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항쟁:
미국·유엔의 개입을 반기면 안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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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국가보안법(이하 보안법) 문제는 미·중 갈등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시진핑은 미국과의 갈등이 커지자 홍콩 보안법 제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미국 트럼프 정부는 홍콩 보안법 제정을 이유로 홍콩에 부여해 온 경제적 특별 지위를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대중국 제재 조처를 꺼내려 한다. 트럼프 정부는 전 세계 국가들에게 “중국에 순응할지, 아니면 [미국을 따라] 가치와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단결할지” 양자택일하라고 요구한다.
제국주의 진영논리가 강화되면서, 홍콩 보안법 항의 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조슈아 웡을 비롯해 일부 홍콩 야당 정치인들이 미국 정부의 개입을 노골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그 지지자들은 시위 때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홍콩 시위 참가자들이 트럼프보다는 미국 흑인 사망 항의 운동 참가자들에게 유대감을 더 느낀다는 홍콩 현지 보도를 보면, 기층 대중 다수가 앞서 언급한 야당 지도자의 생각에 아직 확고히 동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홍콩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적의 적은 친구’라는 진영논리가 홍콩 항쟁 내에서 강화될 위험을 경계하며,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대를 강조한다.
적의 적은 친구?
그런데 한국의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강대국이 홍콩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예컨대, 이런 주장이 있다.
“중국의 너무 거대한 힘과 살인적인 국가폭력 앞에 놓인 홍콩인으로서는 미국과의 국제관계를 활용하는 것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홍콩 대중이 민주적 권리를 지키려면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몇 가지 맹점이 있다.
우선, 홍콩 대중이 원하는 민주주의와 미국 지배자들이 원하는 민주주의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다. 미국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중국 공산당은 서구 사상과 민주주의, 서구 가치들의 파괴에 몰두하고 있다”며 미국 국가야말로 중국 ‘공산주의’에 맞선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양 한다. 그러나 ‘통치 과정에 대한 대중의 능동적 참여’를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으로 여기는 통념과는 달리, 미국 지배자들에게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아주 부차적이다. 오히려 ‘기업 활동의 자유’가 미국 지배자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2003년 민주주의를 선사하겠다며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 부시 정부가 가장 열을 올린 일이 민영화와 각종 신자유주의 규제 완화였던 까닭이다. 그 과정에서 불평등이 악화되고 이라크 민중의 삶이 피폐해져도 부시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라크 대중이 아니라 대중적 지지가 약한 소수 친미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몰아 줬고, 점령을 유지하려고 이라크 대중을 종파별로 분열시키려 애썼다. 미국의 이런 점령 정책이 결국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라는 괴물을 낳았다.
따라서 미국 지배자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미국 지배자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진정한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다.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흑인이 경찰에 목이 눌려 사망한 사건은 미국이 어떤 사회인지를 보여 줬다. 흑인 사망 항의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지자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군대로 진압하겠다고 위협하고 시위대를 테러 집단으로 매도했다. 시진핑 정부가 홍콩 시위대의 일부 행동이 “사실상 테러”라고 하거나 군대 투입을 시사한 것과 똑같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옳게 말했듯이, 홍콩 보안법 항의 운동과 미국 흑인 사망 항의 운동 모두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 저항권 행사”다.
미국에게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 문제는 언제나 대외 정책의 종속변수였다. 즉, 미국은 자신의 패권 유지에 도움이 되는 독재자들의 인권 탄압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린다. 예컨대 미국은 자신의 중동 패권을 위협하는 이란에게는 신정 독재 체제라는 비난을 퍼붓고 제재를 가하고 정권 교체를 위협한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반한 친미 독재 왕정이 지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서는 그 같은 조처를 취하기는커녕 오랫동안 동맹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내 여러 독재 정권들을 떠받치고 그에 맞선 대중 저항을 짓밟는 데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 왔다.
보안법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정부는 홍콩 보안법을 두고 길길이 날뛰지만, 정작 이와 유사한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유지해 온 한국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민주주의’ 국가로서 대중국 압박에 협력하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한다.
패권의 명분
미국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답시고 해외 곳곳에 개입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서구식] 민주주의 가치’는 미국 지배자들이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을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 안에 묶어 두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패권 유지와 해외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이었다.
반대로 미국은 ‘민주주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패권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짓밟아 버렸다. 예컨대, 1973년 미국은 칠레에서 선거로 선출된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정권을 전복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당시 미국 국무 장관이었던 키신저는 소름끼치게 유명한 말을 했다. “그 문제는 칠레 유권자들끼리 결정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였다.”
미국의 개입은 언제나 실제 민주주의 향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동아시아로 들어온 미국은 파시즘을 물리친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했지만, 정작 대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억누른 채 자국의 세력권을 확립하고 미국과 동일한 체제를 점령지에 이식하는 데 열중했다. 그 결과로, 남한·남베트남 등지에 친미 독재 정권이 잇달아 수립됐다.
이런 일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여성 인권 문제를 침공 명분 중 하나로 삼았다. 일부 진보 인사들조차 미국의 점령으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19년이 지난 지금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끔찍한 처지는 조금치도 나아지지 않았다.
미국은 소위 ‘불량국가’를 상대로 제재를 가해 왔는데, 이로 인해 진정 피해를 보는 쪽은 독재정권이 아니라 현지 민중이다. 예컨대 미국은 이란에 제재를 가하면서 이것이 이란 민중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재는 이란 현지에서 물가상승 등을 자극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했다. 무엇보다,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와중에 이란은 미국의 제재에 걸려 필수 의약품을 적절하게 수입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결코 외부로부터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대중 스스로의 저항으로 도입되는 것임을 역사는 보여 준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제재와 군사 개입은 오히려 현지 대중의 저항에 부정적인 효과를 준다. 이란 정부는 반정부 시위를 미국의 첩자나 친미 폭도들의 시위라고 비난할 수 있었고, 이를 시위를 진압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지금 시진핑 정부도 홍콩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홍콩인권민주법
미국이 지난해 시행한 홍콩인권민주법도 기본적으로 홍콩 문제를 이유로 대중국 압박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고안된 것이었다. 즉, 지난해 미국은 홍콩 항쟁을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유리하게 이용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홍콩인권민주법의 주된 내용은 미국이 부여해 온 홍콩의 특별 지위를 매년 인증하기, 그리고 홍콩 인권 탄압에 연루된 중국 관료 제재하기 등이었다.
일부 홍콩 야당 지도자들은 미국 의회의 홍콩인권민주법 제정을 환영했다. 그러나 시진핑 정부는 이를 보안법 제정의 근거로 삼았고, 홍콩 대중과 중국 본토 대중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이용할 수 있었다.
홍콩 항쟁과 그 연대 운동이 미국의 개입을 환영하는 것은 홍콩 항쟁을 자주적인 대중 운동이 아닌 것으로 뒤틀어 버리거나 마비시켜, 홍콩 대중이 진정한 바람을 성취하는 것을 요원하게 만들 수 있다.
미국은 몇몇 나라들에서 반정부 운동을 친미적 방향으로 뒤틀어 운동의 최종 결과물을 애초 대중이 원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표적으로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이 일어나 기존의 부패한 권력자는 물러났으나, 미국의 후원을 받는 다른 부패한 특권층 인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우크라이나 대중은 민주주의나 사회·경제적 조건 면에서 진정한 성취를 얻지 못했다.
미국 지배자들은, 경쟁 국가들에서 벌어질지라도, 진정한 대중 항쟁, 특히 노동계급의 요구와 진출이 두드러지는 저항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았다. 미국은 1980~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1989년 중국 공산당이 톈안먼 항쟁을 진압하자 이를 내심 환영했다.
홍콩 항쟁 세력들이 세계 2위 강대국 지배자들을 상대로 어떻게 승리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해답은 트럼프에게서 찾을 수 없다. 홍콩 항쟁에 대한 국제 연대가 중요하나, 그 연대의 대상은 트럼프가 아니라 흑인 사망 사건에 분노해 거리로 나온 미국의 노동자와 청년들과 이를 지지하는 세계의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해답을 노동계급에게서 찾아야 한다. 노동계급의 사회·경제적 요구들을 제시하고 노동자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그리고 본토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시진핑 정부가 가장 염려하는 시나리오는 홍콩의 저항과 본토 노동계급의 저항이 결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토의 거대한 노동계급이야말로 홍콩 항쟁 세력들이 손을 내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친구다.
유엔의 실체
홍콩 문제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예컨대 6월 1일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중국대사관 앞에서 보안법 통과를 규탄하면서 이렇게 요구했다.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국제인권규약에 정면으로 반하는 홍콩 국가보안법 도입에 대하여 공동 대응에 나서라.”
유엔이 국제 협력과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기구를 표방하므로 유엔 개입이 보안법 문제 해결에서 유용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유엔에 대한 환상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미국과 영국이 홍콩 보안법 제정을 문제 삼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한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매우 부적절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미국이 유엔을 통해 중국에 공세를 펴는 것을 뒷받침하는 꼴이니 말이다.
유엔은 탄생 과정부터 이력을 보건대, 평화와 진보를 위해 노동자들이 이용할 만한 기구가 못 된다.
유엔은 언제나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도구였다. 유엔은 제2차세계대전 후 승전국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려고 만든 기구다.
설립된 지 얼마 안 돼, 유엔은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빼앗는 것을 인정했고 이스라엘 국가를 승인했다.
유엔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고 횡포도 엄청나다. 그래서 유엔과 그 유관기관들은 흔히 강대국(특히 미국)이 벌인 군사 개입 앞에 무력하다. 대표적으로, 미군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 유엔은 지켜보기만 했다. 또는 미국의 전쟁을 유엔의 이름으로 정당화한 적도 있다(한국전쟁).
유엔 평화유지군도 문제가 많았다. 1992년 소말리아에 파병된 유엔 평화유지군은 내전을 부추기고 소말리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다가 결국 소말리아인들에 의해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지금 유엔은 보호책임(인도주의적 개입의 새 이름)을 강조하며 중대한 인권침해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을 표방한다. 그러나 유엔의 보호책임 개념은 인권을 빌미로 한 서방의 제재와 군사 위협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결국 유엔은 나쁘거나 무능한 기구다. 따라서 유엔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진정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명백히 공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