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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전선 천연옥 씨에게 답한다:
옛 소련 블록의 사회에서 성평등은 실현되지 않았다

현장실천사회변혁노동자전선(이하 노동전선)의 소식지 《전선》 122호에 천연옥 씨(이하 존칭 생략)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 혁명의 한 쪽 수레바퀴’라는 글을 기고했다. 천연옥은 민주노총 부산본부 부본부장과 비정규위원장을 지낸 바 있는 노동전선 회원이다.

그 글은 변혁당 기관지인 〈변혁정치〉 108호에 실린 지수 씨(이하 존칭 생략)의 글(‘계급 환원론을 넘어서’)과 이를 비판한 필자의 글(‘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은 계급 환원론이 아니다’, 〈노동자 연대〉 330호)에 대한 반론이다.

마르크스주의를 계급 환원론으로 치부한 지수의 주요 논거 하나는 옛 소련 사회에서 여성이 해방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 소련 사회는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도 없다. 스탈린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농업의 강제 집산화와 억압적 공업화를 시작한 1928년 이후 소련은 더는 (변질된)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로 바뀌었다. 필자는 위에 언급된 글에서 이 점을 설명했다. 소련 국가자본주의가 서구 시장 자본주의와 경쟁하면서 노동계급(그리고 인민 일반)의 필요가 자본 축적에 종속된 결과, 노동계급 착취와 여성 차별이 또다시 벌어진 것이다.

이런 필자의 주장에 대해, 천연옥은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환원론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정반대 근거를 댔다. 옛 소련 자체와 동독·중국·북한·쿠바를 사회주의로 보며 이들 나라의 사회에서 성평등이 거의 실현됐다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를 구별한 뒤, 후자를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이름으로 자본주의화된 구 소비에트 국가들”로 지칭한다. 그리고 “20세기 사회주의”에서는 여성해방을 위한 여러 조처들이 시행됐음을 길게 서술하며 그 사회가 서구 사회보다 우월했음을 보여 주려 한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가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화”됐다는 것인지 천연옥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질적으로 우월한 체제라면서도, 어떻게 이런 역전이 가능한지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1991년 옛 소련 붕괴 전에도소련 자체와 동유럽·쿠바·중국·북한 등지의 스탈린주의 체제 하에서 여성들은 해방이나 평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서구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소련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착취와 차별 없는 사회를 향한 거대한 전진이었다. 혁명 직후 여성해방을 위한 조처들이 대거 시행됐다. 그러나 서방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공과 러시아 국내 반혁명 세력들의 반격으로 일어난 내전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가 일어나고(혁명을 경험한 노동계급 상당수가 포함) 경제가 붕괴하면서, 여성해방을 위한 자원이 극도로 빈약해져 그 시도는 더 전진할 수 없었다.

러시아 혁명이 쇠퇴하는 가운데 부상한 관료층의 우두머리 스탈린은 1927년경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는 1928~1929년에 억압적 공업화와 강제적 집단농장화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 베테랑 볼셰비키를 모두 살해하고 트로츠키를 국외 추방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자본 축적 경쟁과 군사적 경쟁에 뛰어들면서 소련은 국가자본주의 사회이자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한다.

생산이 무기 경쟁과 자본 축적에 종속되면서 대중의 필요, 특히 여성의 필요가 무시됐다. 중공업 위주의 산업화로 인해, 여성의 부담을 덜어 주는 데 관건이 되는 경제 부문, 가령 주택 공급, 소비재, 서비스 부문이 가장 뒷전으로 밀려났다.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이 실시되기 직전인 1927년 전체 공업투자 가운데 소비재는 55.7퍼센트인 반면, 생산수단은 32.8퍼센트였다. 이 비중은 그 뒤 완전히 역전됐다. 1932년 생산수단이 55.3퍼센트를 차지했고, 이 비중은 1950년 68.8퍼센트에 이르기까지 계속 증가했다.1

1928년 이후 제노텔(혁명 뒤 여성해방을 촉진하고자 볼셰비키 정부 내에 만든 여성부)은 거의 무용지물이 됐다. 국가의 경제 목표에 완전히 종속돼 1930년 세계여성의 날에 “100퍼센트 집산화!”라는 구호를 제시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제노텔은 곧 해산 당했는데, 여성해방을 상징하는 기구여서 스탈린의 경제 정책에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천연옥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들의 권리를 깨닫게 되었고 일, 교육, 사회적 활동 등에 완벽하게 편입되었기 때문”에 제노텔이 해체됐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옛 소련 당국의 홍보와 선전을 되풀이한 것일 뿐이다.

1930년대를 거치면서 여성 노동자 수가 급증했는데, 1940년경이 되면 여성 노동자는 전체 노동인구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했다. 하지만 대량 고용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지는 못했다. 착취가 강화되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특별 보호 규정이 없어지거나 무력화됐던 것이다(야간노동과 지하 작업 금지 폐기 등). 스탈린 관료는 동일임금을 공격하며 성과급 제도를 도입했고, 노동강도를 엄청나게 강화시켰다.

1930년 소련의 광산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 1930년대에 여성의 야간노동과 지하작업 금지 조항이 폐지되면서 어린 여성들을 포함해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탄광에서 장시간 일했다

제1차 5개년계획(1928~1933년)이 시행되면서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은 강제적으로 하락했다. 1928~1932년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49퍼센트나 하락했다. 소득 감소 때문에 여성들은 가정 밖의 노동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관료는 경제 성장을 위해 여성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할 뿐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가족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도 할 것을 요구했다. 1930년대 들어 성적 자유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일어났고, 여성에게 출산이 장려되고 어머니로서의 의무가 강조됐다.

러시아 혁명 직후 세계 최초로 낙태가 합법화됐지만, 1936년에는 불법화됐다. 여성의 요구만으로도 낙태를 할 수 있게 된 1920년의 낙태법과 달리, 1936년의 법은 여성의 생명이 위협받을 때만 의사의 허락을 받아 낙태를 하게 했다. 불법적으로 낙태 시술을 한 사람은 최소 2년형을 받을 수 있었고, 낙태한 여성은 많은 벌금을 내게 됐다. 낙태 불법화는 1955년까지 유지됐다.

천연옥은 낙태 불법화가 “스탈린이 아니라 소비에트 여성들의 요구에 의해서” 이뤄졌고 남성들의 낙태 강요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며 마치 여성을 위한 것인 양 변호한다. 그러나 스탈린이 철권통치 하던 시대에 이뤄진 낙태 불법화가 스탈린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사회 구조에 대한 무지를 반영할 뿐이다. 여성의 건강을 위해 낙태를 금지했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낙태를 금지해도 적잖은 여성들은 자신이나 가족의 미래를 위해 원치 않는 임신을 끝내고자 낙태를 선택하는 법이다. 그럴 때 낙태 금지는 제대로 된 시술과 처방을 받지 못해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위험에 빠뜨릴 뿐이다. 실제로 소련에서 낙태 불법화 뒤에도 낙태를 하려는 여성이 여전히 많았는데, 1939년에는 낙태 합법화 시기보다 더 많아졌다. 1936년 이후 이뤄진 낙태의 90퍼센트가 병원 밖에서 불법적으로 이뤄졌는데, 여성들은 불법 낙태 시술로 감염, 복막염, 천공, 출혈 등 온갖 합병증에 시달렸다.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2

낙태 불법화는 스탈린 체제가 전통적 가족제도를 복원하려고 벌인 더 폭넓은 공격의 일부였다. 1936년 가족법은 ‘어머니의 의무’를 매우 강조했고 가족의 강화와 안정을 요구했다. 결혼 등록을 의무화했고, 이혼 절차를 강화하고 벌금을 부과해 이혼을 어렵게 만들었다. 동성애 처벌도 부활했고, 혼외관계를 처벌하면서 사생아와 간통이라는 개념도 부활했다.

1944년부터 국가는 아이를 많이 낳는 여성에게 ‘조국 영광 메달’을 주기 시작했다. 6명을 낳으면 1등급, 7명을 낳으면 2등급, 10명 이상을 낳으면 ‘어머니 영웅’ 지위를 부여했다. 국가적으로 전통적인 성별 관념을 고취시키는 가운데 1943년~1954년 청소년들의 남녀공학마저 다 사라졌다.

스탈린은 여성에게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강조했다 아이를 많이 낳는 여성에게 수여된 훈장(왼쪽), 자식을 10명 이상 낳은 어머니를 영웅으로 칭송한 1944년 소련의 공식 포스터(오른쪽)

소련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여성 고용이 크게 늘어나 1980년대에 소련 여성의 노동 참여율은 산업국가들 중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여성의 85퍼센트 이상이 전일제 노동자나 학생이었으며, 여성은 전체 노동인구의 51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여전히 차별받았다. 소련 공산당은 여성에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보장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여성 전일제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의 65~70퍼센트에 불과했다. 서구처럼 여성들이 임금이 낮은 직종에 집중되거나 낮은 등급의 일자리에서 일했기 때문이다.3

천연옥은 옛 소련에서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낮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소련에서 임금격차는 차별의 증거가 아니라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에 낮은 임금을 주는 사회제도 속에서 여성이 덜 힘든 노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여성 노동자 차별을 사실상 합리화하는 주장이다. 옛 소련의 여성들이 주로 ‘정신노동’에 종사한 것은 전혀 아니다. 여성은 대개 임금이 낮은 산업부문에 고용됐는데, 대부분 정신노동과 거리가 먼 업종에서 일했다. 여성은 직물 노동자의 85퍼센트, 조리 노동자의 90퍼센트, 봉제 노동자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또, 간호원과 보모의 98퍼센트, 타자수와 비서직의 97퍼센트가 여성이었다. 이런 성별 분업은 서구의 자본주의와 동일하다.4

소련 여성의 낮은 임금은 여성들이 숙련도가 낮은 일자리에 고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교육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고용상의 차별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은 단순히 옛 관념의 유산이 아니라 지배계급(소련 관료)이 노동계급 착취의 수준을 높이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한 의식적 노력의 일부였다. 스탈린 집권기에 노동자들은 여성과 남성 가릴 것 없이 생산성 향상 압박 속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받으며 극도로 착취·억압당했다. 무기 부문을 증강하며 축적 압력이 계속되고, 부가 국가 관료의 통제 하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첫 5개년계획 기간에 실질임금은 절반이나 줄어들었고, 나중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조차 여전히 매우 낮았다. 1950년 전체 실질임금 수준은 1928년 수준의 60~80퍼센트에 그쳤고, 1950년대 중엽이 돼서야 1928년 수준을 넘어섰다.5

국가는 저항의 소지를 모두 없애기 위해 살인, 고문, 투옥, 강제노동수용소 등 가혹한 탄압을 했다. 노동규율을 강제하고자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1980년대 초에도 경찰은 일을 빼먹고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이 있는지 영화관에서 확인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조직하는 것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공식 노조는 생산성 향상에 협조하는 등 국가의 도구(어용) 노릇을 했다. 소비에트 여성위원회 같은 기구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조직들이 마치 여성 대중의 의사를 대변한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옛 소련의 여성 노동자들은 서구의 여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일터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집에서 양육·가사의 부담을 주로 짊어졌다. 많은 어머니들이 보육시설을 이용할 수 없었다. 미취학 연령 아동의 고작 절반가량만이 1년짜리 보육시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성들이 주당 41시간을 일했기에 보육시설 부족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됐다.

반면, 상층 계급 가정의 삶은 판이했다. “당과 군대의 엘리트, 인텔리 예술가와 과학자는 보통 가정부와 요리사를 두는 것으로 알려졌다.”6 이들은 노동계급과 농민이 겪은 고질적인 소비재 부족도 겪지 않았다. 특권층 가족들은 특별 상점을 통해 물품을 충분히 공급받았다.

그러나 노동 대중은 생필품을 공급받기 위해 매일 수 시간씩 긴 줄을 서야 했고, 이 일은 주로 여성들이 맡았다. 대다수 여성들은 극심한 주택난, 만성적인 생필품 공급 부족,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양육과 가사 부담으로 허덕였다.

동독

천연옥은 통일 전의 서독과 달리 동독은 성평등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률들, 사회적 돌봄 인프라 수준, 높은 여성 고용률을 그 근거로 든다.

그러나 동독의 여성 고용률과 보육시설 공급이 서독보다 높았다고 해서 동독 여성들이 해방된 삶을 누린 것은 전혀 아니다. 노동력 부족 때문에 국가가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를 높이는 데 적극적이었고 이를 위해 보육시설을 늘렸지만, 동독에서도 여성들은 직장에서 노동하는 한편 가정에서 양육과 가사를 주로 맡았다.

여성의 자유와 평등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낙태는 옛 동독에서도 수십 년 간 금지됐다. 동독 건국 이듬해인 1950년 9월 낙태 금지법이 만들어졌다. 낙태는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생명이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거나 부모 중 한 명이 심각한 유전적 조건에 있는 경우) 당국의 심사를 거쳐 허용됐고, 불법 낙태는 처벌받았다. 그럼에도 1950~1955년 매년 7만~10만 건의 불법 낙태가 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7 많은 여성의 생명과 건강이 위협받았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옛 동독 여성의 노동 참여율은 옛 서독에 비해 훨씬 높았지만, 서구의 자본주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특정 직종에 여성들이 집중됐고 여성 임금은 남성보다 낮았다. 동독 여성 임금은 1989년 남성 임금의 약 70~80퍼센트에 그쳤다.8 이것은 당시 서독보다는 높은 수치였지만, 동독의 법률에 적힌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음을 나타낸다. 임금이 남성보다 낮아서 여성들은 연금도 남성보다 적게 받았다. 여성의 교육 수준은 남성보다 높았지만 승진에서도 여성이 뒤처졌다. 고위직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적었다.

동독 등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에 세워진 국가들(‘인민민주주의’)은 아래로부터 노동자 혁명의 결과가 아니었다. 1945년 독일이 연합국에 패배한 뒤 강대국들 간 분할의 산물로 소련 군대가 동유럽으로 진군했고, 동유럽 각국의 공산당은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다.

그 뒤 동유럽 각국에서 소련 사회를 본따 ‘계획 성장’이 도입됐는데, 중공업 건설에 총력을 다하면서 소비재 부문의 성장은 방기됐다. 그 결과, 1948~1953년 동유럽 전반에서 생활수준이 하락했다.9

옛 소련과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도 노동계급은 국가와 생산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동유럽 국가들의 축적 수준이 매우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동유럽 국가들의 국민생산 중 축적의 비율은 공식 통계로 25퍼센트 이상이었고, 공식 가격 메커니즘의 왜곡을 고려해 다시 계산한 수치로는 약 40퍼센트에 이르렀다.10 대중의 소비는 극도로 억제됐고, 양육과 가사를 주로 책임진 여성 대중의 부담은 더욱 컸다.

동유럽 국가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국가 관료의 특권과 부패, 만성적 소비재 부족, 정치적 민주주의 부재 등에 대한 대중의 오랜 불만은 결국 1989년 민주주의 혁명으로 분출해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들이 잇달아 붕괴했다. 그 여파로 1990년 옛 동독도 붕괴해 옛 서독으로 흡수 통일됐다. 옛 동독 사회를 오늘날 다시금 여성이 성취할 본보기처럼 제시하는 것은 실로 몽매한 주장이다.

중국

1949년 신중국(이하 중국)은 동유럽의 체제와 달리 혁명을 통해 세워졌다. 그 혁명은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국민국가를 세운 진보적인 사회 혁명이었다. 하지만 노동자 국가를 세운 노동자 혁명은 아니었다. 물론 혁명 뒤 몇 년 간 여성에게 이로운 개혁들이 시행됐다. 처음으로 여성들이 집 밖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이 통과됐다. 이혼의 권리와 토지 소유권, 더는 남성의 재산으로 간주되지 않도록 하는 여러 권리도 보장받았다. 조혼과 정략결혼을 금지하는 법도 통과됐다.

그러나 중국 국가 관료들의 미사여구와 달리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1949년 혁명은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주도하고 농민의 지지를 받은 민족해방 혁명이었지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노동자·농민의 요구와 필요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강력한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중국 공산당의 목표에 늘 종속됐고 여성 차별은 중국에서 새롭게 구조화됐다.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운동 당시 농민 여성 대약진운동 실패로 대기근이 일어나 3년간 2천7백만~3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1955년 마오쩌둥은 인민공사를 추진하면서 여성이 대거 생산 활동에 참가할 것을 강조했다. 전국 여성의 95퍼센트가 인민공사에 소속돼 농업, 어업, 목축업, 임업 등의 일을 했다. 집단농장에서 일을 해 ‘노동점수’를 얻어야만 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출산 직후 일터로 돌아와야 했다. 이것은 장기간 많은 건강 문제를 야기했다. 농촌 대부분에서는 집단 보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노인들이 아이들을 돌보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아이들을 혼자 내버려 두기도 했다.11

도시에서는 보육시설 등의 제공이 농촌보다 나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렸고 여전히 양육을 하면서 일도 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졌다. 양육과 가사를 주로 여성이 맡는 현실은 여성 노동자 차별로 이어졌다. 한 연구자는 1981년 중국 현지 조사 당시 공장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가 이미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여성들은 가사노동 등 여러 의무 때문에 우수한 노동자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다.12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법에나 있을 뿐이었다. 베이징과 샤오싱에 있는 남녀 236명(정부 관리들이 선택한 표본)의 수입지수를 보면 여성은 남성 평균의 71.7퍼센트만 받았다. 이 수치는 당시 미국(58.6퍼센트), 영국(66퍼센트), 캐나다(65퍼센트)보다 높았지만 스웨덴(88.7퍼센트)보다는 낮았다.13

도시에서 중공업 숙련직 일자리는 대부분 남성에게 배정됐고, 여성들은 흔히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직종에 고용됐다. 여성들이 더 취약한 조건에 있었기에 1990년대에 많은 국영기업들이 민영화나 구조조정을 할 때 여성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여성이 도시 노동자의 3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당시 해고된 노동자의 약 69퍼센트가 여성이었다.14

‘개혁개방’을 단행한 1979년부터 실시한 한 자녀 정책은 매우 억압적이었다. 많은 인구를 경제 발전의 걸림돌로 여긴 국가는 한 자녀 정책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벌금을 부과했고 일자리를 박탈했다. 여성에게는 낙태와 불임 수술이 강요됐다. 이후 출산율 감소로 청년 인구가 크게 부족해지자 2016년 중국 국가는 한 자녀 정책을 공식 포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가 한 가구당 두 자녀 출산만 허용하며 여성의 출산을 통제하고 있다.

쿠바

부패한 친미 독재 바티스타 정부를 무너뜨린 사회 혁명(1959년)으로 진정한 개혁이 실시됐다. 쿠바의 보건과 교육제도의 가치는 쿠바 망명자조차 인정했을 정도다. 그러나 쿠바 혁명도 중국 혁명처럼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간계급 지식인이 이끈 민족 해방 혁명이었고, 혁명 뒤 국가자본주의 건설로 나아갔다. 혁명 뒤 3년 이내에 경제의 주요 부문을 국유화했지만, 노동자 통제는 조금도 없었다.

천연옥은 성별 임금 차이가 없고 낙태가 합법이라는 등의 이유로 쿠바가 “무척 성평등한 국가”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현실과 크게 다르다.

쿠바 여성들은 결코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받지 않았다. 1980년대 중엽에 평균 급여액 이상을 받은 사람 중에 남성은 62.6퍼센트였지만 여성은 38.6퍼센트에 그쳤다. 1990년대에는 경제 위기의 영향으로 빈민 중 여성들이 더 많았다.15

혁명 뒤 쿠바 정부는 여성을 사회적 노동에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고 이것은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정부는 특정 직업에 대한 여성 참여를 제한했다. 여성의 건강에 해롭다며 쿠바 노동부는 1976년 300개 직업에 여성의 참여를 금지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의 실제 목적은 일시 해고되거나 실업자인 남성 노동자를 여성 실업자보다 우선 배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1980년대 중엽에 인구 변화와 경제 상황, 공식 여성 단체인 쿠바여성연맹(FMC)의 반대 때문에 여성에게 금지된 직업 항목을 5개로 축소했다.

쿠바 여성들은 여전히 양육과 가사의 대부분을 담당한다. 천연옥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것을 남성의 의식 문제로 돌릴 뿐 쿠바 사회의 구조가 여성에게 이중 부담을 강요한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쿠바 정부는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보육시설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전부 여성으로, 최저 수준의 임금(평균 임금의 77퍼센트)을 받았고, 보육시설 공급은 일하는 어머니 수에 비해 크게 못 미쳤다. 1962년 쿠바의 무상 공공 보육시설은 여성 10명 당 한 자리만 제공했다. 신규 보육시설 건설이 늘 여성 고용 증가에 뒤처졌기에 이 비율은 1990년대까지 유지됐다.16

보육시설 부족 등으로 대다수 여성들은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집에서 양육과 가사도 해야 하는 이중 부담에 시달렸다. 사실, 여성들은 많은 경우 무보수의 ‘자원 노동’에 참여하도록 요구받았기에 삼중 부담에 시달렸다.

1970년대에 쿠바 대중은 생산 증대를 위해 한 달에 두 번 토요일에 일해야 했는데, 보육시설은 그때 문을 열었지만 학교는 문을 열지 않았다. 공식 여성 단체인 FMC가 토요 노동에서 여성을 제외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카스트로는 나라가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10대 소녀나 숙모, 할머니 같은 대가족 성원들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집에 남고, 사적인 보육 제공이 은밀하게 이뤄졌다.

여성의 이중 부담이 매우 커서 이직률이 높았다. 1969~1974년에 노동자가 된 여성 70만 명 중 50만 명이 일을 그만뒀다.17 법은 고용상 여성 차별을 금지했지만, 경영자들은 여성보다 남성이 더 믿을 만한 노동자라며 임금, 승진 등에서 계속 여성을 차별했다.

주택 부족도 심각했다. 주택난이 하도 심해서 1953년~1995년 사이에 손자와 조부모가 같이 사는 가정이 갑절로 늘었을 정도이다. 청년들은 결혼을 해도 새 집에서 함께 살지 못하거나, 이혼한 커플이 흔히 따로 살 수도 없었다. 복닥거리는 집에서 젊은이부터 노부모까지 함께 살다 보니, 가족 성원들의 긴장과 갈등이 증대해 여러 문제(높은 이혼율, 가정 폭력 등)를 낳았다.18 식량 부족에다 가전제품도 부족하고 질이 열악했는데, 이것은 특히 여성들의 부담을 높였다. 1980년대 말 긴축 조처들이 도입되면서 노동계급 여성들의 조건은 더욱 악화됐다.

낙태 문제에서도 쿠바는 이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1938년 쿠바의 낙태법은 임산부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낙태(강간에 의한 임신이나 선천적 장애를 피하려는 경우)만 허용했다. 1959년 혁명 승리 뒤 몇 년 간 카스트로 정부는 오히려 이전의 낙태 금지법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그 결과 여성의 자가 낙태나 뒷골목 낙태가 증가해 사망자가 늘어났다.

정부는 1965년, 방침을 바꿔 의사들이 다시 낙태를 할 수 있게 허용했다. 그러나 그때도 여성은 여전히 남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낙태 처벌은 1979년이 돼서야 공식적으로 없어졌다. 그 뒤 임신 10주까지 의사의 승인 하에 낙태가 허용됐다. 2·3기 낙태는 병원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낙태 허용 범위가 혁명 직후보다 상당히 늘었지만 쿠바 국가는 여전히 여성의 낙태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1979년 임신의 약 40퍼센트가 낙태로 끝나자 카스트로는 여성들이 낙태를 피임의 한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비난하면서 처벌을 위협했다. 1980년대 말 쿠바의 대중매체는 낙태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도덕적 압박을 받았다. 여성 1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여성의 절반이 낙태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을 발견했다.19

쿠바에서 낙태가 여성들에게 피임을 보완하는 수단이 아니라 출산을 조절하기 위한 주된 수단으로 이용된 데는 이유가 있다. 성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하고 성교육에 대한 저항이 큰 구실을 한다. 고질적인 피임 도구 부족도 작용한다.

쿠바 정부는 사회주의를 자처하며 평등 이데올로기를 이용했지만 지배 관료는 노동계급의 노동을 착취했고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계속 여성들에게 전가했다. 다른 스탈린주의 국가 하에서처럼 노동자나 여성의 독립적 조직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북한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에서 여성에게 이로운 개혁들이 실시됐다.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하게 토지를 분배하고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했다. 강제 결혼 금지, 이혼 허용, 여성의 상속권 보장 등 여러 개혁입법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여성 차별은 북한의 사회 구조 속에 다시 뿌리를 내렸다.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북한 국가는 급속한 산업화를 추구해 나갔다. 그래서 모든 자원을 특히 중공업에 쏟아부었다. 1953년부터 시작된 3개년계획 기간에 중공업과 경공업의 투자 비율은 무려 81.8 대 18.2였다. 이런 중공업 우선 발전 노선은 196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북한에서 국가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김하영이 쓴 《북한은 어떤 사회인가? ― 북한 체제에 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를 참조하시오.)

북한 관료가 강박적으로 생산수단 축적에 나서고 국방비에 막대한 자금이 지출되면서 인민의 소비는 희생됐다. 한국전쟁 이후 10년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25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가혹한 희생을 치렀다. 고속 성장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인상되거나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이었다.

중공업 우선 노선 때문에 소비재 부족이 심각해졌고, 이것은 인민 전체에 고통을 주었고 특히 여성들의 삶을 매우 힘들게 만들었다. 여성들에게 양육과 집안 살림을 돌보는 책임이 주로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산업화에 나서면서 이혼 규제 등 통제를 강화했다. 1956년 협의이혼을 폐지하고 재판상 이혼만 허용하기로 했다. 임신 중이거나 생후 1년 미만의 자녀가 있는 여성은 이혼 소송도 제기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에는 벌금까지 물렸다.

북한 당국은 여성이 노동자가 되도록 독려했다. 이를 위해 탁아소 등을 상당히 지었지만, 여전히 양육과 가사는 주로 여성의 책임으로 남았다. 북한 정권은 ‘혁명 투사를 길러 낼 어머니의 책임감’이 여성의 최고 미덕이라며 여성에게 가정의 의무를 강조한다.

북한 당국은 노동자들에게 생산성 증대 압박을 가했는데, 정부 공식 여성단체인 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여맹)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매일 1시간씩 일찍 출근하고 100퍼센트 출근할 것을 압박했다. 그러면서도 여성들이 노동을 이유로 양육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질책했다.20

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 노동자 남한 등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일터와 가정 일의 이중 부담에 시달렸다

이렇게 여성에게 어머니 역할이 강조되는 것은 직장에서 여성 차별로 이어졌다. 여성은 남성보다 보수가 적고 사회적 지위도 낮은 직종에서 일했다. 1980년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 평균 임금의 84퍼센트에 그쳤다.21 1990년대 심각한 경제 위기와 홍수로 대기근이 일어나며 북한 대중과 여성들이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은 북한 당국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잘 알려졌다.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지만 북한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맺으며: 스탈린주의 체제 하의 사회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옛 소련, 동유럽, 중국, 쿠바, 북한 등 스탈린주의 체제 하의 사회를 착취와 차별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로 봤던 좌파들은 그 사회의 실상이 드러나자 큰 환멸에 빠졌다. 1970년대 서구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부상한 것도 스탈린주의 체제 하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를 보며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무계급 사회로 여기다 보니, 그 사회의 여성 차별을 계급 사회와 무관한 남성의 본성이나 심리에서 찾는 급진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이론을 수용하게 됐고 결국 개혁주의로 나아갔다.

천연옥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그의 주장으로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제대로 반박할 수 없다. 스탈린주의 체제 하에서 여성들이 차별받고 열악한 처지에 있었다는 기록과 증언이 차고 넘친다. 그 사회에서 성평등이 거의 실현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이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해 오해를 심어 주거나 반감을 사기 쉽다. 옛 소련과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체제가 1980년대 이후 심각한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위기를 겪으며 붕괴한 상황에서 그 체제를 미화하는 것은 더더욱 터무니없다.

많은 좌파들이 잘못 가정하는 것과 달리, 국유화가 사회주의의 지표가 될 수는 없다. 1930년대 이후 서구 자본주의에서도 폭넓은 국유화가 단행됐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후발 공업국들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 압력 속에서 가용 자원을 집중하며 강력한 경제를 건설할 유일한 방법으로 국유화를 흔히 감행했다.

스탈린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계급은 국가를 통제하기는커녕 기본적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노동수용소, 경찰의 일상적 감시, 여성·성소수자·민족 차별 등 갖가지 차별과 박해가 존재했다. 국가 관료가 생산수단과 축적 과정을 지배하며 서구 자본주의 나라들과 군사적 경쟁을 벌이면서 노동계급을 착취했고 대중의 소비는 축적에 종속됐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의 해방이나 평등이 실현될 리는 만무했다.

오늘날 불황이 길어지고 깊어지며 각국의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의 조건을 공격하고 일터와 가정에서 여성들이 진 부담도 증가하며 차별도 지속되고 있다.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적 전망을 갖고 여성해방 투쟁을 벌이려면, 사회주의는 위로부터 도입될 수 없고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혁명과 권력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옛 소련과 동유럽 등 국가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과 여성들의 실제 조건은 그 사회가 서구 자본주의와 본질상 동일한 착취·차별 체제에 의해 돌아갔음을 보여 준다.


참고 문헌

  • 김어진 2018, ‘북한의 여성과 사회변혁(1) ―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 말까지’, 《마르크스21》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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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하영 2010, 《북한은 어떤 사회인가? ― 북한 체제에 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다함께.
  • 김해순 1992, ‘옛 동독의 여성정책과 통일 후 옛 동독여성의 문제’, 《여성연구》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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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구 2016, ‘중국 여성의 불평등한 현실’, 〈노동자 연대〉 180호.
  • 킨케이드, 샐리 2018, ‘중국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마르크스21》 28호.
  • 하먼, 크리스 1994,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 1945~1983》,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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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ynes, Mike 2002, Russia: Class and Power 1917-2000, Bookmarks.
  • Lapidus, Gail Warshofsky, 1988, “The Interraction of Women’s Work and Family Roles in the USSR”, Women & Work, Vol. 3.

  1. 로젠버그 1991, 92쪽.↩︎

  2. Goldman 1995, p.294.↩︎

  3. Lapidus 1998.↩︎

  4. 로젠버그 1991, 13쪽.↩︎

  5. Haynes 2002, p.175.↩︎

  6. Haynes 2002, p.154.↩︎

  7. Harsch 1997, p.59.↩︎

  8. 김해순 1992.↩︎

  9. 하먼 1994, 92쪽.↩︎

  10. 하먼 2009, 73쪽.↩︎

  11. 킨케이드 2018, 96쪽.↩︎

  12. 울프 1991, 297쪽.↩︎

  13. 울프 1991, 79쪽.↩︎

  14. 킨케이드 2018, 97쪽.↩︎

  15. Farber 2011, p.200.↩︎

  16. D’Amato 2007.↩︎

  17. D’Amato 2007.↩︎

  18. Farber 2011, p.204.↩︎

  19. D’Amato 2007.↩︎

  20. 김어진 2018, 78쪽~79쪽.↩︎

  21. 김애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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