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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연금 개악 계획

10월 12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 산하에 ‘국민연금 개혁과 노후소득 보장 특별위원회’(이하 국민연금 특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국민연금 특위가 문재인 정부의 연금 정책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애당초 국민연금 특위에 구속력이 없는데다 정부도 그 구실을 매우 제한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특위 논의를 무작정 끌고 갈 수는 없다”며 논의 시한을 제한할 것임을 밝혔다. 또 “복수의 정부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고 복수안을 조합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민연금 특위의 결정이 무엇이든, 국회 논의가 그 결정에 제약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대로라면 일각의 기대와 달리 국민연금 특위는 ‘의견 청취’ 기구에 그칠 공산이 크다.

문재인이 ‘사회적 합의’라는 약속조차 내팽개칠 태세를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말하는 ‘개혁’이 평범한 노동자들의 바람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문재인 정부는 두 달 전 ‘더 내고 지금대로 받는 안’과 ‘[이 안보다] 더 많이 내고 덜 받고 늦게 받는 안’ 중에 고르라는 황당한 ‘복수안’을 냈다. 전자를 선택하라는 건데, 즉 연금을 지금 수준대로라도 받으려면 보험료를 더 내라는 협박이다.

둘째, 문재인은 여기에 더해 ‘다층 노후 소득 보장’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국민연금, 기초연금 같은 공적연금 외에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민간연금을 확대하라는 얘기다. 국민연금 특위의 이름에도 ‘국민연금’ 외에 ‘노후소득 보장’을 병기한 이유다.

이는 1990~2000년대 세계은행, OECD 등이 각국에 권고한 신자유주의적 연금 삭감 가이드라인의 핵심 내용들과 일치한다. 연금 삭감으로 재정 지출을 줄이고, 보험료 부담을 노동계급에게 떠넘겨 기업주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한편, 노후 생계를 민간연금에 의존하도록 해 기업주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하는 게 목적이었다.

노동자들의 보험료 절반을 부담하는 기업주들도 보험료 인상에는 반대하지만 문재인은 한국 자본주의의 중장기 전망을 두고 이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여긴다. 615조 원에 이르는 연기금은 그런 설득에 효과적인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연기금이 주요 대기업의 주가를 떠받치는 구실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효과를 노리고 세계은행도 주요 선진국에 연기금을 늘리도록 권해 왔다.

신자유주의

민간연금 확대는 공적연금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연금을 약화시키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영국에서도 “양자의 병행 발전의 추구는, 훗날 대처 정부가 공적연금의 축소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김영순, 《코끼리 쉽게 옮기기 – 영국 연금 개혁의 정치》)

2010년 이후에는 특수직역연금(공무원연금) 개악과 연금 지급 시기 연장 방안 등이 세계은행과 OECD의 새로운 권고사항으로 추가됐다. 전자는 박근혜 정부가 2015년에 추진했다. 후자는 지금 유럽 등 선진국들에서 한창 추진되고 있고,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안에도 포함돼 있다.

그럼에도 문재인이 뭔가 개혁을 제공하는 것처럼 말한 것은 일종의 착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주요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공적 연금제도가 본격 도입되던 때에 신자유주의 정책이 함께 추진됐다. 그러다 보니 연금 제도 도입으로 생긴 노후 소득 개선 효과와 신자유주의적 개악이 어지럽게 뒤섞여 현 정부의 정책이 개선인지 개악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많다.

예컨대 문재인은 소득대체율(자기 평균 소득 대비 연금액)을 인상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인상이 아니라 삭감폭을 줄이는 것이라고 해야 정직한 표현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7년에 연금을 무려 3분의 1이나 삭감했는데, 반발 때문에 한번에 삭감하지 않고 20년에 걸쳐 조금씩 삭감하도록 했다. 문재인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삭감을 멈추겠다는 안을 (복수안 중 하나로) 내놓은 것뿐이다. IMF 이후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보험료 인상을 전제로 말이다.

이를 두고 개혁이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의 노인 빈곤이 워낙 심각해 OECD도 2016년에 한국 정부에 연금액이 더 낮아지면 안 된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요컨대 문재인이 내놓은 계획은 신자유주의적 연금 삭감 정책이다. 따라서 민주노총 등 노동조합들과 좌파는 문재인의 연금 개악에 맞선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

민주노총 지도부가 경사노위 참여 안건을 상정한 정책대의원대회는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다. 문재인 정부의 우경화와 친기업 일변도 정책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국민연금 개악 시도도 그런 불만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국민연금 개혁 논의 등을 위해 경사노위 참여를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비민주적인 처사일뿐 아니라 신기루를 쫓느라 투쟁 조직에 쏟아야 할 힘을 낭비하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문재인은 국민연금을 개혁할 뜻도, 국민연금 특위의 결정에 따를 생각도 없다. 그러기는커녕 기업주들의 이윤을 지키기 위해 연금 보험료를 인상하고 민간연금을 활성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려 한다.

‘사회적 대화’는 유럽의 주요 선진국 정부들이 연금 개악을 시도할 때마다 애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예컨대 프랑스 정부는 1995년 쥐페 정부의 연금 개악 시도가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으로 좌절되자 노동자들을 분열시킬 방법을 강구했다. 개악안에 쥐꼬리만한 개혁안 포함,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사회적 대화’에 끌어들이기 등이 그런 방안이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투쟁을 마비시켜서 2010년에는 기어이 개악을 관철시켰다. 이런 역사적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2010년 연금 개악에 맞서 파업에 나선 프랑스 노동자들 사르코지를 무너뜨릴 잠재력을 보여 준 이 투쟁은 '사회적 합의'에 매달린 노조 지도자들의 불필요한 후퇴로 결국 패배했다. ⓒ출처 Gabriel M.A(플리커)

민주노총은 10월 30일 국회 앞 집회 등을 시작으로 정부에 제대로 된 연금 개혁을 요구할 계획을 밝혔다. 민주노총이 발표한 ‘국민연금 6대 개혁안’에는 ‘국가 및 사용자 부담 강화’, ‘기초연금 내실화’ 등 꼭 필요한 개혁 요구가 담겨 있다.

그러나 정부와의 합의를 염두에 둔 것 때문인지 예전에 비해 온건해진 요구들도 있다. 먼저 문재인이 보험료 인상을 기정사실화하는데도 이를 명확히 반대하지 않는다. 공공운수노조 산하의 국민연금지부는 아예 보험료 인상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큰 문제다. 국민연금공단 노동자들은 당장 현장에서 다른 노동자들의 비난을 받게 될 텐데 말이다. 소득대체율을 50퍼센트로 인상하라는 요구를 나중으로 미룬 것도 지나치게 수세적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보험료 인상에 반대하고 소득대체율을 즉각 50퍼센트(혹은 그 이상)으로 인상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문재인이 이미 하겠다고 한 ‘국가 지급보증 명문화’를 가장 중요한 요구로 올려둔 것도 부적절해 보인다. 일부 활동가들은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 우파가 이를 악용할까봐 명문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급보증 명문화가 불신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법이야 나중에 다시 고칠 수도 있는 것이고 법대로 하지 않는 일도 벌어지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현재 노인들의 빈곤을 크게 개선하는 것이다. 집권 중에도 노인들의 처지에 냉담한 정부가 수십년 뒤의 노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다. 따라서 현재 노인들에게 충분한 연금을 지급하고 그들의 빈곤을 개선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한편, ‘공적연금강화 국민행동’(이하 연금행동)은 소득상한액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지금처럼 한 달에 434만 원 이상 버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보험료를 내도록 하는 것은 완전히 부당한 일이다. 이는 기업주와 부자들의 부담만 줄여 주는 효과를 낸다.

그러나 소득상한액을 650만 원으로 인상하라는 요구는 너무 온건하다.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의 보험료만 오르고 말 가능성이 크다. 아예 상한액 제한을 없애거나 적어도 건강보험 수준(7810만 원)으로 상한선을 올려 부자들의 부담을 늘리고 노동자·저소득층의 보험료 부담을 줄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