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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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오리알 신세인 러시아 혁명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오늘날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했는데 축하받는 일이 거의 없다.
50주년이었던 1967년에는 사정이 매우 달랐다. 서방과 대결하던 소련 측 블록이 자신의 정통성을 러시아 혁명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 국가를 통치하는 블라디미르 푸틴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러시아 정부는 표트르 스톨리핀을 영웅으로 추앙한다. 스톨리핀은 혁명 전 러시아 제정의 총리로서 혁명가들을 교수형으로 처형한 인물이다.
또, 혁명으로 타도돼 숲에 버려졌던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유골은 1990년대 초에 발굴돼 별도의 호화로운 방에 안치돼 있다. 현재 니콜라이 2세는 성인(聖人) 대접을 받고 있다.
서방 측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히스테리가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러시아 연계 혐의를 둘러싼 논란을 봐도 알 수 있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1960~1970년대에는 사회적 급진화로 말미암아 러시아 혁명을 현실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노력이 거의 없다. 학계의 통설은 1917년 10월 혁명을 퇴행적 쿠데타이고 러시아를 혼돈과 전체주의로 빠뜨린 것처럼 그린다. 이런 관점은 올랜도 파이지스의 《민중의 비극》이 다루는 이른바 “사회사”나 레닌을 지독히 싫어하는 리처드 파이프스의 연구 같은 더 전통주의적인 서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파이지스는 1917년 10월 24일 페트로그라드를 순찰하던 경찰들이 “무해한 취객”으로 가장하고 스몰니 학원으로 향하던 레닌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긴 것을 애통해 한다. 경찰들이 레닌을 알아봤다면 “역사는 매우 다르게 전개됐으리라”는 것이다. 스몰니 학원은 10월 봉기를 조직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가 쓰던 건물이다.
좌파들도 조용한 편이다. 최근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데 크게 한몫한 데이비드 하비는 처음부터 레닌주의와는 거리를 둔 인물이다. 하비는 최근에 불평등의 심화 속에서 “의식적으로 조직된 반자본주의적 혁명 운동(레닌주의의 설명으로는 전위정당)이 떠오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극도로 결함이 많은” 운동이라고 일축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영국공산당에 충실했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자신의 유명한 3부작의 하나인 《극단의 시대》의 부제를 ‘단기 20세기: 1914~1991년’이라고 지었다. 이런 시기 구분은 10월 혁명과 함께 시작한 시대가 이제는 끝났다는 것을 함축한다. 실제로 홉스봄은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1980년대 말 허물어진 세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은 세계였다. … [현재는] 10월 혁명의 종말에서 살아남은 세계이다.”
홉스봄은 러시아 혁명을 이렇게 평가한다. “10월 혁명의 비극은 무자비하고 잔혹한 지령 사회주의를 낳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1917년 10월 혁명과 스탈린 체제의 단절성
1917년 10월 혁명과 스탈린 체제의 등장을 연속선상에 놓고 보는 관점은 국내에도 흔하다. 이런 관점들은 주요 자본주의 열강이 혁명 러시아를 침공하고 옛 지배계급이 지휘하는 군대가 내전을 일으킨 사실이 미친 효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전 탓에 러시아 전역에서 식료품이 부족해 일부 지역에서는 인육을 먹는 일마저 벌어지고 각종 질병이 창궐했다. 산업은 붕괴하고 노동계급은 죽거나 식량을 찾아 흩어지면서 거의 해체 상태였다. 즉, 러시아에서 나타난 노동계급의 혁명적 민주주의는 제국주의의 개입과 옛 지배계급의 반동에 질식사했다.
이런 폐허 속에서 스탈린이 등장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지배를 안정화하기 위해 볼셰비키 간부들을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제거해야 했다. 최초의 혁명 정부를 구성한 15명 중 10명이 스탈린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살해당했고 4명은 자연사했다. 딱 1명만이 살아남았다. 바로 스탈린 자신이었다. 이 인적 청산은 매우 급속한 산업화를 위한 농업 강제 집산화 등 농민 세력의 궤멸, 노동자 파업권 박탈 등 민주주의 파괴,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해방적 조처의 전복과 함께 일어났다.
그래서 트로츠키주의 전통은 1917년 10월 혁명이 스탈린 체제를 낳은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국제사회주의경향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소련이 스탈린 체제로 변모한 것을 반혁명 과정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2009년 작고한 트로츠키주의 전통의 걸출한 활동가 다니엘 벤사이드가 홉스봄의 ‘단기 20세기’ 정식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1989~1991 소련 해체와 동구권 붕괴의 의미
그런데 “10월 혁명의 종식”이나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과 함께 시작된 거대한 순환의 종식”이라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
벤사이드가 말했듯이, 1989~ 1991년에는 분명히 지정학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이 국제적 헤게모니를 갖는 데서 걸림돌이 된 소련 블록이 해체됐다. 그리고 이 변화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의 일반화에 일조했다.
“노동운동 내 여러 조류들의 지향과 구성 변화”도 일어났다. 스탈린이 집권한 뒤 소련에 동질감을 느끼던 세력들이 소련의 붕괴와 함께 퇴조했다. 서방 세계 공산당 중 가장 중요했던 이탈리아 공산당의 몰락이 대표 사례다. 현재 영향력이 있는 공산당은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다.
요컨대, 1989~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붕괴는 세계 자본주의가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서 신자유주의적으로 재조직되고 공산당 운동이 퇴조한 장기적 과정의 급격한 시작이었다.
그러면 1917년 10월 혁명은 현재의 활동가들에게 말해 주는 바가 전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10월 혁명은 단지 혁명적 영감을 줄 뿐인 사건이 아니다. 전략적 의의도 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10월의 교훈》에서 새 세대가 10월의 경험을 차근차근 배우며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좌파 개혁주의의 부상과 러시아 혁명
우선 로자 룩셈부르크가 던진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물음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에 10월 혁명은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중요한 사건이다.
최근 좌파적 개혁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다. 영국의 제러미 코빈, 프랑스의 장뤽 멜랑숑,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가 그 사례다.
그런데 문제는 좌파적 개혁주의 정부가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의 길이 닫혀 있다면, 우리는 혁명적 대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를 타도한 최초의 성공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들은 1917년 10월의 러시아와 현재는 매우 다르다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당시의 러시아는 농업이 압도적인 사회였고 따라서 인구의 압도 다수가 농민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트로츠키가 말한 ‘불균등 결합 발전’ 이론을 떠올려야 한다. 당시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낙후한 사회였지만, 국가 주도의 급속한 공업화로 서유럽이나 미국보다 훨씬 더 크고 집중된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 노동계급은 그 규모를 뛰어넘는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 정치 면에서 러시아 노동계급은 선진적이었다. 1905년 혁명에서 새로운 권력 기구인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러시아 혁명은 보편성과 특수성이 융합돼 일어난 사건이었다.
당시 모든 사회가 공유한 것은 제1차세계대전이었다. 압도적으로 농촌 사회인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에서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쟁에 일관되게 반대하고 농민들의 토지 점유를 지지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더 일반적으로 말해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은 1945년 8월에 끝나는 혁명과 반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러시아 혁명의 특수성은 당시 러시아에는 서구 사회들과 달리 강력한 개혁주의 전통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모든 혁명적 투쟁에서는 옛 체제가 위기에 빠진 이후에 개혁주의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멘셰비키가 그 사례였다.
그 뒤로도 1980년대 폴란드의 연대노조, 브라질의 노동자당, 남아공 공산당 사례가 있다. 더 최신 사례로는 2011~2013년 이집트 혁명의 무슬림형제단이 있다.
이런 사례들은 노동자 투쟁의 자기 제한적 경향을 보여 준다. 이는 자본주의의 착취와 소외로 말미암은 노동자들의 자신감 부족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런 자신감 부족을 극복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개혁주의 전략이 실패한다는 실천적 경험. 둘째, 그런 전략을 뛰어넘을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 경험. 셋째, 노동계급이 그로부터 필요한 정치적 교훈을 배우는 데 일조할 대중적 혁명 정당의 존재.
최근 우리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지만 겉으로는 상충하는 듯한 두 가지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한때 강력한 정당들이 (이탈리아 공산당처럼) 자살 행위를 하거나 (그리스 사회당, 프랑스 사회당, 브라질 노동자당 등처럼) 주변화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개혁주의 세력이 급속히 성장한다(그리스 시리자, 스페인 포데모스, 최근의 영국 노동당).
이 두 현상은 사회민주주의의 장기적 쇠락이 낳은 결과이다. 그 과정은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며 사회자유주의로 변모하며 더 촉진됐다.
그런데 그리스 시리자의 사례를 보면 새롭게 떠오른 개혁주의가 유동성과 불안정을 낳고, 이것이 혁명가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혁명가들이 효과적으로 대처한다면 말이다.
러시아 혁명의 정치적 혁신
바로 이 맥락에서 10월 혁명이 제공하는 진정한 정치적 혁신 두 가지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첫째는 소비에트와 이원(이중)권력이다. 이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임이 여러 역사적 경험에서 입증됐다. 여러 나라에서 혁명적 투쟁이나 그에 준하는 투쟁이 벌어질 때면 러시아의 소비에트에 해당하는 조직, 또는 그것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는 조직이 탄생했다.
둘째는 볼셰비키당이다. 혁명의 필요성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정당을 요구한다.
카를 카우츠키의 분석에서 혁명 정당은 그저 역사의 흐름을 잘 타는 정당이다. 카우츠키는 자본주의가 혁명으로만 타도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혁명가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에게 혁명 정당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노동운동의 조화로운 융합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실천은 바로 그 “조화로운 융합”이라는 가정을 반박했다. 게다가 볼셰비키는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이었다. 계급 투쟁에 적극 뛰어들어 그 투쟁이 혁명으로 나아가도록 애썼다는 면에서 그렇다.
레닌이 1917년 가을에 쓴 저작들을 보면 자본주의가 저절로 타도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볼셰비키가 제때에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볼셰비키와 러시아 노동계급은 반혁명 세력에게 분쇄됐을 것이다.
그리고 1917년 4월에서 10월까지 볼셰비키가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려고 체계적으로 기울인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그중 하나는 나중에 공동전선으로 불리게 된다.
볼셰비키당은 민주적 구조 덕분에 노동자와 병사들의 급진화를 반영하고 그들이 권력 장악을 향해 나아가도록 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당이 러시아 대중의 지지를 받는 민주적 정당이었음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연구 결과에서 잘 알 수 있다. 라비노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거의 모든 기존 서술에서 묘사한 바와는 달리, 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당은 레닌이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대체로 통일된 권위주의적 음모 조직과는 닮은 점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당 내 논쟁이 중구난방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또, 그저 논쟁만 한 것도 아니었다. 1917년 가을 볼셰비키당 내에서 봉기를 조직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봉기를 주장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반대했다. 결국 레닌과 트로츠키가 승리했고 봉기는 실행됐다.
혁명을 일으키려는 정당이 당내 논쟁을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놔두거나 당내 소수가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정당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혁명을 지향한다면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으로서 볼셰비키 당 모델을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소비에트라는 정치적 혁신보다 볼셰비키라는 정치적 혁신을 적용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볼셰비키가 여러 해 동안 대중 투쟁과 반동, 탄압과 해외 망명 등을 거치며 스스로를 조직해 나간 길고도 험난한 과정을 손쉽게 대체할 도리는 없다.
물론 러시아 혁명은 패배했다. 그러나 2007~2008년의 위기와 그 뒤의 장기 침체, 지배자들에 맞선 저항들 탓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깊은 위기에 빠져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10월 혁명이 현재에도 의미가 있음을 설득하기 유리할 것이다.
오늘날 대중이 스스로 만들 조직(소비에트)과 대중적 혁명 정당의 결합은 1917년 러시아와는 매우 다른 조건에서 매우 다른 형태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보여 준 1917년 10월의 경험은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는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장인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마르크스주의 계간 잡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56호(2017년 가을)에 기고한 ‘The orphaned revolution: the meaning of October 1917’을 많이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