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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 사회에서 여성의 삶

오늘날 소련 붕괴에 주목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소련’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옛날 사람’인지 여부를 테스트하는 기준으로만 소환되는 것은 아니다. 소련 사회의 유산은 오늘날 차별 반대 운동이나 좌파 운동에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주의를 달성한다고 곧 여성 해방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옛 소련은 그 명백한 증거 중 하나로 제시된다. 이런 주장은 흔히 여성이 해방되려면 자본주의가 아니라 가부장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 어떤 좌파는 여성 해방을 실현하려면 자본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근거로 소련을 든다. ‘사회주의’ 소련에서 여성은 차별받지 않았고 성평등이 거의 실현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 소련이 여성이 해방된 사회였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생필품 부족

만약 사회주의 사회라면 무엇보다 대중의 필요가 사회의 우선순위일 것이다. 그러나 소련에서 대중의 필요는 서방 국가들과의 군사 경쟁과 자본 축적에 완전히 종속됐다. 중공업 투자를 우선하느라 소비재나 서비스 생산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렸다.

대중은 언제나 극심한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다. 소련에서 생필품을 사려고 상점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선 모습은 흔하디 흔한 풍경이었다. 생필품은 부족했을 뿐 아니라 질도 형편없었다.

서방에서는 질 좋은 생필품이 충분히 있어도 노동자의 임금에 비해 너무 비싸서 선택이 제한됐다면, 소련에서는 임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었고 질이 엉망이어서 선택이 제한됐다.

소련은 이미 1957년에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지만, 비누와 분말세제조차 부족해서 “더러운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특히 소비재 부족은 여성에게 더 심각한 고통을 안겨 줬다. 가사노동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었는데, 여성은 직장에서 고되게 일하고 나서도 가사를 하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소련 경제가 승승장구하던 때에도 세탁기, 냉장고, 진공청소기를 가진 가구의 비율은 고작 52퍼센트, 32퍼센트, 12퍼센트뿐이었다(1970년 기준)!

대중에게 가장 참기 어렵고 고통을 안기는 문제 중 하나는 주택 문제였다. 보통의 소련 사람들이 주택을 얻으려면 대기자 명부에 올려도 수년 또는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

젊은 여성들은 대체로 일터에서 제공되는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언제나 비좁고 북적거려서 신경증과 질환을 겪는 일이 다반사였다.

결혼한 젊은 부부들이 집을 구하기 어려워서 따로 살거나 기숙사에 신혼살림을 꾸리는 일도 흔했다. 반대로 어떤 여성들은 이혼해도 갈 데가 없어서 계속 전 남편과 남편의 새 아내와 같은 집에서 지내야 했다.

심지어 소련 여성 대부분이 일생 동안 네 번 내지 다섯 번 정도 낙태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콘돔 같은 피임 기구조차 부족해서였다. 마취제 부족과 도덕주의 때문에 마취도 실시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빈곤 때문에 성매매도 성행했다. 외국인을 상대로 성매매하는 경우는 외국인을 통해 생필품을 구할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자본주의 어느 곳에서나 경쟁과 자본 축적은 대중의 삶과 조건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다. 그러나 서방 자본주의가 100~200년 동안 이룩한 발전을 수십 년 안에 따라잡겠다는 스탈린 체제의 목표 하에서 노동자들은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비참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당과 국가의 소수 관료층은 “특별 상점”에서 줄을 서지 않고도 질 좋은 상품을 원하는 만큼 살 수 있었고, 대기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도 고급 가구가 딸린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다.

이중의 굴레

옛 소련에서 여성은 일터에서도 차별받았다. 여성의 고용률은 높은 편이었다. 여성은 전체 노동인구의 51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소련에서도 직급이 낮고 숙련도가 낮은 부문일수록 여성의 비율이 높았다.

1967년 의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소련의 여성 노동자들

직물, 조리, 봉제 노동자의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간호사와 보모, 타자수와 비서직의 압도 다수도 여성이었다. 서구와 달리 의사의 75퍼센트가 여성이었는데, 소련에서 의사직은 임금이 낮은 직업이었다.

교사의 75퍼센트가 여성인데도 여성 교장은 25퍼센트에 그쳤다. 감독관이나 전문직 중에서도 남성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이것은 여성의 교육 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낮은 숙련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에 여성을 채용하는 차별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법전에만 있었을 뿐, 여성 전일제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의 65~70퍼센트에 불과했다.

여성은 야간노동에도 광범하게 고용됐다. 양육 때문에 미숙련 여성들은 남편과 교대해 일하려고 야간 작업을 널리 택했다.

공공탁아소는 너무 부족해서 미취학 연령층 아동의 고작 절반만이 일 년짜리 탁아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소련에서 여성이 전일제로 고용돼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 비춰 보면, 이들 여성에게 탁아소는 절박하게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스탈린 체제에서는 이런 시설을 이용하는 것보다 가정의 구실이 강조됐다. 소련의 관료 집단은 공동탁아가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가족제도보다 건전하고 효율적이고 올바르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학생들은 천성적으로 아이를 기르고 환자를 돌보는 일에 적합하다고 교육받았다. 국가는 고정된 성 관념을 퍼뜨렸다.

이런 점들은 소련에서도 여성 차별이 가부장제를 떨치지 못한 후진적인 남성들 때문에 유지되는 게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가족은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무거운 부담을 떠맡고 있었다. 소련 체제는 여성을 노동자로 끌어들여 착취하면서도 동시에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가족 내 여성의 무보수 노동에 의존했다. 여성은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정과 일터에서 이중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진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지에 따라서 정확히 측정될 수 있다” 하고 말했다.

여성의 필요가 이처럼 무시되는 소련 사회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희망과 좌절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된 걸까?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여성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여성 해방을 위해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선진적인 조처들이 혁명 러시아에서 도입됐다.

여성의 선거권이 완전히 보장됐다. 세계 최초로 낙태가 합법화됐다. 주수나 사유 등 제한 조건 따위는 없었고, 오로지 여성의 요청만으로 낙태할 수 있었다.

임금 차별이 배격되고, 유급 출산 수당이 도입됐다. 동성애를 처벌하던 법률도 폐지됐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후진성에 비춰 보면 이런 성취는 정말이지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레닌, 콜론타이 등 볼셰비키들은 여성이 해방되려면 법률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봤다. 여성들이 “집안의 허드렛일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다면 이런 법률적 변화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동 탁아소, 공동 식당, 공동 세탁소 등을 세워 가사를 사회화하려 한 것은 이런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조처였다.

또 볼셰비키는 제노텔(여성부)을 설립해 더 많은 여성이 혁명 과정에 참여하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제노텔 활동가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전국 곳곳의 공장과 마을을 찾아다니며 여성들을 만났고, 읽기 학교를 열었다.

당시 볼셰비키는 대부분 남성이었지만, 이들은 혁명의 성공이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참여와 평등에 달려 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혁명의 고립과 수년간의 내전이 강요한 기근과 궁핍 속에서 이런 선구적 조처들이 유지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1920년대 말 스탈린의 반혁명 전까지는 여러 후퇴와 한계 속에서도 여성 해방이라는 지향이 추구됐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돕기 위한 여러 복지 정책이 장려됐다.

그러나 억압적 공업화와 강제 집산화를 필두로 한 스탈린의 반혁명은 사회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와의 군사적 경쟁에 나서면서 노동계급 대중의 필요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특징이 소련 사회의 특징이 됐다. 이에 따라 혁명의 성과도 되돌려졌다.

자본 축적에 여성이 광범하게 동원됐고, 1930년대에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엄청나게 강화됐다. 혁명 뒤 여성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여러 조처가 폐지되거나 유명무실해졌다.

1931년 여성의 지하 작업 금지조항이 폐지됐고, 뒤이어 야간 작업 금지 조항도 폐지됐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도네츠 탄광 같은 전혀 현대화되지 않은 탄광에서 위험천만한 갱도 복구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3분의 1 이상이 여성이었다. 다른 곳에서도 노동력의 50~60퍼센트가 여성이었다.

심지어 이런 일들은 “성 평등”이라며 정당화됐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임금 차별을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것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킨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 하에서 평등주의는 공격받고 대신 성과급제가 도입됐다. “임금의 프티부르주아적 균일화야말로 사회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1938년에 발행된 소비에트 노동법 교과서).

성과급제 도입은 서구 자본주의에서처럼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착취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임금 차등화는 대부분 비숙련 또는 반숙련직에 몰려 있었던 여성들에게 더 악영향을 끼쳤다.

한편, 제노텔은 애초의 목표에서 벗어나 국가가 설정한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1930년에 해산을 면치 못했다.

전통적 가족의 가치가 다시금 찬양됐다. 출산율을 높이고 안정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혼음’, ‘간통’, ‘사생아’ 등의 개념이 다시 부활하고, 이혼 절차가 엄격해졌다. 낙태가 금지됐다.(1955년에 낙태가 다시 합법화됐지만 그 후에도 낙태는 죄악으로 취급됐다.) 다산한 여성에게 국가의 훈장이 수여됐다.

1930년대에 육아와 가사를 사회화하려는 이전의 노력은 중단되고, 여성은 다시 숨막히는 가정의 일에 얽매여야 했다.

이런 일들은 여느 서구 자본주의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소련에서는 이런 일들이 “마르크스·레닌”, “성 평등”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미사여구를 거둬 내고 보면, 소련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와 형태만 달랐던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여성은 해방되기는커녕 서방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축적 드라이브 속에서 혹독하게 착취당하고 차별받았다.

그러나 혁명의 패배는 불가피한 게 아니었다.

소련에서 대다수 여성의 열악한 삶은 사회주의 혁명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1917년에 혁명을 일으킨 노동계급이 내전과 고립 속에서 1920년대 말에 최종 패배한 결과였다.

소련의 경험은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이 상관없다는 흔한 오해와는 정반대되는 결론, 즉 여성의 운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운명과 직결돼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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