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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30주년:
교훈과 오늘날의 의미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6월항쟁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중을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한 정당성 없는 군사 독재 정권이 아무 죄 없는 학생을 죽인 것은 대중의 환멸과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1987년 수개월 동안 벌어진 폭발적 대중 투쟁은 그전에 벌어진 수많은 크고 작은 투쟁들이 누적된 결과였다. 폴란드 출신의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에서 1905년 러시아 혁명을 1896년부터 벌어진 크고 작은 투쟁들을 겪은 러시아 노동계급의 “내적인 정치적 발전”의 결과로 설명했다. 1987년 6월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분석할 때도 이런 운동의 동학을 적용할 수 있다.

1970년대 박정희의 폭압 아래에서도 끈질기게 벌어진 노동자 투쟁의 연장선에서 1979년 YH 노동자 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은 부마항쟁에 영향을 줬고 지배자들의 극심한 분열을 낳아 박정희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졌다. 지배자들의 분열을 비집고 분출한 투쟁의 정점에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자리 잡고 있다.

광주항쟁은 물리적으로 패배했지만, 이를 계기로 정치적 각성을 하고 군부 독재에 목숨 걸고 싸우고자 하는 많은 투사들이 생겨났다. 특히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인식한 투사들이 급속하게 증가해 한국 노동계급 운동은 정치적·조직적으로 더욱 강해졌다.

의식적 소수

위와 같은 배경과 함께 경제 호황도 대중의 자신감에 영향을 미쳤다.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이 이런 상황을 미리 보여 줬다. 당시 노동자들은 사상 최대의 흑자를 낸 회사를 상대로 싸워 높은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1986년 초 필리핀에서 일어난 대중 투쟁(“피플 파워”)이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낸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 정권은 이 소식이 퍼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해 언론을 통제하기에 급급했지만, 사람들은 우리도 필리핀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6월항쟁에 영향을 미친 크고 작은 투쟁들을 이끈 사람들(비록 소수일지라도)의 구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6월항쟁은 대중의 자발성이 폭발한 때이기도 했지만 6월항쟁으로 가는 과정은 수많은 의식적 노력들의 결과이기도 했다.

예컨대 대우자동차 파업의 승리는 활동가 10여 명이 미리 투쟁을 준비한 결과이기도 했다. 1987년 4월 서울대와 부산대에서 징계 문제와 학내 언론 독립 문제로 점거와 집회가 열려 승리를 얻어 냈다.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은 5월부터 가두시위와 군부 정권에 항의하는 정치적 투쟁을 벌였고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이후 6월항쟁 거리 전투의 선두에 선 서학협(서울지역학생협의회)이 만들어졌다. 6월 들어서 학생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집회 참가를 조직하려고 선전·선동을 강화했다.

군부 독재의 굴복

6월 10일 마주보고 달리는 두 개의 열차가 충돌했다. 이날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전두환 정권은 대중의 열망과는 정반대로 군부 독재를 지속하기로 결의했다.

반면 거리에서는 1960년 4·19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거리 곳곳에서 경찰은 무장 해제당하거나 사람들에게 곤욕을 치렀다. 한 경찰 간부의 말처럼 경찰로서는 “가장 힘들고 길게 느껴졌던 하루였다.” 22개 지역에서 수십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경찰이 아예 진압을 포기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군부 독재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높아진 반면, 전두환 정권의 사기는 떨어졌다. 6월 13일 시국 관련 책임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전두환이 “[시위대는] 사생결단으로 나오는데 우리는 안 그런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경찰력의 한계를 본 전두환 정권은 군 투입을 놓고 고민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우왕좌왕했다. 대중 투쟁이 워낙 강력해서, 군을 동원할 경우 군 내부의 분열이 생기거나 사병들이 시위대 편에 설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위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6월 18일과 26일 집회는 6월 10일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결국 전두환은 대중 투쟁의 도도한 물결 앞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6월항쟁과 노동자

6월항쟁의 상층 지도부는 국민운동본부(국본)였다. 국민운동본부는 재야뿐 아니라 (불가피하지만) 부르주아 야당들도 포함하는 계급연합 조직이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6월항쟁 기간 내내 동요하며 일관되게 투쟁을 이끌고 나갈 세력이 아님을 보여 줬다. 야당은 투쟁을 전진시키기보다 정치 협상을 통해 ‘파국을 막아야 한다’고 여겼다. 민주당은 이미 6월 10일 직후 원내 복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야당의 우유부단함을 잘 알았기에 전두환은 주로 야당을 향해 비상조치설을 퍼트리며 야당이 위축되고 동요하도록 만들었다.

6월항쟁 이후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자 야당은 노동자들에게 자제를 요구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민주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에게 이용당할 수 있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야당이 동요할 때 실제 투쟁을 전진시킨 것은 거리의 대중이었다. 6월항쟁 당시 국가의 탄압이 심했지만, 거리 현장과 기층 수준에서 수많은 혁명적 또는 급진적 좌파 투사들(특히 학생들)이 투쟁을 주도했다. 그래서 운동이 계속 커질 수 있었다.

시위대의 다수는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 밀집 지역의 경우, 6월항쟁 초기부터 노동자들의 참가가 두드러졌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요구가 제기됐다. 6월 10일부터 마산·익산·인천에서 노동자들은 ‘노동3권 쟁취’, ‘임금 인상’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가했다. ‘중산층’의 대표 집단으로 잘못 얘기되는 ‘넥타이 부대’도 대부분 사무직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단지 소극적인 개인들로만 시위에 참가한 것이 아니었다. 인천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집회와 투쟁을 주도하면서 집단적인 자신감을 느끼고 자신의 작업장 안으로 투쟁을 가지고 갈 준비를 했다. 부산 사상공단 노동자들은 6월 18일 잔업을 거부하고 집회에 참가했다.

노동자들의 참가와 집단적 움직임은 전두환 정권을 두려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특히 6월항쟁 직후 벌어진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두환 정권이 6월항쟁의 성과를 과거로 되돌리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구실을 했다.

계승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주도력과 요구, 투쟁 방식 등에서 구별되지만 연속적인 과정에 있는 투쟁이었다. 흔히들 두 투쟁의 단절(불연속성)에 주목하는데, 이는 틀렸다. 오히려 두 투쟁은 연속성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1987년의 대중 투쟁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 결합을 통한 노동자 계급투쟁의 발전을 얘기한 대중파업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두 투쟁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정치의식의 발전 과정에서 경제투쟁도 중요함을 보여 줬다.

문재인 정부는 자신이 6월항쟁과 박근혜를 구속시킨 ‘촛불 항쟁’의 맥을 잇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신속한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정부를 몰아세우지 말라고 한다.

1987년 당시 동요하는 야당과 달리 노동자들이 거리와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6월항쟁의 성과가 반동으로 파괴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다.

오늘날 박근혜 퇴진과 구속의 성과를 바탕으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서도 노동자들이 고유의 힘을 발휘해 투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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