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피살 명분 삼은:
미국·한국의 대북 압박 강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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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은 삼일절 경축사에서 김정남 피살과 관련해 북한을 맹비난했다. 김정남 피살 사건이 “잔혹하고 무모하며 반(反)인륜적인 북한 정권의 속성과 민낯”이라며 “제재와 압박을 더욱 강화”하고 “북한 인권 침해의 가해자(김정은!)에 대한 처벌”도 국제사회에 촉구하겠다고 밝혔다. 사드 배치를 강행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1백 년 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위대한 저항을 기념하는 날이었음에도 황교안은 일본 군사대국화를 한마디도 비판하지 않은 채, 오히려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자며 한·일 협력과 ‘위안부’ 합의의 존중을 강조했다. 김정남 피살이 박근혜 정권의 친제국주의 적폐를 옹호하고 강화하는 좋은 핑계가 된 것이다.
미국도 김정남 피살 사건을 이용해 대북 압박을 강화할 것이다. 최근 미국은 북한과의 비공식 대화를 취소해 버렸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 피살에 독가스 VX가 쓰였다고 발표하자, 이 대화를 위해 미국으로 입국하려던 북한 외교관들의 비자 발급을 거부한 것이다.
VX가 화학무기로 전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앞으로 미국이 이 문제를 북한을 압박할 또 다른 소재로 삼을 공산이 있다.
위선
미국 국무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다시 지정하는 문제를 검토한다고 언론에 흘렸다. 〈워싱턴 포스트〉도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다시 올리라고 주장하며,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회사들과 북한을 대상으로 한 금융 제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 연대〉 신문은 그동안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대북 압박과 제재를 일관되게 반대했다. 그것이 한반도 불안정을 악화시키고, 북한 노동계급에도 반감만 줄 뿐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의 대북 압박 강화에도 반대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김정남 피살 문제로 북한을 비난하는 건 매우 역겨운 위선이다. 해외에서 요인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문제에서 미국이 다른 국가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요인 암살·납치 면에서 미국은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미국의 “더러운 전쟁”만 봐도, 체 게바라 사살, 아옌데를 죽인 칠레 쿠데타 후원 등 추악한 일들이 많았다. 특히 트럼프의 미국이 외부에서 북한을 압박해 진보적 변화를 유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북한은 이미 강도 높은 제재를 받고 있지만, 이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 인권을 향상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재를 받으면서도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해 왔다.
반면 평범한 북한 주민은 제재로 큰 고통에 시달렸다. 가령 박근혜 정권은 대북 제재를 강화한답시고 홍수 피해를 입은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거부했다. 이 밖에도 제재는 북한 주민에게 유·무형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오히려 제국주의적 대북 압박은 김정은 정권이 내부 불만을 억누르는 구실이 된다.
미국은 북한 문제를 자신의 군사 행동과 동맹 강화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지금도 트럼프는 북한을 비난하며 사드 배치를 추진하고 있다. 이런 조처는 중국·러시아·북한의 반발을 부르며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긴장을 높일 것이다.
김정남 피살은 제국주의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수 없다. 제국주의적 대북 압박은 북한 주민에게 가하는 또 다른 “잔혹하고 무모하며 반(反)인륜적인” 행위다.
김정은에게 살해 동기가 없나?
북한 김정은 정권은 김정남 살해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여권명이 김철(김정남이 아니라!)인 북한 공민”의 사인은 “독살이 아니라 심장마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남한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남한에서도 김정남 피살 사건을 박근혜 정권과 우익이 이용하는 것에 주목하며 미국·남한의 각본에 따른 사건임에 틀림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의심의 동기는 겉보기로 그럴 듯하다. 국내에서 우익이 김정남 피살 사건을 정치 지형을 바꾸려는 데 이용하며 심지어 탄핵 반대 집회 동원(특히, 삼일절 우익 집회)의 소재로 삼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남한과 서방 지배자들은 각종 음모를 꾸미는 데 선수들이기도 하다. 또한 물증만으로는 이 사건이 누구의 소행인지 명쾌하게 입증되기 힘들다는 점도 의심을 키우는 데 한몫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는 허점이 있다. 김정남의 존재가 미국·남한 지배자들에게 주는 실익이 있었음을 무시한다. 그는 이복동생 김정은의 권력 승계를 공공연하게 비난했고, 따라서 서방이 북한을 비난하는 데 도움이 됐던 인물이다. 일본과 한국 언론들이 기회만 되면 김정남과 인터뷰하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까닭이다. 국정원 등이 여러 차례 김정남의 망명을 타진했다는 정황 증거도 있다.
그리고 ‘서방 음모’의 개연성이 있다고 해서, 곧장 ‘북한 김정은 정권에게 김정남 피살의 동기가 없다’는 주장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행위일 가능성이 낮음을 입증하려면 별도의 검증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그럴 일을 할 막돼먹은 정권이 아니다’ 하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북한의 주장을 철석같이 믿었다가 된통 당한 경우가 많았다. 가령 일부 진보·좌파는 일본인들을 납치하지 않았다는 북한 정권의 주장을 믿었다가, 2002년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납치를 공식 인정하고 사과해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다.
공식 후계자로 부상한 지 2년도 안 돼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한테는 통치 정당성의 취약함이 큰 약점의 하나다. 이 약점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권력 승계를 비난한 김정남이 김정은한테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을 게 틀림없다.
중국과의 관계도 봐야 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렇게 지적했다. “중국이 김정남을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김정은이]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중국과 김정남의 관계가 돈독했다고 보면, 민심의 이반 혹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정권이 교체될 경우 김정남이라는 대안이 있습니다. 김정은이 잠재적 경쟁자 김정남을 제거한 이유입니다.”(〈오마이뉴스〉)
북한 지배 관료들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그동안 경계해 왔다. 특히 북한의 대중국 경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경계심도 함께 높아졌던 듯하다. 2007년 노무현·김정일의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보면, 이미 김정일은 중국과의 경제 협력 강화로 북한이 중국의 “동북 4성” 소리를 듣는 것을 걱정했다.
이런 문제가 2013년 북한에서 장성택이 전격 처형된 배경의 하나였다. 2013년 12월 장성택 처형 직후 북한 〈로동신문〉에는 이런 논평이 실렸다. “감히 [수령한테] 도전해 나선다면 설사 피를 나눈 혈육이라고 해도 서슴없이 징벌의 총구를 내대는 대쪽 같은 사람이 … 진짜 신념의 강자[다.]” 이 말 가운데 “피를 나눈 혈육”이 김정남을 가리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그때 회자됐다.
‘김정은이 김정남 피살로 얻을 이익이 없다’는 명제를 입증하려면, 이런 지적들에 대해서도 대안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동북 4성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북한 사회는 시장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진보적 사회’라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리고 북한 경제가 이제는 안정됐고, 따라서 북한 정권도 안정돼 있어 김정남 살해 같은 도박을 할 이유가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동떨어진 섬 같은 곳이 아니다. 특히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엄청나게 커진 오늘날 북한 경제는 세계경제의 리듬과 더더욱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북한의 대중국 수출에서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무연탄 수출 가격이 국제 시세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점은 오늘날 북한 경제와 세계경제의 연동성을 보여 주는 한 사례다.
한반도 주변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가열된다는 점도 북한 지배자들에게 큰 압력이 된다. 이 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20년 넘게 경제난에 시달린 국가로서는 매우 커다란 난제다.
세계경제의 위기와 중국 경제의 성장 둔화, 날로 악화하는 제국주의 간 경쟁, 트럼프 등장으로 더 불확실해진 주변 정세 등은 북한 관료들 내부에 균열을 일으킬 요인들이다. 김정은 정권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지난해 김정은이 조선로동당 7차대회 연설에서 수차례 “일심단결”을 강조한 이면에 불안감이 엿보인다. 북한 관료들 내에 예리한 균열이 있다는 점은 여러 차례(장성택 처형 등의 사례에서) 확인됐다.
2011년 아랍 혁명은 혁명의 여파가 국경을 넘어 확산되면 시리아·리비아처럼, 독재자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국가기구를 확고히 장악한 나라에서조차 아래로부터의 반란을 완전히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줬다.
오늘날 동아시아에서는 위기와 더불어 저항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비단 한국의 박근혜 퇴진 운동뿐 아니라, 특히 경기 둔화 속에 중국 노동자의 저항도 계속 성장한다. 〈중국노동회보〉의 보고를 보면, 2011년 2백 건 정도였던 노동자 파업과 시위 건수가 2015년에는 2천7백 건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성장하는 중국 노동자 저항이 특정한 조건에서 혁명적 투쟁으로까지 발전한다면, 북한의 외견상 획일적인 정권도 커다란 균열과 아래로부터의 반란을 피하지 못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