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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피살로 드러난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

이 글은 2월 15일에 쓴 기사를 개정·증보한 것이다.

2월 13일 말레이시아에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피살됐다. 이 일은 동아시아 국제 정치의 커다란 이슈로 떠올랐다. 백주대낮에 국제공항에서 독재자의 친척이 피살된 건 그 어떤 스릴러 영화보다도 충격적이었다. 현실이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자극적인 건 단지 남한만의 일이 아니다.

사건의 충격적인 양상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은 즉시 ‘누가 김정남을 죽였는가’로 쏠렸고, 이에 관한 온갖 보도가 쏟아졌다. 온갖 ‘카더라’ 통신이 쏟아졌고, 말레이시아 당국의 입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김정남 피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사건 직후부터 북한, 남한, 미국, 중국 등 관련 국가들이 현지 수사를 놓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부검과 시신 인도 여부를 놓고도 각국의 물밑 외교전이 벌어졌다. 수사 결과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아도 이는 소동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새로운 논란과 의문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김정은과 김정남의 갈등은 북한 정권의 불안정성을 힐끗 보여 준다.

김정남, 3대 세습의 걸림돌

그러나 피살 사건의 맥락과 파장에 더 주목해야 한다. 그러려면 물음을 던져 봐야 한다. 1990년대만 해도 서방 세계에서 김정일의 후계자로 유력하다고 예상돼 온 김정남이 어쩌다 말레이시아에서 홀로 객사하는 신세가 됐나?

김정남과 김정은의 갈등은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3대 세습 과정에서 이복동생한테 밀려난 김정남은 해외(주로 중국)에 거처를 마련해 살아야 했다.

물론 김일성 일가 중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사람이 평양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지내는 건 김정남만의 사례는 아니다. 1975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조카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하자 자강도 산골로 보내져, 18년 동안 거기서 지내야 했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도 30년 넘게 유럽에 머물며 평양과 거리를 둬야 했다. “혁명 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1]할 것을 내세워 혈통 세습을 정당화하다 보니, 바로 가족이 독재자의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에서 밀려난 다른 가족과 달리, 김정남은 조용히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권력을 물려받은 2010~11년 김정남은 주로 일본 언론과 접촉해 3대 세습을 공개 비판하고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선가 그는 동생의 권력 승계를 못마땅해 했고 이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김정남은 2011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조차 세습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3대 세습은 사회주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저는 이전부터 지적해 왔습니다. 그런 선택을 한 것은 북한으로서도 특징적인 내부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고미 요지, 중앙m&b.)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도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촌 김정은을 “독재자”라고 불렀다.

이때 김정은한테는 이복형 김정남이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좀먹는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2011년 서른도 안 된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했을 때, “백두혈통”이라는 것이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였다. 2013년 북한은 당 강령의 핵심 부분인 ‘유일사상체계 10대 원칙’을 개정하며 이 점을 명문화했다. “우리 당과 혁명의 명맥을 백두의 혈통으로 영원히 이어 나가며 주체의 혁명전통을 끊임없이 계승 발전시키고 그 순결성을 철저히 고수해야 한다.”

그런데 북한 외부에서 3대 세습에 흠집을 낸 “백두혈통”(심지어 김정일의 장남)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2011년 이후 김정남이 침묵을 유지했어도 말이다. 게다가 김정남은 2013년 김정은이 처형한 장성택과도 돈독한 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었다.

〈조선일보〉는 김정은·김정남의 갈등을 두고 “왕조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왕자의 난”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시대 왕자들의 권력 다툼과 똑같다고 말이다. 즉, 남한과 같은 시장 자본주의보다 질적으로 퇴보한 사회에서나 일어날 일이라는 것이다.

개량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흔한 이런 주장은 북한 사회의 진정한 성격을 보여 주지 못한다. 북한은 1950~60년대 공업 성장에서 남한을 앞지른 바 있는 중간 규모의 공업국이다.

이런 엄밀한 규정이 중요한 이유는 북한 사회 변혁에 대한 전략적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대규모로 존재하는 북한 사회를 “왕조”라고 규정하면 그 사회의 본질적 모순과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다. 박정희 독재·유신체제 하의 한국 사회를 왕조 국가로 규정하는 것만큼이나 비역사적(초역사적)이다.

특수성

물론 북한의 3대 세습, ‘왕자’들의 갈등은 마치 북한만의 독특한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수성을 예외성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트로츠키(1879~1940)가 《연속혁명》 독일어판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일국의 특수성들은 세계경제의 운동 과정의 기본 특징들이 일국 내에서 독특하게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비정상’처럼 보이는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이런저런 현상과 제도 등은 물자가 부족하고 해외에 손 벌릴 곳도 없는 낙후하고 빈곤했던 나라가 급속한 공업화를 추구하면서 봉착한 문제들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확립된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이라는 더 큰 맥락이 있다.

처음 북한이 권력 세습(김일성→김정일)을 선택한 것도 북한 국가자본주의가 거듭 모순에 봉착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대내외적 문제 때문에 북한에서는 1950~70년대에 여러 차례 관료 내 분열이 벌어졌다. 특히, 1960년대 경제 침체를 계기로 벌어진 관료 내 도전(소위 ‘갑산파’ 사건)은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하는 한 계기가 됐다. 자신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할 후계자를 세워 당과 국가가 분열하지 않고 안팎의 위기에 일사불란하게 대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 세습(김정일→김정은)은 그때보다 훨씬 더 취약한 조건에서 이뤄졌다. 김정남도 개인적으로 3대 세습을 반대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내부적 요인”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내부 안정을 위해 3대 세습이란 이상한 권력 승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 북한의 내부 불안정은 지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주변 국가도 북한이 불안정해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북한은 수십 년째 누적된 경제 위기에 짓눌려 있었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제국주의 간 갈등이라는, 북한 관료들이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대외 환경에도 대처해야 한다. 북한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처한 이러한 어려움이 바로 김정남이 말한 3대 세습의 ‘내부적 요인’일 것이다. 북한 관료들은 김정은 후계 구도가 안착되지 않으면 자칫 체제 전체가 어찌하지 못하는 위기에 빠질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김정은으로의 “이상한” 권력 승계, 이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이복형의 존재는 오늘날 북한 김정은 정권이 처한 문제의 일면을 보여 준다. 그래서 북한 권력에 배척당한 채 사실상 망명자로 살았던 김정남의 피살은, 오늘날 북한 김정은 정권이 내면적으로 안고 있는 불안정성을 힐끗 드러내고 있다.

김정은 정권이 직면한 난제들

이처럼 김정남의 피살은 북한 통치 권력의 불안정 문제를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준다.

김정은은 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결국 구체적 성과(핵심적으로 경제 회복, 인민 생활수준 향상)를 내놓느냐가 중요하다.

물론 오늘날 북한은 중국과의 교역 증대를 중심으로 그럭저럭 최악의 상황에서는 벗어난 듯하다. 그리고 북한의 건설 붐과 전력 사정의 일부 호전 등을 주목하며, 북한 김정은 정권이 안정됐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2000년대 북한 경제는 성장세가 등락을 거듭하는 등 불안정한 회복세를 보였다. 특히 2009년 화폐개혁 실패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민중들 사이에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2] 결국 북한은 화폐개혁 책임자 박남기를 처형하는 등 커다란 홍역을 치렀다. 2013년 장성택을 처형하면서 내놓은 발표문을 보면, 적어도 그때까지 그 후유증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경제 사업과 인민 생활 향상에 막대한 지장”, “2009년 [화폐 개혁 실패로] 엄청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게 [됨]”.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 증가는 북한 지배 관료들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 줄 수 있다. 중국 등의 한두 나라와 교역하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그 나라 경제가 침체하면 북한 경제도 함께 깊은 침체에 빠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령 북한 내에서 위안화 거래가 일반화돼, 위안화 가치 변화가 북한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게다가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북한에 미치는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지는 것은 북한 관료들로서는 달가울 리 없고, 또 다른 정치적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중국과의 교역이 증대했으나, 그 혜택이 인민 대중에게 골고루 배분되는 건 아니다. 빈부격차가 커진다는 징후가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교역 과정에서 국가 관료와 결탁해 돈을 번 소수 사람들(소위 ‘돈주’)이 부분적 시장화 조처들을 계기로 북한 국내의 각종 사업에 진출했다.

그러나 시장화 조처는 인민 대중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예컨대 “‘돈주’와 무역회사의 창궐, 사유화의 확대 등으로 각종 운임이 급상승하고 있다. 2년 전 청진·무산 간 버스요금은 8백 원이었는데 지금은 5만 원으로 올랐고 청진·김책 간 버스요금은 10배 인상됐다. 북한 주민들은 전기도 소매로 구입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3]

자력갱생

중국의 경제 성장 둔화나, 개성공단 폐쇄와 같은 제재 강화는 북한 경제 회복의 발목을 잡을 악재들이다. 북한이 최근 ‘자강력 제일주의’처럼 ‘수입병을 없애고 원료, 자재, 설비의 국산화를 실현하자’는 자력갱생(즉, 주체)을 다시 강조하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하는 조처로 보인다.

지난해 조선로동당 7차 당대회에서 김정은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의 목표로 에너지 문제 해결, 인민경제 선행부문·기초공업부문 정상화 등을 제시했다. 여전히 핵심 경제 부문들의 회복이 더디다고 풀이될 만한 대목이다.

경제 회복을 제대로 하려면 국제 금융기구에서 자금을 끌어와야 한다. 그러나 김정은 치하에서 이 문제는 잘 풀리지 않았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 해결을 전제로 일본의 대북 제재를 부분적으로 해제하려 했으나 핵 문제 때문에 이내 협상은 어그러졌다. 핵심은 북·미 관계를 잘 푸는 것이지만 여의치가 않다.

북한 지배 관료들은 경제 회복, 그와 관련된 개혁·개방의 폭과 속도 문제, 북·미 관계, 중국과의 관계 등 난마처럼 얽힌 복잡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변수가 북한 관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2013년 말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의 처형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 줬다. 이처럼 당시 북한 권력 내의 문제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정은은 자신의 권위에 장성택이 도전한 것 외에도 경제적 혼란의 책임과 대외정책상의 이견까지 처형 이유로 제시했다. 이런 문제들이 북한 지배 관료 내에 균열을 낳았던 것이다. 군부 수뇌부인 조선인민군 총참모장과 인민무력부장이 지나치게 자주 교체되는 것도 북한 권부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런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만약 김정은이 김정남을 암살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벌인 일일 것이다. 앞으로 여러 난관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이러저러한 변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3대 세습을 강화하고 관료들 내에 균열을 일으킬 만한 요소를 단 하나라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장성택의 처형은 북한 지배 관료들 내의 극심한 갈등을 보여 줬다.

‘정권교체’인가, 노동자 혁명인가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은 사설에서 김정남 피살을 두고 북한 정권교체를 유도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우익은 이번 사건을 인권 문제 등 대북 압박 강화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듯하다. 〈중앙일보〉는 “반인권적 북한 정권의 처리 문제를 주요 국제 안보의제로 올리는 데도 외교력을 모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동시에 〈동아일보〉는 “국론분열 같은 내부의 적”을 경계하라고도 강조했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을 겨냥한 말이다.

헌재 탄핵 심판, 조기 대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우익들은 정치 지형을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려고 한다. 그래서 김정남 피살을 계기로 민주당 등 야당의 ‘안보관’을 공격하고 다시 이 문제를 사드 배치와 연결하고 있다. 혹자가 비꼬았듯이 ‘기―승―전―사드’다.

우익은 북한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즉 북한 노동자들이 지배 관료를 아래로부터의 대중 혁명으로 타도하고 노동계급 자신의 국가 기구들을 민주적으로(노동자 평의회 형태로) 세울 필요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익들은 미국 군대나 남한 군대 같은 외부세력이 북한 정권을 교체해 북한 ‘민중’을 ‘해방’하자고 얘기한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이 ‘이상한 나라’가 된 것은 세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가 가한 압력과 북한 관료의 선택이 결합된 결과다. 미국과 한국이 제국주의적 압력을 높인다면, 이는 북한 주민들에게 고통만 가중시키고 무엇보다 북한 민중의 아래로부터 저항이 일어날 가능성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부정적인 효과를 낸다. 이런 사실은 미국이 ‘민주주의’ 운운하며 군사적 침공이나 제재를 가한 이라크, 이란 등지에서 거듭 확인된 사실이다.

우익과 달리, 노동자연대 같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북한 노동계급도, 여느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사회 변혁의 잠재력을 객관적으로 품고 있다고 본다. 더욱이, 남한 노동계급이 지난 20년간의 경험에서 배우고 입증했듯이 시장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진보가 아니고 고통일 뿐이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오늘날 북한 사회의 위기는 북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북한이 표방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창출해야 한다.

주석

[1] 1974년 김정일이 발표한 ‘유일사상 체계 10대 원칙’의 한 대목.

[2] 와다 하루끼,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창비, 2014.

[3] 김어진, ‘2000년대 이후 북한 사회의 시장화 조치들에 대한 시론적 단상’, 한국사회경제학회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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