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30주년:
“한국 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의 등장
〈노동자 연대〉 구독
문재인은 자신이 ‘친노동이자 친기업’이라며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정규직화,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한꺼번에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한다.
30년 전 노동자들이라면 이런 주장에 이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자. 우리는 그럴 만한 자격과 능력이 충분히 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노동자 투쟁이 민주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에게 이용당할 수 있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자들에게 자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쌓아 온 불만을 한꺼번에 제기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렸다.(7~9월 노동자 대투쟁(이하 대투쟁) 기간에 나온 요구 사항은 모두 1만 4천9백57개였다.) 그리고 한 역사가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 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으로 부상했다.
대투쟁의 배경
대투쟁은 한국 노동계급이 양적·질적으로 성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급속한 산업화는 남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팔 노동계급의 규모를 늘리고 집중도를 높였다. 전체 임금노동자는 1980년에 견줘 1987년에 41.7퍼센트나 증가했다. 5백 인 이상 고용 기업의 비중은 35퍼센트 이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1970~80년대의 크고 작은 투쟁을 거치면서 한국 노동계급은 정치적·조직적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은 정치투쟁의 휴지기에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을 위한 토양을 만들고, 그 토양 위에서 자란 정치투쟁이 경제투쟁을 위한 퇴적물을 남기며 서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경제가 호황이었던 것도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였다. 대투쟁 전인 1987년 봄에 임금이 평균 7.7퍼센트 올랐지만, 대부분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던 노동자들은 대투쟁 기간 동안 평균 25퍼센트 이상의 임금 재인상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대투쟁에 영향을 미친 것은 6월 항쟁이었다. 대투쟁은 6월 항쟁과 연속선상에 있었다. 6월 항쟁에 다수의 노동자들이 참가해 군부독재를 무릎 꿇리는 데 큰 구실을 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고 싸울 자신감이 커졌다.
예컨대 인천의 한독금속 노동자들은 6월 항쟁 거리 시위에 참가하면서 5월에 결정된 낮은 임금 인상에 항의했고, 결국 6월 12일에 임금 재인상을 따냈다. 7월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주로 활동한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서 말한 대로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주는 대중파업의 과정이 나타난 것이다.
거대한 폭발
7월부터 9월까지 벌어진 파업은 3천3백11건에 달했다. 1987년 이전 20년 동안 발생한 전체 파업 건수를 넘어선 것이다. 그야말로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파업 물결이었다.
대투쟁은 전국적이었고 전 산업적이었다. 파업은 울산에서 시작해 남부해안 산업 중심지인 부산·마산·창원을 거쳐 구미·대구·포항, 강원도 광산지역과 호남지역, 그리고 중부의 경공업지역을 휩쓸며 수도권으로 퍼져 나갔다. 파업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중화학공업에서 경공업으로, 광공업에서 운수·부두·사무직·전문직·판매서비스직 등 전 산업으로 번졌고, 8월 말이 되자 전국이 파업 물결에 뒤덮였다.
파업의 95퍼센트 이상이 불법 파업이었다. 단체행동을 제약하는 여러 법 조항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쟁의 발생 신고나 냉각 기간을 무시하고 일단 파업이나 직장 점거 농성에 들어가 힘을 과시한 다음 협상에 임했다.(선 파업 후 협상)
또한 현장 노동자들의 민주주의가 빛을 발했다. “노동조합의 비민주적 제도와 집행부는 거의 임시총회를 통해 파업 농성 중에 일거에 교체”됐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지도부에게만 맡겨 두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수많은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대투쟁 이후 1년간 노조 4천 개가 생겼다. 노동자들은 임금, 근로조건의 개선뿐 아니라 조직·의식·자신감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최근 노동자들이 파편화돼 싸우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투쟁 전의 노동자들을 봤다면 틀림없이 노동자들이 싸우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을 것이다.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인사고과와 상여금 차등 지급 등 각종 차별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작업반장에게 잘 보이거나 빨리 돈 벌어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컸고 이직률도 높았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대투쟁의 중심에 섰고, 또 한동안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파편화
군사독재 정부는 급속한 자본 축적을 위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율을 높이려고 억압적인 체제를 유지하며 노동자들에게 수동성과 침묵을 강요했다. 작업장에서 두발과 복장을 단속하고 작업 전 체조 등을 강제한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분열·위축시키려는 여러 조처들 때문에 노동자들이 싸울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파업이 시작됐을 때 제일 먼저 두발과 복장을 단속하던 경비실을 부숴 버렸다. 차별 조처들의 폐지를 요구하며 투쟁해 상당히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8월에는 2천5백여 건의 파업이 벌어져 투쟁이 절정에 올랐다. 8월 18일에는 현대 노동자 6만여 명이 각종 중장비를 앞세우고 거리를 가득 메웠고, 노동부 차관이 울산에 내려와서 노동자들의 요구 일부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8월 22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파업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 투쟁이 정치화되기 시작할 즈음 정부는 ‘외부세력의 개입’ 운운하며 탄압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파업 사업장들의 협상도 급속히 타결되면서 9월 들어 투쟁은 하강 국면에 접어든다.
노동계급 중심성
대투쟁을 평가하면서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민중이 주도하는 투쟁이 있어야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를 민중에 용해시키는 이런 주장은 노동자들이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면 민중의 단결이 약화되고 노동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대투쟁을 통해 군사 정권이 6월 항쟁의 성과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전두환이 6월 항쟁 때 군 투입을 못 하고 우왕좌왕한 것도 사실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투쟁에 참가하면서 거대한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발전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군부독재의 무릎을 꿇린 노동자들은 자기 작업장에서 투쟁을 벌여 군부독재의 머리를 숙이게 만든 것이다.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즉 계급투쟁이 강화돼 6월 항쟁이 결정적 반전을 겪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전략 문제로 이끈다. 대투쟁은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억압과 착취를 끝낼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사회 세력이라는 것을 힐끗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