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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을 말하다》(장 지글러 지음, 이현웅 옮김, 갈라파고스):
강대국이 지배하는 유엔의 현실을 들춰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의 저자인 장 지글러의 신간이 번역·출간됐다. 1934년 스위스 태생인 장 지글러는 제3세계를 지배하고 현지 민중의 부를 착취하는 다국적기업과 강대국들의 횡포를 고발하며, 오랜 세월 동안 좌파적 신념을 지켜 온 사람이다.

《유엔을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이현웅 옮김, 갈라파고스, 372쪽, 16800원

그는 스위스 은행들이 제3세계 독재자·서구 권력층과의 검은 거래로 부를 쌓아 왔음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장 지글러는 한때 의원 면책특권도 박탈당하고 살해 위협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장 지글러는 2000~2008년에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고, 현재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 부의장을 맡고 있다.

《유엔을 말하다》는 유엔에서 활동해 온 저자의 경험이 담겨 있다. 장 지글러는 자신의 활동 경험과 강대국이 지배하는 유엔 폭로를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서 책을 썼다. 그래서 일부 독자는 책이 다소 산만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유엔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인류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데서 유엔이 어떻게 무력해지는지 이해할 만한 경험을 전해 준다.

미국의 횡포

장 지글러는 이렇게 한탄한다. “유엔은 미국의 지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153쪽) 그는 미국이 유엔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횡포를 자세히 설명한다.

“미국은 유엔을 창립한 회원국이며 게다가 미국은 유엔에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는 국가이기도 하다. … 유엔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사용하는 사무국은 평화유지활동국(PKO)이다. 이 사무국의 한 해 예산은 70억 달러가 넘고, 그중 많은 부분을 미국이 분담한다.”(153~154쪽)

이 밖에도 미국 등은 전용 기부금을 내는데, 이때 이 기부금이 특정 목적에 쓰이도록 유엔에 요구할 수 있다. 그래서 “히말라야 근방 국가 사이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해하던 워싱턴은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에 천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 사무소로 하여금 [네팔] 카트만두에 또 다른 사무소를 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154쪽)

유엔의 이런 처지 때문에 유엔 고위직에 임명될 후보자들은 “신중하게 미국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순조롭게 임명될 수 있다.

장 지글러는 그런 대표적 사례로 한국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을 꼽는다. 그는 반기문을 가리켜 “생명력 없는 엑스트라 같은 인물”이라고 혹평한다. 장 지글러는 미국이 “자신들에게 충성심을 가질 거라고 기대”해 반기문의 사무총장 출마를 지원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미국의 기대에 부응했다. 2014년에 미국의 요구에 따라, 반기문은 미국이 꺼리는 인물을 인권고등판무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미국이 비밀리에 제공하는 자금과 지원에 의지해 존속하고 있는 요르단 하심왕조의 자이드 라아드 알 후세인 왕자를 [그 자리에] 지명했다.”(159쪽)

유엔과 그 유관 국제기구들은 미국이 벌이는 전쟁범죄 앞에서 무력해진다. 지금까지 유엔 회원국 123개국이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권한을 인정했지만, 미국·러시아·중국·이스라엘 등은 국제형사재판소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미국이 세계 도처에서 소송이나 재판 없이 드론(무인기)를 동원해 원격으로 “자의적인 약식 처형”(232쪽)을 저질러도, 국제형사재판소는 이를 다룰 수가 없다.

안보리 거부권

단지 미국만이 유엔에서 깡패처럼 구는 유일한 강대국은 아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은 거부권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다.

미국은 거부권으로 “가자의 주민을 보호하려는 유엔의 활동”에 수시로 제동을 건다. 동맹국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수단의 석유를 원하는 중국은 거부권으로 유엔의 수단 개입을 방해한다. 시리아 독재 정권을 후원하는 러시아도 시리아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다.(331~336쪽)

1994년 르완다에서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다. 그러나 르완다에 무기와 대출금을 지원해 주고 있던 강대국들(프랑스, 중국 등)은 이 학살을 외면했다. 특히, 프랑스 정부는 “종족 학살자들[후투족 민병대]을 빈틈없이 지원했다.” 르완다에 배치돼 있던 유엔군은 학살을 피하려는 주민들의 구조 요청을 거부한 채 학살 현장을 그저 바라만 봤다.(145~147쪽)

그래서 장 지글러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두고 “하나의 재앙”이라고 규정한다.

유엔은 개혁될 수 있을까

여기에 소개한 내용 외에도 《유엔을 말하다》는 유엔 안팎의 암투극, 미국의 개입 등을 세세하게 폭로한다. 장 지글러 자신이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문제 삼았다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렸다는 점도 소개되고 있다. 약간의 인내심만 갖는다면, 이 책에서 유엔의 실체를 파악할 만한 유용한 사례들을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 지글러는 유엔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유엔이 제대로 “변혁”되면 불평등과 전쟁을 극복할 국제 시민사회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려는 이상 속에 유엔이 창설됐고, 오늘날의 유엔이 창설 당시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장 지글러의 오해와 달리, 유엔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자본주의적 국제기구로 창설됐다. 당시 유엔의 기본적 설계는 미국 국무부가 담당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유엔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하거나 군사 개입을 정당화했다. 혹여 유엔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상충되는 결정을 할 듯하면,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이를 무력화했다. 회원국들의 관계는 결코 평등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유엔은 고쳐 쓸 수 있는 기관이 아니다.

유엔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보니, 그는 유엔의 인도주의적 개입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나 그 자신도 강대국들이 이것조차 얼마나 많이 악용해 왔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국제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한번 읽어 볼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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