카와 혼인한다. 현대에서 고려시대로 온 여자 주인공은 한사코 거부하지만, 당시 남자가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왕건은 무려 29명의 부인을 뒀다.

이런 현실을 오늘날 관념에서 보자면 근친상간과 치정이 뒤얽힌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지배계급의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한 수단이었다. 또, 남녀가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지배계급 여성이 족내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결혼과 가족에 대한 관념은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오늘날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가족에 대한 관념들(낭만적 사랑으로 인한 남녀의 일 대 일 결합, 평생의 동반자, 여성이 주로 가정의 일을 담당하고 남성은 주로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 가족은 사적인 공간이라는 생각 등등)은 불과 1~2백여 년 전에 생겨났을 뿐이다.

그러나 가족이 변치 않는 인간 본성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흔하다. 보수주의자들은 오늘날 핵가족을 생물학적으로 적합한 제도로 설명한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 수유를 하므로, 공격적 · 경쟁적 · 위험 선호적 특징이 있는 남성이 여성을 '외부세계로부터 보호'하고 '부양'하기 위해 가족이 생겼다고 본다. 진화심리학자들도 이런 주장을 편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억압이 인류 사회의 보편적 특징이라고 보며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서 가족을 만들었다고 여긴다. 보수주의자들과 비슷하게, 가족을 변치 않는 인간 본성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족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남성이 지배하는 가족은 인류 사회의 보편적 특징이 아니라 계급사회가 등장하면서 나타났다. 인류 역사에서 95퍼센트의 기간에는 계급과 국가가 없었고, 여성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원시 공산주의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인류학자 모건의 연구를 바탕으로 가족과 사유재산, 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원시 공산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기원》은 수렵 · 채집 사회와 초기 도시국가에 관한 유용한 자료가 발견되기 훨씬 전에 쓰여서(1884년 출간) 몇몇 서술에 혼란과 오류가 있다. 그럼에도 그 핵심 명제는 오늘날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았는데, 현대 인류학과 고고학의 발전으로 나타난 새로운 증거들은 《기원》의 핵심 명제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다.

계급과 국가가 없던 선사시대는 흔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그려진다. 힘과 능력이 있는 남성들이 전쟁을 통해 여성을 쟁취하고 우월한 자손을 남기면서 인류가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모건은 ‘원시씨족의 자유, 평등, 박애’에 관해 언급했고 엥겔스도 당시 인류는 ‘본질상 집단적’이며 ‘소비도 … 공동체 내부에서 생산물의 직접적인 분배 하에서 진행됐다’고 말한다.

약 1만 년 전까지 인류사회는 주로 채집과 수렵의 방식으로 살아갔다. 수렵 · 채집 사회는 불과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 곳곳에 남아 있었고, 지금도 소수 존재한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사회를 연구함으로써 인류 역사 90퍼센트에 해당하는 시기에 우리 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수렵 · 채집 사회에서 인류는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부모와 자식은 개별화된 가족 단위가 아니라 친족 공동체 체계에서 살았다. 부부는 느슨하게 조직됐고 양육은 공동체 모두가 책임졌다. 배우자가 떠나도 자신이나 자녀들의 생계가 갑자기 위협받는 일이 없었다.

성별 분업이 존재했지만(남성은 주로 수렵, 여성은 주로 채집), 이것이 여성의 열등한 지위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채취자(대개 여성)는 가장 안정적인 식량을 제공했고 수렵자(대개 남성)는 가장 귀중한 식량을 제공했다. 여성이 공동체의 식량 제공에 핵심적 구실을 했기에 여성은 남성과 평등한 지위를 누리며 공동체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가했다.

현존하는 수렵 채집 사회. 수렵 채집 사회는 남녀가 평등하고 오늘날과 다른 다양한 성의 관계가 존재했다 ⓒ사진 출처 AinoTuominen

이런 사회의 가치관은 오늘날 통용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매우 달랐다.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17세기 초에 북아메리카의 몽타녜-나스카피 족 인디언들을 처음 만났을 때 여성들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 선교사가 나스카피 족 남자에게 아내를 더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그녀가 낳은 아이들 중 누가 자기 자식인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들 프랑스인은 자기 자식만 사랑하지만 우리는 부족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여러 부족에는 '두 영혼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성으로 살아간다. 이런 경우 '여자의 일'을 하는 남자가 '남자의 일'을 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고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1890년대 인디언 사무국의 한 직원이 ‘두 개의 영혼 여성’인 오이 티시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고 남자의 옷을 입혀 남자의 일을 시키려고 하자, 크로우족 사람들은 매우 분개했고 결국 그 직원은 쫓겨났다.

고고학자인 캔트 플래너리와 조이스 마커스는 "만약 수렵 · 채집인들이 오늘날의 사회를 운영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질문하며 이렇게 상상한다.

"다양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용은 결혼에까지 확장될 것이다.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도 ... 용인될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 '두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결혼이 허용된 것처럼 동성 결혼이 허용될 것이다."

수렵 · 채집 사회의 행동 양식이 현대와 이렇게 달랐던 이유는 계급과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먹고살기 위해 서로 긴밀히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리의 성원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모든 것을 들고 끊임없이 이동했기 때문에 어느 한 성원이 부를 축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가족의 탄생

자연을 이용해 먹고사는 인간의 능력이 발전하며 상황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자연에서 나는 식용 식물을 채취하는 대신 농작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냥하는 대신에 길들이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 ‘신석기 혁명’의 영향으로 정착 공동체, 최초의 영구적 마을, 땅을 파고 일굴 수 있으며 동물의 가죽을 자르고 벗길 수 있는 새로운 기구가 필요해졌고 또 가능해졌다. 가뭄과 흉년을 대비한, 약간의 잉여생산물이 생겼고 이를 위한 저장소나 저장용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때도 평등주의와 공유는 일반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신석기 혁명’을 바탕에 두고 일어난 ‘도시 혁명’은 상황을 더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정착 생활이 일반화되면서 인류는 경작지를 개간하고 관개수로를 짓고 보수하는 일을 하게 됐다. 쟁기, 수로, 저수지 등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엄청난 생산성 증대를 가져왔다.

새로운 기술은 사람들의 협동 형태를 바꿨다. 우선 성별 분업이 강화됐다. 쟁기를 사용하는 노동은 임신했거나 수유하는 여성에게는 벅찬 중노동이었다. 게다가 밭을 일구려면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여성들은 더 많은 임신과 출산, 수유를 해야 했다. 여성은 생산에서 부차적 지위로 밀려났다. 상설적 관개 시설을 건축하고 보수하려면 수십 가구나 수백 가구의 협동이 필요했다. 이것은 직접 노동하는 사람과 그 노동을 감독하는 사람의 분업을 부추겼다. 외부와 접촉해 교환하고, 훔치고, 빼앗을 수 있는 잉여가 생겨나면서 잉여를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전쟁도 빈번해졌다.

이런 과정의 결과 처음으로 계급 분화가 일어났고, 착취가 생겨났고, 소수의 사회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무장한 사람들의 집단인 국가 기구가 생겼다.

잉여를 통제하는 권한을 가진 소수의 특권층은 이 부를 자손에게 상속하는 데 관심을 두게 됐다. 일부일처제는 특권층의 부를 소수에게만 남겨두도록 보장하는 방법으로 주목받았다. 씨족에서 가족이 분리됐고, 일부일처제가 보편적 제도로 발전했다. 엥겔스는 계급사회의 등장과 함께 여성이 남편에 종속되는 가족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을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말했다.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결혼에도 변화가 생겼다. 지배적 친족 집단들은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쌓음에 따라 더 제한된 사람들하고만 혼인을 하게 됐다. 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족외혼을 버리고 형제나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는 경우(족내혼)도 있었다.

결혼이 지위와 재산을 물려주는 최고의 수단이 됨에 따라 남녀 모두 행동에 커다란 제약을 받게 됐다. 계급 발생 이전에는 개인 의사에 따라 결합과 분리가 자유로웠지만 이제는 대부분 부모가 선택한 사람과 결혼해야 했다.

여성에 대한 통제는 훨씬 가혹했다. '부정한' 혈통의 아이를 낳아 가문에 '이질적인 이해관계'를 들여올 수 있으므로 여성은 성적인 면에서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아시리아 법은 혼전 순결을 중시했고 ‘간통’을 저지른 기혼 여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여자가 상속자가 되면 바로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과 결혼해야 했다.

모든 고대 국가에서 합법적 아이와 사생아의 지위는 엄격하게 구별됐다. 승인받지 못한 결합에서 태어난 아이는 많은 경우 노예가 되거나 굶주림에 시달렸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 전락했고 성적 쾌락을 제공하거나 후계자를 생산하는 일종의 장신구처럼 취급됐다. 부를 과시하기 위한 미의 기준이나 행동 기준도 생겼다. 중국에서 어린 여자 아이들의 발을 묶는 것(전족)은 특권층의 상징이었다.

평민들 사이의 결혼은 덜 요란하고 상대적으로 상류층에 적용되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규칙도 더 느슨하게 적용됐다. 그러나 평민들의 경우에도 결혼과 가족 구성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현실적 계산의 문제였다. 오늘날 흔한 ‘1인 가구’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들은 ‘영혼의 동반자’가 아니라 ‘노동의 동반자’였다.(물론 노예들은 따로 가정을 꾸리는 것 자체가 금지돼 있었다.)

피지배계급의 아내는 고된 노동을 했지만, 가정 내 노동에 대한 지휘권은 남편이 가지고 있었다. 남성은 가족의 생존에 필요한 조처(아내의 임신을 포함해서)들을 여성과 아이들에게 강요할 수 있었다. 글자 그대로 ‘가부장제’, 즉 다른 가족 성원들에 대한 아버지의 지배가 존재했다.

계급 사회 등장 전에는 남녀가 평등했고 다양한 성적 관계들이 있었다. 사회에 계급이 생겨나면서 여성이 남편에 종속되는 가족도 생겨나 수천 년 동안 여성을 통제하는 제도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사회에 따라 달랐고 같은 사회에서도 계급에 따라 크게 달랐다. 가족의 형태와 규범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생산 방식이 바뀌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18세기에 산업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가족이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여성의 삶과 성 규범이 크게 바뀐다. 이 과정과 그 함의에 대해서는 다음 호 연재기사에서 다룰 것이다.

주제
차별
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