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재판과 문재인 정부의 구 여권 비리 수사:
‘또 하나의 가족’에서 곤경 치르는 “살모사” 패밀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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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이재용 등의 뇌물죄 재판에서 재판부가 안종범의 수첩을 정황 증거로만 쓰겠다고 했을 때는 상황이 박근혜 일당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안종범 수첩에는 박근혜와 이재용의 독대 직후 청탁 사항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안종범이 그 독대 자리에 직접 참석한 것이 아니므로 직접 증거로 보기 힘들다고 했다. 안종범이 박근혜한테 삼성 합병 관련 특혜 지시를 받은 바 없다고 발뺌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는 발가락을 다쳤다며 본인 재판에 며칠 동안 출석을 거부했다. 이재용은 박근혜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일체 거부했다.
구 정권 세력들의 단죄가 쉽지만은 않음을 보여 준 일들이었다.
그런데 7월 12일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이재용 재판에 나와 증언하면서 재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재용과 삼성은 정유라에 대한 지원은 청탁을 위한 특혜성 뇌물이 아니었다고 주장해 왔다. 정상적인 스포츠 분야 유망주 지원(투자)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판에 출석한 정유라는 최순실이 “(삼성이 준 말을) 내 것처럼 타면 된다”고 했다는 등, 삼성이 자신에게 특혜성 지원을 했으며 최순실이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특검은 진작부터 박근혜와 최순실을 “경제 공동체”로 규정했다. 미르·K스포츠 재단 모두 최순실이 관리했지만, 박근혜 퇴임 후 대비용인 게 분명했다. 박근혜는 삼성에 특혜를 주고 삼성은 최순실에게 특혜를 준 것으로 해 제3자 뇌물죄가 성립될 수 있다. 재판부는 실제로 박근혜와 최순실의 뇌물죄 재판을 병합해 진행하고 있다.
우병우
한편 7월 14일 청와대는 박근혜의 청와대가 삼성의 경영권 승계 시점을 기회로 보고 거래를 준비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긴 문건 3백여 건을 전격 공개했다. 그것도 우병우가 근무했던 민정수석실 캐비닛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17일 오후에도 삼성은 물론이고 세월호, 블랙리스트 관련 내용들이 포함된 문건 1천3백61건을 공개했다.
청와대가 공개한 것을 보면, 우호 언론을 지원하고 비우호 언론을 통제한 일, 정권 우호 여론 조성을 위해 “건전 보수” 세력을 육성·활용하려 한 일 등이 담겼다고 한다. 또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의 구조 방기를 일부 입증한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의 상영을 금지하고 방해한 일, 간첩 조작 사건 무죄 판결에 대한 비난도 포함돼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문건들이 청와대 최고위층의 지시가 수석비서관회의 등을 거쳐 하달된 흔적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들은 박근혜의 직무가 정지된 시점이나 박근혜 탄핵 후의 황교안 체제에서 구 여권이 왜 그토록 청와대 압수수색에 반대했는지 보여 준다. 황교안이 특검 수사 기간 연장을 왜 거부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의 청와대는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궁지로 몰려고 반민중적 권력 농단을 조직적으로 벌인 범죄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문건 공개 후 청와대는 이 문건들의 사본을 특검에게 전부 넘겼다. 특검은 수사 기간이 끝나 박근혜 일당의 재판 공소 유지만 맡고 있다. 따라서 특검은 재판에서 이를 증거로 제시하고, 필요한 추가 수사는 검찰에서 진행할 것이다.
이날 오전 재판정에 나온 우병우는 이 문건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무슨 상황인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고 군색하게 답변했다. 민정수석실에서 문건이 나왔으므로 검찰은 우병우 수사도 다시 해야 하고 구속도 해야 한다.
정유라의 돌발 발언에 대해 최순실과 정유라의 변호를 동시에 맡고 있는 변호인단은 “살모사 같은 행동”이라고 극언했다. 최순실도 “딸과 인연을 끊겠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정유라는 최순실의 변호 전략을 따르다가는 자신도 구속될 것을 걱정해 살길을 찾으려는 것 같다. 검찰의 부실한 준비와 법원의 보수적 판단으로 정유라 구속영장이 연속 기각됐지만, 정유라에게 특혜를 줬던 이화여대 교수들은 죄다 유죄를 받았고, 총장 포함 핵심 보직 교수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특혜를 준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구속돼 있는데, 특혜를 받은 당사자가 언제까지고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박근혜·최순실 일당에게 고통을 당해 온 세월호 희생자·미수습자 가족, 노동자, 청년, 언론인 등에겐 이런 상황이 쌤통일 것이다. 부패한 권력자들을 권좌에서 쫓아내고 구속·기소 당하게 한 것은 수백만 대중 투쟁 덕분이다. 그리고 진보 염원 대중의 분노는 아직 식지 않았다.
노림수
문재인의 청와대는 박근혜 일당을 재판에서 불리하게 하고, 이명박까지도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을 던져 추경 예산 통과 등에 협조하지 않는 보수 야당들과 우파를 간접적으로 압박하려 한 듯하다. 여권의 공세가 전 정권의 비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7월 16일 감사원은 방위사업청과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비리를 발표했다. 한국형 기동헬기라고 자랑하던 ‘수리온’이 결빙 방지도 안 되는 엉터리 기종이라는 것이다. 결빙 방지가 안 되면 얼음이 된 구름 입자가 엔진에 달라 붙어 추락하게 된다. 도저히 안심하고 탈 수조차 없는 수준인 것이다.
감사원은 육군에 관련자 징계를 요청하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방위산업 비리는 이명박 정권 때 특히 심한 것으로 드러나 “4자방(4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 비리”로 불려 왔다. 여기에 더해 현재 한국항공우주산업의 사장은 박근혜의 친척이고, 방위사업청장 장명진은 박근혜와 서강대 절친 동창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 날인 17일 문재인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방산 비리는 “이적 행위”라면서 엄벌을 촉구했다. 노무현 시절의 반부패 컨트롤 타워도 복원하겠다고 한다. 대신 대선 공약인 적폐청산특별위원회는 설치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대중이 요구한 적폐 청산은 단지 구 여권의 불법적 부패 행위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재인의 반부패 행보는 대중의 지지를 모아 정권의 국정 장악력을 더 높이는 수단으로 보인다.
박근혜 퇴진 운동의 수혜를 입고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앞으로도 박근혜 일당의 재판 과정을 이용해 대중의 불만을 달래려 할 것이다. 현 체제에 대한 기층의 불만이 우파의 견제보다 강력하다면 말이다. 퇴진 운동의 여파 속에 치른 대선 때 문재인 스스로 “4자방” 비리 등 적폐 청산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약속은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민주 정부로 정권을 교체하자던 김대중은 정권 초 우익의 협조를 얻으려고 취임식도 하기 전에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해 버렸다. 입만 열면 정치 개혁을 강조하던 노무현 정부가, 정치자금을 뇌물로 제공한 삼성그룹 일가에 면죄부를 주고 법망을 피해가게 한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때 노무현은 알량한 개혁마저 실패하자 공식정치에서 한나라당과의 협력 기조로 돌아서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도 우파의 협조가 필요할 때는 박근혜 일당의 감형과 사면을 카드로 쓸 수 있다. 그렇게 써먹기 위해서라도 박근혜 일당과 구 여권 세력의 약점을 확실히 잡으려는 것이다.
7월 이후 엎치락뒤치락한 재판 과정은, 대중의 기대와 다른 결과를 낳을 가능성과 그게 아직은 쉽지 않은 국면이라는 점 둘 다를 보여 줬다.
박근혜와 구 여권의 부패한 실세들을 단죄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의 정의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야 대중의 사기가 더 유지되고 문재인 정부를 포함해 권력자들이 함부로 우리를 대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