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강연:
러시아 혁명과 10월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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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인 2017년 7월 초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한 강연을 옮긴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명예교수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장이다. [ ] 안의 말은 〈노동자 연대〉 신문 편집팀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첨가한 말이다.
강연 제목 ‘10월의 교훈’은 레온 트로츠키의 1924년 저작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제목에는 1917년 10월 혁명에 보편적 의의가 있다는 함의가 있다.
러시아 혁명은 그저 오늘날 다행히도 잊혀진 한 세기 전의 일시적 소란이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은 보편적 의의가 있는 사건이다. 이것이 바로 트로츠키가 레닌 사후에 볼셰비키 지도부에서 벌어진 치열한 논쟁 중에 《10월의 교훈》을 쓰면서 밝히려 했던 점이다.
이런 이해는 오늘날의 통념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의 서막인 바스티유감옥 습격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바스티유감옥 습격은 다과회 같은 것이 전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 유서 깊은 감옥을 습격해 박살내고 소장을 처형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현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나 그가 주빈으로 초청한 도널드 트럼프 같은 자들은 실제로는 혁명을 지독히 혐오하면서도, 바스티유감옥 습격과 미국사에서 그에 비견할 일인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샹젤리제궁에서 성대히 기념할 것이다.
반면, 러시아 10월 혁명은 결코 이런 기념 거리가 되지 않고 있다.
정치권과 학계 모두에서 그렇다. 토니 브렌튼이라는 사람이 10월 혁명에 관한 주요 역사학자들의 글을 모은 형편없는 책을 냈다. 대부분 쓸모없는 내용이다. 토니 브렌튼은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를 지냈던 자로, 요즘도 미디어에서 종종 거들먹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소 친스탈린주의적이지만 만만찮은 소련사 연구자인 실라 피츠패트릭은 이 책을 평하며 신자유주의 예찬론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러자 브렌튼이라는 자는 ‘신자유주의 예찬론이 뭐가 문제냐’고 응수했다. 전 세계 지배자들이 10월 혁명을 이해하는 데에서 그토록 어려움을 겪는 것은 브렌튼 같은 자들에게서 지혜를 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월 혁명을 무시하고 잊으려 하는 것은 권력자들만이 아니다. 상당수 좌파도 그러고 있다.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쓴 《극단의 시대》의 부제는 “단(短)세기 20세기: 1914~1991년”이다. 이런 시대 구분은 “단세기 20세기”를 연 핵심 사건의 하나인 1917년 10월 혁명이 이제 과거지사가 됐다는 것을 함축한다.
심지어 우리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정치적 입장이 훨씬 가까운 탁월한 프랑스 혁명 연구자 다니엘 벤사이드는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거듭 주장했다. 나는 그의 생전에 이런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는데(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이는 당시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0월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은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 10월 혁명은 꽤 오래된 사건이다. 더 중요하게는, 10월 혁명의 결과로 스스로를 혁명적이라 여긴 좌파들이 소련과 운명을 같이하게 됐다.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특히 유럽 바깥의 제3세계 곳곳에서 공산당들이 한 구실, 그들의 모든 프로젝트가 소련과 운명을 같이하게 됐다. 그래서 1991년 소련이 침몰하자 전부는 아니지만 이들 중 많은 수가 함께 침몰했다. 소련 붕괴는 좌파 역사의 한 국면을 끝냈다. 물론 전부 다 침몰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리스에는 단단한 공산당이 여전히 존재한다. 여러모로 기이한 조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흥미롭게도 트로츠키는 이를 예견한 바 있다.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정권이 붕괴하면 공산당들도 무너질 것이다.” 트로츠키는 그러면 새로운 혁명적 세력이 부상해 마침내 자본주의를 타도하리라 낙관했다.
벤사이드의 말이 이런 뜻이었다면? 좋다. 그러나 그 말이 10월 혁명의 시대는 끝났고, 오늘날 사회를 변화시키려 하는 사회주의자들, 더 넓게는 반자본주의자들에게 그 혁명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뜻이라면?
그렇게 믿는 사람들 — 많은 좌파가 여기에 해당된다 — 은 올해가 러시아 혁명 100주년임을 정말로 잊은 것 같다.
물론 타리크 알리는 훌륭하게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레닌에 관한 흥미로운 저작을 썼다.[The dilemmas of Lenin(Verso, 2017)이라는 책이다. 10월 혁명이 소수에 의한 쿠데타가 아니라 대중의 혁명이었다며 옹호한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관점이 불철저하다.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디테일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는 경우가 잦다는 약점도 있다.] 그러나 타리크 알리는 흔치 않은 예외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무시에는 그 혁명이 오늘날 아무 의의가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이는 심각한 오해다. 그 이유를 말해 보겠다.
사회주의 사회를 어떻게 쟁취할 것인가? 정의롭고 해방된 사회를 어떻게 쟁취할 것인가? 기존 체제의 추악한 면들을 점진적으로 제거하는 개혁으로 달성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혁명을 일으켜서 체제를 전복해야 하는가?
이는 20세기 초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제시한 매우 고전적인 물음이며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 현재 좌파의 다수는 “사회 개혁” 진영에 있다.
우리는 모두 제러미 코빈을 환영하고 그가 노동당 대표로서 훌륭한 구실을 한다고 보지만[강연 직전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당대표 코빈의 좌파적 주장으로 제2차세계대전 이래 최대 약진을 했다], 우리는 그가 좌파적 개혁주의자라고 말해야 한다. 코빈은 헌정 질서 등 기존 체제의 틀 안에서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코빈을 존경도 하지만 그의 사상은 잘못됐다.
좌파적 개혁주의로는 그런 변화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오랜 역사로 입증된 바이지만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불과 2년 전[2015년] 유럽연합이 그리스 시리자 정부를 파멸시킨 것을 보라. 물론 시리자 정부와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치프라스는 사실상 ‘트로이카’[유럽중앙은행·IMF·유럽연합]의 대리인 또는 그 이상의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스뿐 아니라 유럽과 전 세계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재확립하기 위해 그리스를 고사시키려 한 온갖 불한당들의 대리인 구실을 말이다.
좌파적 개혁주의는 역사 속에서 거듭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오물에서 정의롭고 자유로운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려면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최초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주목해야 마땅하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럴 가치가 있다. 그 노동자 권력이 고작 몇 년밖에 살아남지 못했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매우 진지한 검토 대상이 돼야 한다.
사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전복에 성공한 유일한 사례다. 많은 좌파들은 중국·쿠바를 사례로 들며 이견을 제시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지만, 어쨌든 나는 러시아가 유일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전복한 [유일하지 않아도] 최초 사례라면, 그만큼 이를 잘 살펴보고 교훈을 끌어 내야 하지 않겠는가.
세계 자본주의의 일부
1917년 당시 러시아가 매우 낙후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러시아는 농민이 압도 다수였고, 극도로 기생적이며 농민을 마구 착취하던 지주 계급과 밀접하게 엮인 차르 전제정이 다스리던 사회였다. 이처럼 상황이 오늘날과 매우 다르니 러시아 혁명에서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산이다. 러시아 혁명 지도자 트로츠키가 쓴 《러시아 혁명사》[1930년]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단연코 최고의 저작이다. 트로츠키는 이 책 서두에서 그가 말한 불균등·결합 발전, 즉 러시아가 어떻게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됐는지를 분석한다.
러시아에 특수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차르 정권은 더 선진적인 서구 열강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면서 19세기 말 바로 그 서방의 선진 기술을 수입해야 했다. 차르 정권은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다지려고 특히 프랑스 은행에서 대출 받아 첨단 설비를, 때로는 그 설비를 다룰 숙련 노동자들까지 수입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같은 경쟁국에 맞서기 위해 전쟁 경제를 확립하게 되면서 러시아에서는 이런 과정이 더 강화됐다.
그 결과 러시아는 화약고와도 같은 상태가 됐다. 차르 전제정의 잔혹하고 억압적인 특성과, 선진 산업 자본주의 경제가 낳는 모순이 한 나라 안에서 결합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시 러시아만의 특징인가? 그렇지 않다. 세계적 시야에서 보면 이런 결합을 거듭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2011년 이집트 혁명과 그 패배(일시적이기를 바란다)를 이해하려면 이집트의 불균등·결합 발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러시아를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통합시킨 결합 발전이라는 요소는 1917년 러시아 혁명뿐 아니라 그 전에 일어났다가 실패한 1905년 혁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혁명의 중심에는 산업 노동계급이 있었다. 이들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었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선진적이었고, 이미 1905년 자신들의 권력 기구이자 자치 기구인 소비에트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험 덕분에 1917년 4월 레닌은 러시아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만들어 낸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의 정치적 형태”(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을 두고 한 말), 즉 소비에트가 노동자 국가의 진정한 기초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 노동자들은 유럽 다른 나라 노동자들보다 앞서 있었다. 그러나 유럽 다른 나라 노동자들도 같은 리듬으로 벌어지는 투쟁에 뛰어들게 된다.
영국 역사가 스티브 스미스는 탁월한 저서 《붉은 페트로그라드》에서 매우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러시아 노동계급이 어떻게 페트로그라드의 공장들에서 성장했는지를 분석하고 묘사한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잉글랜드의 셰필드, 독일의 베를린, 이탈리아의 토리노 등 유럽 다른 나라의 모든 산업 중심지들에서도 노동계급이 제1차세계대전 동안 비슷한 투쟁을 벌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기존 계급 갈등들을 더 첨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다른 나라의 차이는 러시아의 후진성이 아니다. 레닌이 1917년 2월 차르 군주정이 타도됐을 때 분석했듯이, 러시아가 달랐던 것은 모순들이 워낙 집약돼 있어서 가장 먼저 폭발했다는 것이다.
쿠데타?
러시아 혁명에 관한 또 다른 쟁점으로, 1917년 10월 임시정부 타도와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이 볼셰비키가 조종한 쿠데타라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는 명저 《볼셰비키, 권력을 장악하다》[국역: 《1917년 러시아 혁명: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 책갈피]에서, 1917년 2~10월 당시에 인구의 다수였던 농민의 일부와 노동계급이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묘사했다. 이 징집된 농민들은 대도시 인근에 모여 있을 때가 많았고, 그래서 도시 노동계급의 정치적 변화에 노출됐다. 이런 꾸준한 급진화 과정이 소비에트를 더한층 발전·강화시켰다.
이런 변화와 상호작용하며 볼셰비키가 성장했다. 볼셰비키는 소수의 광적인 음모가들이 아니라, 10월 혁명 당시 30만 당원을 보유한 대중 정당이었다.
당과 계급 사이의 이런 상호작용이 혁명적 과정을 전진시켰다. 이는 유럽과 전 세계 다른 나라에서 급진화하는 노동자들에게 모범이 됐다. 러시아 혁명은 남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인도·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노동계급 자력 해방의 모범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전쟁
지금까지 1917년 10월 혁명의 보편성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특수성은 없었는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진정한 특수성 두 가지를 강조하겠다.
첫째 특수성은 러시아 혁명이 제1차세계대전 동안 벌어졌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전쟁에 대한 [대중의] 경험뿐 아니라 전쟁 자체가 차르 체제에 엄청난 재앙이었다. 차르 일가 자신이 차르 정권의 타락·무능·잔혹함·탐욕·비효율성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10월 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역겨움을 유발하는 일 하나는, 로마노프 일가가 얼마나 고결했고 백성을 아꼈으며 볼셰비키가 이들을 몰아낸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떠들어 대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이 시점이 되면 꼭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르 일가와 그 하수인들은 뼛속까지 썩어빠진 자들이었다.
차르 왕가는 제1차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그들 자신의 타락상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전쟁은 이중적 구실을 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세계대전은 전쟁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이 전쟁이 국가 간 전쟁으로든 내전 형태로든 1945년까지 이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으로 전쟁은 급진화를 낳았다. 차르 군주정 이후 권력을 잡은 — 더 정확히는 정부로 취임했을 뿐 권력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 임시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뒤이어 참전한 미국 등 서방 동맹들에 충실했고 그래서 전쟁을 계속 수행했다.
이는 거대한 급진화를 불렀다. 애초 1917년 2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도 바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볼셰비키가 전쟁 종식을 진지하게 약속한 유일한 정당이었다는 점은 볼셰비키가 성공한 주요 요인의 하나였다.
다른 한편, 제1차세계대전과 그에 뒤이어 벌어진 내전(1917년 10월 혁명을 반대하는 자들이 신생 볼셰비키 공화국을 파괴하려 한 전쟁)은 러시아를 정치적으로 변화시켰다. 더 크게 보면 이런 과정은 유럽 전체 수준에서도 벌어졌다.
국가 간 전쟁과 내전 과정은 극도로 가혹했다. 이는 사회와 정치의 군사화를 낳았다.
그리고 이는 파시즘이 성장하는 데 중요했던 요인 하나였다. 파시스트들은 1914~1918년에 벌어진 야만적 참호전에서 전장을 돌파하던 돌격대에서 복무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최초의 조직원을 모집해 성장했다.
볼셰비키는 내전에서 이기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군사화했고, 위계적인 구조를 발전시켰다. 엄격한 규율이 더욱 요구됐다.
이런 일들이 혁명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개혁주의
러시아 혁명의 둘째 특수성은 개혁주의가 러시아에서 매우 취약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는 서유럽과 달리 대중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없었다. 이는 레닌이 《‘좌파적’ 공산주의 ─ 유치증》에서 강조했던 것으로, 이 책에서 레닌은 서유럽에서는 개혁주의 때문에 ‘2월’에서 ‘10월’로 가는 과정이 훨씬 오래 걸릴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서유럽에서는 개혁주의라는 장벽 때문에 노동계급 다수를 혁명 쪽으로 설득하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유럽은 산업이 훨씬 발달해 있기 때문에 일단 노동자 국가를 수립하면 그 이후는 훨씬 수월할 터였다.
옳은 지적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우리는 거대한 노동계급 투쟁에서도 개혁주의가 얼마나 급성장할 수 있는지 목격했다.
1980년대 초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의 경우에도, 이 거대한 신생 준(準)소비에트에서 개혁주의 이데올로기·실천·전략은 매우 빠르게 발전했다.(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연대노조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소비에트 운동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면 친소련 운동을 하고 있다는 말인 줄 알고 기겁했을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1980년대에 노동자·청년들의 투쟁이 발전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입힘과 동시에 그 운동 안에서 개혁주의적인 노동조합 관료와 공산당이 — 사실상 대중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서 — 급성장했다. 이것이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변화가 제한적이었던 핵심 요인이었다.
개혁주의의 이런 빠른 성장 능력은 근본적으로, 노동자 투쟁이 체제 내 개선을 쟁취하는 수준의 파업으로 스스로를 제한하는 경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는 노동계급이 자신에게 사회를 재편할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한 것을 반영한다.
그런데 1917년 러시아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더는 혁명적이지 않게 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들은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보다는 훨씬 급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은 사실상 개혁주의 정당들이 돼, 반혁명 세력과 혁명 세력 사이에서 동요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날 위기 때문에 정치 구조가 불안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단하게 고착화된 개혁주의 정당들을 거론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현 조건에서 개혁주의 정당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리스 사회당(PASOK)이 겪은 일을 보라. 프랑스 사회당에 일어난 일을 보라. 2017년 프랑스 대선에서 수치스런 성적을 거둔 사회당 대선 후보는 아예 사회당을 탈당했다. 사회당의 추락을 이만큼 잘 보여 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오랜 기성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순식간에 붕괴하고 있지만, 개혁주의 정당이 순식간에 부상할 때도 있었다. 포데모스로 개혁주의가 소생하는 것을 보라. 그후에는 코빈도 그렇게 부상했다.[그러나 그는 2020년 4월 당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는데, 이때쯤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도 위기에 처하고 약화되기 시작했다. 캘리니코스는 이 대목에서 전반적인 정치적 불안정으로 정당들도 급속하게 부침을 겪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개혁주의는 매우 중요한 고려 요소다. 어떤 혁명 과정에서든 그럴 것이다. 1917년 러시아와 오늘날 사이의 차이점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물음은 개혁주의가 오늘날 사회가 처한 위기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답은 ‘아니오’다.
혁신
그래서 1917년 10월 혁명의 교훈을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에는 두 가지 중요한 혁신이 있었다.
첫째 혁신은 보편적인 의의가 있는 것으로, 소비에트다. 소비에트는 대중의 자력 해방의 모델이 됐고, 세계 곳곳의 여러 투쟁에서 번번이 다시 생겨났다.
심지어 2011년 이집트 혁명에서도 그런 노동자·대중의 자체 조직화의 초기 형태가 등장했었다. 이집트 같은 사회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한 조건이라고들 했지만, 이집트 대중은 누가 일러주지 않았는데도 그런 조직을 발전시켰다. 이처럼 소비에트는 어느 곳에서든 적용·발전 가능한 형태임이 입증됐다.
둘째 혁신은 보편화하기 훨씬 어려운 것인데, 바로 볼셰비키와 같은 정당이다.
볼셰비키는 어떤 정당이었나? 이 대목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최고 이론가였던 카를 카우츠키의 주장을 살펴볼 만하다. 카우츠키는 ‘혁명적 당’과 ‘혁명을 일으키는 당’을 구분했다. 이는 카우츠키가 가장 좌파적일 때 한 주장이었다.
사실 카우츠키가 레닌에 지대한 영향을 줬고 — 실제로 그러했다 — 레닌은 카우츠키가 발전시킨 사상을 구현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가령 Lars T. Lih 같은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카우츠키가 말한 ‘혁명적 당’은 제1차세계대전 이전 독일과 러시아 등지에 존재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즉, 점진적 변화를 도입하다가 결국에는 혁명 없이 자본주의를 없애는 역사의 파도를 타는 노동계급 대중 정당이었다.
카우츠키는 ‘혁명을 일으키는 당’이 무엇일지 말하지 않았다. 그런 당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했을 뿐이다.
반면, 볼셰비키는 뼛속까지 ‘혁명을 일으키는 당’이었다.
이미 1905년 혁명 때도 그랬다. 당시 볼셰비키는 모스크바에서 봉기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그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볼셰비키는 다른 좌파들에게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차르 국가를 분쇄하고 혁명 과정 전체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역사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끌려 했고, 역사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방향으로 가져가려 했다.
1917년에도 그랬다. 10월 봉기는 그 가장 중요한 사례가 아니다. 물론 볼셰비키는 10월 봉기를 조직했다. 국가가 어떻게 타도됐겠는가? 제풀에 타도됐을 리 없다. 국가를 없애기 위해 조직하고 계획해야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쿠데타인 것은 아니다.
훨씬 중요한 것은 1917년 4~10월 사이에 있던 일이다. 1917년 4월 레닌은 망명지에서 돌아와, 이제 임시정부 타도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 전체, 심지어 볼셰비키 지도부 대부분이 충격에 휩싸였다. ‘말도 안 된다. 민주주의가 전진했고, 차르가 타도됐고, 이제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궤도에 올랐는데,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인가?’
레닌의 답은 ‘충분치 않다’였다. 차르가 노동계급 대중 행동, 사병 반란, 소비에트 권력 수립이라는 방식으로 타도됐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 현안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레닌은 목표치를 최대한 높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잡았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레닌은 노동계급 중 소수만이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했다. 옳은 지적이었다. 당장 볼셰비키당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레닌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목표를 지지하도록 노동계급 다수를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레닌은 매우 중요한 말을 했다. “우리는 소비에트 권력의 필요성을 동료 노동자들에게 참을성 있게 설명해야 한다.”
“참을성 있게 설명해야 한다.”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공장이나 병영 등 곳곳에서 동료 노동자·병사들에게 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지, 왜 이를 위한 조직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그들과 함께 투쟁하는 과정에서 권력 장악의 필요성을 이해하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공동전선 전술과 깊은 연관이 있다. 공동전선 전술이 세심하게 진술된 것은 더 나중[1920~1921년]이었지만, 1917년 8월 말 반혁명 세력이 다소 교만하고 어리석은 코르닐로프 장군의 주도 하에 쿠데타를 시도했을 때 볼셰비키가 실천한 바이기도 하다.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볼셰비키는 자신들을 탄압하고 레닌을 체포하고 어쩌면 살해하기까지 하려 한 자들과 단결했다. 그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와 군 장성들이 믿을 수 없는 자들임을 입증하고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얻어 냈다.
혁명적 당과 노동계급 대중 사이의 이런 끊임없는 실천적인 대화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런데 노동계급의 일부로서 나머지 노동계급과의 상호작용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혁명을 일으키는 당’ 모델은 수출하기 어렵다는 것이 금세 드러났다. 코민테른은 그 모델을 수출하려는 위대한 시도였지만 실패했다.
부분적으로 이는 신생 공산당들에 대한 볼셰비키의 권위와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탓이었다. 신생 공산당들은 스스로 배우기보다는 러시아인들에게 기대려 했다.
레닌은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길을 개척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자신감을 충분히 빨리 키운 지도자들이 너무 적었다.
더구나 러시아를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통합시켜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을 촉진한 불균등·결합 발전은 이제 그 혁명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힘이 국가자본주의라는 매우 뜻밖의 형태로 혁명을 분쇄했다. 진정한 혁명가들의 단단한 중핵이자 노동계급의 기억이었던 소련 공산당은 러시아를 자본 축적의 논리에 종속시킨 신생 지배계급[1920년대에 형성된 신흥 국가 관료]의 정당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비극 때문에 볼셰비키의 경험의 의의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볼셰비키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좋은 것을 골라서 말이다. 전통은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경험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배울 것과 유효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오늘날 혁명적 정치가 직면한 도전은, 한편으로는 트럼프나 메이[당시 영국 총리] 같은 우파에 맞서면서도, 새로운 좌파적 개혁주의 정치와 관계 맺어 지금 코빈·멜랑숑·포데모스 등에게서 영감 받은 많은 사람들을 혁명적 정치로 끌어당기는 것이다.[당시의 맥락과 달리 4년이 지난 지금 2021년에는 좌파적 개혁주의가 약화되고 거의 붕괴했고, 오히려 우익이 더욱 강세인 정세가 전개되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참을성 있게 설명하기”, ‘함께 투쟁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논쟁하기’라는 레닌의 공식은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