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구속 이후:
사법 적폐 청산에 필요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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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식 할아버지는 13년 만에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대법원 판결을 받아 내고 소감을 말했다. “혼자만 남아 슬프고 서럽다.”
양승태 대법원이 대미·대일 관계를 고려해 판결을 일부러 질질 끄는 동안 피해자 동료들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이다.
양승태 체제 아래서 벌어진 사법 농단의 본질이 (삼권분립 훼손 같은 권력 구조 문제가 아니라) 국가기관들이 사법권을 이용해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임을 이보다 더 잘 보여 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농단이 사실상 고의적 행위이자 범죄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문재인이 임명한 대법원장과 대법관들로 구성이 일부 바뀐 새 대법원 아래에서도 구 여권과 연계된 사법 농단 수사가 그동안 심각하게 방해받았다. 법원의 위상과 권력을 (외풍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동류 의식(계급 의식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에서였을 것이다. 법원은 대놓고 재판 개입 증거를 인멸한 유해용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또한 주거 안정을 해칠 우려가 있다며 양승태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두 번이나 기각했다.
그러다가 결국 강제징용 판결 사흘 전인 10월 27일에야 임종헌이 구속됐다. 임종헌은 법원 내 요직인 법원행정처 차장 등을 지낸 자로, 사법 농단의 실무 지휘자로 지목받아 왔다.
그동안 ‘합법적’으로 자기 방어를 해 오던 법원도 임종헌 구속영장 기각까지 하는 건 무리라고 본 듯하다. 여론 악화 때문에 특별재판부라도 도입되면, 사법권을 독점해 온 법원 권력이 손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법까지 만들어 설치될 특별재판부가 양승태 일당을 무죄 판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임종헌 구속이 꼬리 자르기 아니냐는 의심이 크다. 이른바 사법권 독립과 권력의 추악한 실체를 지난 몇 달 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검찰이 비공개로 조사한 판사들이 80명 남짓이라는데, 이들 다수가 임종헌을 책임자로 지목했다고 한다. 이는 고위 판사들의 카르텔이 흔들리는 것을 보여 주는 일이지만, 또한 임종헌 선에서 수사 확대를 막자는 공감대가 판사들 사이에 형성된 탓일 것이다.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면 양승태는 물론이고, 임종헌의 직속 상관인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지낸 박병대·차한성·고영한 등과 각각의 거래 재판에 임했던 판사들 모두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종헌은 구속 나흘째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검찰이 임종헌 구속 기한인 20일 안에 그 윗선인 양승태 등의 죄를 입증해 기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임종헌이 구속됐어도 법원에게는 무죄나 집행유예를 판결할 기회가 남아 있다.
그러나 꼼수일지라도 법원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인사를 구속한 것은 대중의 적폐 청산 염원이 아직은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는 뜻일 게다.
애초에 노동자·서민의 거대한 운동으로 전임 우파 정권이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추악한 사법 적폐의 비밀들이 폭로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요컨대,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이 중요하다. 민주노총의 11월 투쟁이 사법 적폐 청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강력한 반우파 정서 때문에 우파에게 돌파구가 확 열리지는 않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10월 30일 스스로 공개한 보고서도 자신들이 정권을 잃은 요인으로 강경 대북·안보 노선을 지적했다. 즉, 너무 우파적이라서 지지를 잃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우파들은 문재인 정부의 개혁 부진을 이용해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문재인의 우선회로 실망감이 커지면서 정치적 틈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운동 지도자들은 문재인에게 지지와 협력을 제공할 것이 아니라 그의 우선회에 맞선 투쟁으로 그 공백을 메워야 한다. 그래야 세력균형을 더 왼쪽으로 이동시켜 적폐 청산에도 유리하다.
사법 농단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
사법 농단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부당한 재판 거래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국가 권력의 피해자들이었다. 쌍용차 노동자처럼 정부와 사용자의 대량 해고에 저항한 노동자들이나, 유신 독재 피해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위안부’ 할머니, 세월호 유가족, 전교조, 진보당 등.
사법 적폐 청산이 노동자·서민층의 정의이고 염원인 이유다.
이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최소한의 도리이자 출발점은 재판의 원상 회복일 것이다. 그러려면 재심이나 지연된 재판이 신속하게 진행돼야 하고, 억울한 구속자들이 석방돼야 한다. 또한 재판이 아닌 불이익과 사찰 관련 문제는 신속히 국가의 사과와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사법 농단 세력을 철저히 수사해 법정에서 강력하게 단죄하는 것이다. 물론 철저한 사법부 개혁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적 단죄로써 지배계급이 함부로 저항 세력을 탄압할 수 없게는 할 수 있다. 피해자 구제는 그 하나다.
특별재판부를 어떻게 봐야 할까?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특별재판부 설치 법안을 내놓았다. 그 안에 따르면, 대한변협과 이 재판을 맡을 법원(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등법원)의 판사들이 자기들 안에서 판사들을 추천하고, 대법원장이 그중 3명을 골라 임명하자는 것이다.
법원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새로운 합의부를 신설하는 형식이므로 위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파의 위헌 시비의 핵심은 유죄 판결을 목적으로 재판부를 구성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마녀사냥식 여론 재판으로 보이게 하려는 속셈이다. 그러나 현행법 하에서도 재판부 기피나 제척이 가능하므로, 양승태 ‘장학생’들에게 재판을 맡기지 말자는 법이 꼭 위헌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문제는 사법 농단 고위 판사들에게 유죄를 판결할 수 있느냐다. 대중 다수가 기존 법원을 못 믿겠으니 특별 재판부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게 단죄를 하고 싶어서다.
재판 거래 건으로 검찰에 비공개 출석한 판사만 최소 80명이라는데, 법원의 재판부 무작위 배당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법원 스스로 압수수색·구속 영장 기각으로 판결 의중을 미리 선보이지 않았던가.
특별재판부 설치 제안은 사법 농단의 계급적 본질을 꿰뚫어 본 노동자·서민층의 불신을 반영한 것이다. 우파가 박주민 안이 특별재판부의 1심을 국민참여재판으로 하도록 한 것에 특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파는 만에 하나 특별재판부가 구성되더라도 확실하게 유죄와 실형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하거나, 유죄 판결을 인정하지 않을 속셈으로 지금 위헌 시비를 거는 듯하다.
법원 권력의 일부인 현직 판사들 중에서 선발되는 특별재판부의 판사들은 계급적 압력 속에서 판결하게 될 것이다. 결국 재판부 구성 방식보다는 어느 사회세력의 압력이 더 큰지가 수사와 판결에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법원 개혁?
지난 반년 간 고위 법관들은 대부분 수사에 비협조적이었다. 사법 농단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과 당시에 정권을 쥔 우파, 기업인들의 이해관계가 계급적으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일부 바뀐 현 대법원과 문재인 정부도 사법 적폐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앞에서 설명). 검찰 수사가 지지부진한 것에 정권의 의지 부족도 한 요인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 제기된다. 여기에도 계급 문제가 있는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 자신이 6월에 내린 친기업적 판결도 우파 대법원이 법 개악을 기다리며 7년간 판결을 미룬 적폐를 계승한 것이었다. 그 판결은 휴일 초과 근무에 초과수당을 할증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 판결이 가능하도록 민주당은 2월에 법을 개악했고 대법원이 이를 받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김명수 대법원은 이석기 전 의원 등 진보당 수감자들을 석방·사면하지 않는다.
김명수 대법원은 10월 30일, 표현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며 변희재의 이정희 전 진보당 대표 종북 낙인 찍기를 무죄 취지로 판결했다. 법원은 삼성의 무노조 공작 수사를 방해하는 판결을 내려 왔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도 사법 적폐 청산 같은 사법부 개혁이 충분히 실행될 수 없다.
진정한 사회 혁명이라면 애초에 기존 국가를 대체할 새 국가의 일부로서 완전히 새로운 재판부를 민주적으로 구성해 구 체제의 부패 범죄·비리들을 처리할 것이다. 대중의 개혁 염원을 실현하려면 운동은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