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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왜 소련은 무너졌는가?

이 글은 381호 기사 ‘1991년 소련 붕괴는 자본주의의 승리였는가?’를 개정·증보한 것이다. 같은 주제로 열린 8월 19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영상(영상 보기)을 유튜브 노동자연대TV 채널에서 볼 수 있다.

1991년 소련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민들

꼭 30년 전에 소련이 붕괴했다.

1991년 8월 보수파 관료들이 대통령 고르바초프를 납치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개혁 속도를 늦추고, 국가의 통제력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는 대중의 반발에 부딪혀 우왕좌왕하다가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를 계기로 소련 해체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소련이 붕괴하자 서구 지배자들은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주의 사회가 이제 무너졌다는 것이다.

많은 국제 좌파들도 소련을 자본주의와는 다른 사회로 여겼다. ‘현실 사회주의’, ‘탈자본주의’, ‘관료적으로 변질된 노동자국가’ 등 소련 사회에 대한 규정은 제각기 달랐지만 말이다. 그래서 소련이 붕괴하자 사기저하되고 방향감각을 잃었다.

소련 바깥의 공산당들은 해체되거나, 더 많은 경우 개혁주의 정당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1991년 붕괴한 소련 체제는 자본주의의 한 변형인 관료적(전면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1917년 10월 혁명으로 등장한 사회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1917년 러시아 혁명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인류 최초로 성공한 노동자 혁명이었다. 혁명으로 탄생한 새 사회는 당시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보다 비할 데 없이 민주적이고 평등했다.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의 대표자들은 노동계급에 책임을 졌고, 제대로 못 하면 즉시 소환될 수 있었다.

유급 출산 휴가가 도입됐고, 이혼이 자유화됐고, 낙태와 동성애가 합법화됐다. 차별을 극복하려는 국가적 차원의 시도로는 최초였다.

노동자 민주주의를 보여 준 러시아혁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대중의 잠재력이 풀려났다. 새 사회 건설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욕과 헌신이 넘쳤다.

그러나 혁명 러시아는 곧 커다란 어려움에 봉착했다. 대내외 상황이 혁명을 위협했다.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미래는 독일 혁명을 비롯한 국제 혁명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봤다. 그러나 1923년 11월 끝내 독일 혁명은 패배했고, 혁명 러시아는 고립됐다.

다른 한편, 제국주의 열강의 침공과 함께, 러시아 국내 반혁명 세력의 준동으로 내전이 벌어졌다. 많은 노동자들이 전선에서 희생됐고, 경제가 붕괴하면서 식량을 찾아 도시를 떠났다. 살아남은 혁명적 노동자 중 상당수는 국가 기구에서 직책을 맡았다.

봉쇄와 내전의 혹독한 상황 때문에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거의 와해됐다. 이제 기반이 무너져 공중에 붕 뜬 당과 국가는 점차 관료화됐고, 관료층이 형성됐다.

일부 좌파는 스탈린의 부상과 집권을 레닌 시절에 취해진 ‘권위주의적’ 정책들의 결과물이라고 보기도 한다.

물론 레닌은 내전과 고립이 가한 압박 때문에 당내 분파 금지 등 비상 조처들을 도입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반혁명의 위협 앞에서 노동자 권력을 지키려는 한시적이고 불가피한 조처였다.

오히려 레닌은 소련이 ‘관료적으로 일그러진 노동자 국가’라며, 관료층의 성장과 득세를 우려했다. 그는 이 경향이 더 강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생의 마지막까지 투쟁했다.

반면 스탈린은 관료층을 이끄는 자였다. 1923년 독일 혁명이 패배하고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 전통을 부정하고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창했다. 관료층은 신생 국가 소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국제 혁명보다는 소련 한 나라에서도 (관료들이 손에 쥔 국가 기구의 주도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에 매력을 느꼈다.

소련 바깥에서 국제 혁명이 일어나 소련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신생 노동자 국가는 서구 열강과의 경쟁(특히 군사 경쟁)에서 밀리지 않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련 국가가 세계 자본주의의 맹목적 경쟁 체제의 자장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스탈린 반혁명

스탈린을 비롯한 신흥 관료층은 서구 열강과의 경쟁 속에서 생존한다는 방향을 향해 무자비한 걸음을 내딛었다. 1928년 제1차 5개년계획에 착수했다. 이를 계기로 1917년 혁명으로 형성된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생산의 우선순위는 대중의 필요 충족이 아니라, 군비를 키울 수 있는 중공업 기반을 급속히 마련하는 것으로 대체됐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할수록 노동자 생계를 위한 생산의 비중은 점점 적어지고 중공업 투자, 탱크와 전투기 등에 쓰이는 비중은 갈수록 늘어났다.

스탈린 정권은 농업을 강제로 집산화(집단농장화)했다. 자기 땅과 가축을 잃게 된 농민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무자비하게 제압했다. 농촌 곳곳에 차르 시절에 보던 검문소가 설치됐고, 저항하는 농민들은 강제수용소로 추방됐다. 강제 집산화로 100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1930년대 소련 강제노동수용소

1917년 혁명의 성과가 잇달아 파괴됐다. 이혼이 힘들어졌고 낙태가 금지됐다. 대신 모성이 찬양됐다.

또, 혁명 직후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던 소련의 노동법은 이제 완전히 억압적인 법률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자체 조직과 실질적 권리를 상실했다. 아래로부터의 통제나 일터에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당국의 제재를 받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1917년 혁명 당시 볼셰비키 중앙위원들은 (병사한 레닌을 제외하면) 1930년대 말에 이르러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살해당하거나 자살을 강요받았다. 스웨덴 주재 소련 대사로 해외에 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만이 운좋게 살았다.

국가자본주의

스탈린이 재편한 소련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였다.

일례로 스탈린 집권 후의 소련은 러시아 혁명에 관한 기록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고, 레닌을 다룬 저작의 출판도 엄격히 제한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른다는 정권이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에 대한 열람, 출판, 토론을 제한했던 것이다.

이처럼 스탈린 체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철저히 파괴한 결과물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불균등한 리듬에 종속되지 않고 대중의 필요에 기초해 생산이 조직될 때만 모름지기 진정한 계획 경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의 ‘계획’은 해외에서 강제된 경쟁 압력이 반영된 실용적 응변이었지, 진정한 계획이 아니었다. 소련식 ‘계획’의 우선순위는 서방 제국주의와의 경쟁에서 지지 않는 것이었다.

소련은 미국을 비롯한 다른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군사적 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경제의 효율과 생산성이 경쟁국보다 뒤처지지 않게 애써야 했다.

이는 소련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와 견줘 생산성을 계속 혁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련 지배 관료는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과 농민을 희생시켜 자본을 축적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생산을 조직했다.

흔히들 사기업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없는 국유·국영 경제를 사회주의로 여긴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국유화가 아니라 노동자 통제다. 국유 경제의 존재만으로 그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볼 수 없다.

모든 경제가 국유화돼 있다 해도 중요한 것은 ‘누가 국가를 통제하느냐’다. 노동자인가 아니면 다른 사회집단인가? 소련 노동자들은 국가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노동자와 유리된 사회집단인 관료층이 국가와 생산수단을 통제했고, 이를 이용해 사회를 통제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국가와 기업들의 세계로서 존재해 왔고, 발전할수록 국가의 구실이 더 중요해졌다. 오늘날에도 서구 경제들에서 국가 부문이 차지하는 몫은 적어도 30퍼센트가 넘는다. 소련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국가자본주의 경향이 다른 경제에 견줘 전면적으로 발전한 경우였을 뿐이다.(그러나 1930년대에는 일본도 비슷한 수준으로 국유화된 경제였다.)

이처럼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가 전혀 아니고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사회의 작동 원리라는 본질이 서방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은 사회였던 것이다.

소련의 흥망성쇠

소련이 붕괴한 오늘날에는 소련 지령경제의 낭비와 비효율 문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소련 스탈린 체제가 왜 위기에 빠졌는지 피상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체제가 위기 전에 한동안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거뒀다는 점은 설명하지 못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면, 소련 경제의 흥망성쇠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세계자본주의가 대불황에 빠진 1930년대에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세계 시장과 단절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엄청난 희생을 바탕으로 급속한 축적을 이루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국가가 방해 세력 없이 자원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도 당시엔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소련 경제는 1960년대까지 크게 성장했다. 게다가 소련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됐고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력권 분할 합의를 통해 동유럽·북한 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자원과 기계 약탈 등을 통해 이 나라들을 자신의 경제적·정치적 이익에 종속시켰다.

미국에 스푸트니크 충격을 안겨준 1957년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

1950년대 소련 경제는 세계 2위의 공업 경제가 됐다.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할 만큼 경제적·기술적 성취를 이뤘다. 소련은 세계가 양대 진영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경쟁하던 냉전 시기에 미국과의 제국주의 경쟁의 한 축을 이뤘다.

그러나 소련 경제는 1970년대 이후 성장이 점차 둔화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서구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 때 소련 경제도 성장이 둔화돼 평균 성장률이 2.6퍼센트에 불과했다. 1980년대 소련 경제는 정체했다.

소련 경제도 축적과 이윤율 저하 경향을 비롯해 자본주의에 내재된 근본 문제들에 봉착한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추세가 바뀌었다는 점도 소련 경제에 악재였다. 전후 장기 호황을 거치면서 1970년대 들어 국제적 분업 생산이 확대되는 세계화 경향이 유력해지기 시작했다. 서방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들은 판매뿐 아니라 생산도 국제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한 기업들이었다.

이제 소련의 폐쇄적 국가자본주의 방식의 생산은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이 됐다. 더 발달한 생산성의 결과물들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방 선진국들과의 기술 격차도 점점 벌어졌다.

경제 성장의 활로를 모색하던 중국은 소련을 고립시키려 한 미국과 손을 잡고 1970년대 세계 시장에 점차 통합되는 길을 택했다.

이제 소련 경제가 세계 시장에 통합되지 않는다면 소련 경제의 정체를 타개하기 어렵게 됐다고 소련 관료들은 판단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런 위기를 배경으로 1985년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개혁파 관료들은 소위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시장 개방과 경제 구조조정을 의미했다. 위기가 너무 심각하니, 세계경제를 향해 경제를 개방하고 국내에 시장 관계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실기업은 구조조정될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해서 소련 경제의 경쟁력이 높아지기를 원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진행하려면 글라스노스트, 즉 부분적인 정치적 개방이 필요했다. 민주적 권리를 일부 허용해, 이를 통해 관료 기구의 보수적 타성을 견제하려 한 것이다. 이제 대중의 토론과 행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85년 제네바에서 만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안팎의 강경 스탈린주의자들은 이런 변화를 두고 ‘사회주의의 퇴보’라고 비난했고, 또 다른 좌파들은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부활 또는 혁신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스탈린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는 유지하면서, 부분적 개혁으로 위기를 탈출하려는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였다. 고르바초프는 자본 축적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지배 관료였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희생은 불가피한 일로 여겼다.

그러나 얼마 안 돼 개혁의 속도를 놓고 지배 관료 간에 쟁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관료는 대부분 개혁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막상 자신이 기반한 분야가 개혁되길 원치 않는 경우가 많았다. 세계경제에 개방되면 소련 경제의 많은 부분이 구조조정될 것이고 그러면 많은 관료가 자신의 사회적 특권과 권력 기반을 잃을 수 있었다. 따라서 페레스트로이카는 노동계급뿐 아니라 관료에게도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정치적 개방 속에서 대중의 자체 행동과 저항이 고무될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한 대응도 관료들 사이의 내분 요인이었다.

관료들의 견해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개혁의 속도를 늦추고 국가의 통제력을 유지하자는 자들이 있던 반면, 이왕에 거쳐야 하는 고통이라면 감수하고 개혁을 밀어붙이자는 자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이한 전망과 이해관계 때문에 관료들이 첨예하게 분열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보수파와 급진개혁파 사이에서 줄타기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1989년 시베리아 광원 노동자 파업

지배계급의 분열을 틈타 소련 노동계급이 저항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갈수록 악화되는 조건을 지키려고 투쟁했다. 특히, 이 저항은 1989년 광원 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처음에 파업은 비누와 겨울용 따뜻한 옷 지급 등 개별 광산의 경제적 요구로 시작됐지만, 파업이 확산하면서 더 광범한 불만이 모이는 초점이 됐다. 고르바초프가 “지난 4년간의 구조조정 기간 중에 우리 조국에 닥친 최악의 시련”이라고 했을 만큼 광원 파업은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몇 가지 요인이 더 겹치면서 소련 체제의 위기가 커졌다.

우선, 1989년 동유럽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가 소련보다 먼저 붕괴했다. 그럼에도 1956년 헝가리 혁명 등을 분쇄할 때와 달리, 소련은 동유럽에 군대를 투입해 체제를 수호할 처지가 못 됐다.

또, 소련 내 차별받는 비러시아계 민족들의 민족주의가 성장했다. 러시아 국가의 혼란으로 통제가 느슨해지자, 민족 차별로 쌓인 불만이 폭발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고 소련 핵심 지역에 대한 중앙 정부의 장악력이 약화됐다.

지배계급의 분열과 쟁투, 계급투쟁과 민족 운동은 사회적 격변을 일으켰다. 결국 1991년 8월 보수파 쿠데타의 실패를 계기로 소련은 자체 모순을 이겨 내지 못하고 붕괴해 버렸다.

소련의 위기를 가중시킨 동유럽 혁명 1989년 베를린 장벽 해체

전환

1991년 소련 붕괴 후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시장 경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변모하는 게 아니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들 안에서 소유 형태가 변하는 것이었다.

소련 붕괴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 혁명의 성과를 파괴하고 권위주의적 일당 통치를 해 온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진 일이었다.

그러나 서방 자본주의의 승리도 아니었다. 세계경제는 1970년대 초부터 위기를 겪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시장 경제로의 전환은 러시아 대중에 더 나은 삶을 제공하지 못했다. 위기로 경제가 붕괴한 폐허 위에서 노동자들은 시장 지향적 ‘개혁’으로 희생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갈수록 실망을 넘어 환멸을 느끼게 됐다.

소련의 경험에서 우리는 사회주의가 정말로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노동계급이 건설하려 한 사회, 그 이상과 전통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위기의 대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커다란 영감과 교훈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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