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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투쟁연대(준)(노해투)의 정치

[편집자] 이 글은 2019년 12월 22일, 당시 조직노동자운동팀장이던 필자가 민주노총 조합원인 회원들에게 행한 발제의 원고를 편집팀의 교열을 거쳐 발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2년이 지나는 동안 노해투는 이 글이 비판하는 측면(특히 개혁주의에 대한 종파적 태도)을 완화하는 듯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좌파적 개혁주의 조직들과 함께 사회주의 정당 설립에 대해 논의하고, 톨게이트공대위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여연이 노동자연대 배제를 요구한 것을 변혁당과 함께 적극 지지하는 등) 기회주의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노동해방투쟁연대(준)(이하 노해투)는 신디컬리즘 경향(이하 급진 노동조합 운동 지향)의 조직이다. 노해투는 2018년 초에 창립했고, 울산지역 일부 사업장을 기반으로 하고, 회원은 20여 명가량 된다.

노해투의 직접적 기원은 혁명적 노동자당건설 현장투쟁위원회(이하 노건투)이다. 노건투는 2011년에 창립했다가 2018년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열했다. 노해투는 바로 노건투 다수파가 만든 조직이다. 한편, 노건투 소수파는 ‘혁명적 노동자의 목소리’를 만들었다.

노건투는 2008년 급진 노동조합 운동 지향 4개 단체가 연합해 창립했던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이 2011년 분열했을 때 그 4개 단체 가운데 노동해방연대와 울산노동자신문이 통합하면서 결성됐다.

네 단체가 통합해 창립한 연합이 겨우 60명 남짓이었는데, 3년 뒤 해산 때까지 그 규모를 넘지 못했다. 사노련은 경제 위기로 자본주의와 개혁주의가 모두 파산했다는 성급한 판단에 따라 활동했다. 이런 파국론적 전망에 따라 일확천금을 꿈꾼 것이다. 사노련의 이런 전망은 노건투를 거쳐 노해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건투는 원래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뤼뜨 우브리에르(이하 LO 노동자투쟁당)와 연계를 맺었었다. 그러나 분열하면서 소수파(‘혁명적 노동자의 목소리’)는 LO의 글을 계속 소개하고 있는 반면, 노해투는 다른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제4인터내셔널 트로츠키주의 분파’(이하 TF-FI)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노해투가 번역해 자신의 기관지에 실은 TF-FI의 글을 보면, 그들은 최근 “새로운 개혁주의와의 투쟁”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개혁주의”는 버니 샌더스, 제러미 코빈, 포데모스, 시리자 등을 가리킨다. TF-FI는 전통적 개혁주의가 노동운동에 뿌리를 뒀던 반면 새로운 개혁주의는 “학생, 불안정 청년 노동자, 진보적 중간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개혁주의가 “혁명정당 건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며 이들과의 투쟁을 강조한다. 전형적인 초좌파적 종파주의이다. 대중적 개혁주의 세력이 등장할 때 혁명적 조직은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노동 대중을 고려해서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점인데도 말이다.

노해투는 개혁주의에 대한 TF-FI의 종파주의를 공유하는데, 노해투가 국내 개혁주의 세력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노해투는 또한 교조적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약점인 강령 물신주의를 드러낸다. 가령 노해투는 조국 임면 파동 정국에서 “노동자 민중의 통제권” 같은 “혁명적이고도 노동자 계급적인 요구”를 내걸면 부르주아 양당이 정의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보는 노동자·민중을 정치의 무대로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본가 권력을 때려잡고 노동자 권력 수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요구”의 사례로 “자본범죄수사처 신설”을 제시했다.

급진 노동조합 지향성

노해투가 어떤 활동을 주로 지향하는지는 노건투 해산과 함께 발표한 다수파 입장서(‘노건투 평가와 전망’)에 잘 나타나 있다.

“노동조합의 민주적·전투적 재편과 부문주의 극복, 노동조합을 노동자 계급 총단결 기구로 전진시키는 것, 그리고 이런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을 [전진시키는] 것이 당면 사회주의 정치 활동의 실천적 핵심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이런 활동을 통해] 미래의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 사회주의 사회를 자주적으로 운영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노해투가 핵심적 당면 목표로 삼는 과제들을 보면, 노동조합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급진 노동조합 지향성이 잘 드러난다. 실제로 노건투-노해투의 관심과 실천은 압도적으로 노동조합 운동과 노동조합 활동에 경도돼 있다. 그들의 신문은 대부분 노동조합 쟁점들로 덮여 있다. 일터와 사업장 바깥의 쟁점을 가끔 다루기는 하지만, 그저 선전에 국한될 뿐, 정치 투쟁으로서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을 보기가 어렵다. 계급투쟁을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노동과 자본의 충돌로 이해할(사실상 환원할) 뿐, 정치 투쟁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노건투와 접촉하다가 우리의 신문을 구독하게 된 한 노동자는 우리 단체를 접하면서 처음으로 노동조합 쟁점들이 아닌 쟁점들을 토론하고 실천할 기회를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노건투와 우리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서 말이다.

노해투의 급진 노동조합 지향성은 그들의 이론과 실천이 유리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말로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말하지만). 가령 북한 사회 성격 같은 문제에 대한 노해투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노해투의 최초 리더들은 한때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지만, 이것을 혁명적 조직 건설과 관련된 실천적 과제와 별로 관계없는 문제로 취급해 왔다. 지금은 노해투가 북한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지도 불분명하며, 설사 그렇다 해도 그 분석은 그들의 (노동조합 중심적) 실천에서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노해투는 다른 중요한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진정한 이론이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특히, 제국주의나 개혁주의 문제에 관해서 그렇다. 그래서 한일갈등과 관련해 노해투는 흔해빠지고 피상적인 “일본 패싱” 입장을 수용했고, 박근혜 퇴진 투쟁 이후 개혁주의의 부상을 예측하지 못했다.

급진 노동조합 운동 지향성은 이론을 체제 작동 원리로만 보고 실천의 길잡이로 보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론과 실천을 분리시키는 노해투의 명목적이고 비(非)실천적인 이론관은 노건투 다수파 입장서의 다음 구절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에게 기본 원칙들은 이미 마련돼 있다. 반면 실천 측면에서 우리는 훨씬 더 멀리 전진해야만 [한다.]”

사실 노해투의 ‘실천’이 무엇인지도 쟁점이다. 그들의 실천은 혁명적 정치 실천이 아니라 급진(비록 혁명적인 종류일지라도) 노동조합 운동 실천이다.

노동조합 지도부에 따라 좌우되는 기회주의/종파주의 동요

노해투는 정치 영역에서는 개혁주의 조직과 (이들과 함께하는) 공동 행동을 배격하는 종파주의 경향을 드러내 온 한편, 노동조합 운동 안에서는 해당 노조 지도자의 전투성에 따라 기회주의와 종파주의 사이에서 동요해 왔다.

노해투는 기존의 대다수 노동조합을 사측의 기구(흔히 “어용”이라고 함)로 치부하고, 노조 관료를 “자본가의 의지를 대변하고 관철”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노동조합에서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은 거의 성장하지 못”한다고도 주장한다.

노동조합과 노조 관료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이렇게 결여돼 있다 보니 노해투의 실천적 결론은 노동조합을 ‘혁명적’으로, 즉 조합주의를 극복하고 노동계급 총단결 기구로 바꾸는 것이다. 한 세기 전 미국 신디컬리스트들의 “One Big Union” 기치를 생각나게 한다.

이런 견해의 문제점과 그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조합과 노조 관료층의 이중적 성격을 보지 못한 채 일면적으로 인식하고, 노동조합 관료와 현장 조합원 사이의 이해관계 차이를 보지 못한다. 그러면, 관료층뿐 아니라 평조합원도 싸잡아 문제시하든지, 노동조합 관료의 독특한 지위와 구실을 보지 못한 채 그를 혁명적 또는 급진적 인물로 교체하면 개혁주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기게 된다. 실제로 노건투는 “계급성, 도덕성”을 가지면 노조 고위 간부 지위에 있는 인물도 관료가 아니라고 본다. “노동조합에서 노조 관료를 제거하고 건강한 노조 간부로 대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둘째, 혁명가들이 노동조합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도 노해투는 모순과 혼란을 보인다. 노동조합의 지도부를 바꾸자는 것인지 아니면 노동조합 자체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인지 말이다. 이 문제는 노건투 분열의 쟁점이기도 했다. 노건투 소수파(‘혁명적 노동자의 목소리’)는 다수파(노해투)가 노조 집행부 장악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른 한편, 노해투는 노동조합 바깥에 더 선진적인 계급의식이 있다는 듯이 주장하기도 한다. “정세의 핵심은 비정규직과 중소영세 노동자[이다.]”

이런 비일관성은 여러 혼란을 낳을 수 있다. 노동조합 집행권 장악 노선은 다른 많은 좌파들이 노동조합 운동의 한계와 개혁주의에 순응해 가는 통로였다. 다른 한편, 노동조합 바깥에 더 선진적인 계급의식이 있다는 생각은 노동자들의 현재 계급의식에 대한 초좌파적 환상일 뿐이다. 가령 노해투는 ‘노동계급은 0000을 꿰뚫고 있다, 0000에 대한 환상이 조금도 없다’ 등의 표현을 잘 쓴다. 이런 억측은 노건투가 자본주의 파국론과 함께 혁명 낙관론을 펴다가 준엄한 현실에 부딪혀 패배감을 오간 이유의 하나였다. 그래서 노건투 소수파는 노건투가 2008년 이후 (자본주의와 개량주의)궤멸론과 (혁명)낙관론 사이를 동요해 왔지만 이를 반성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셋째, 노동조합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공상)은 기회주의로 이어지기 쉽다. 노동조합은 혁명적으로 바꿀 수가 없다. 특히, 지금처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경제 불황이 결합돼 지속되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다 보니 급진 노동조합 운동론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괜찮은 인물 또는 자기 회원이나 조력자가 지도자로 있는 노동조합을 붉게 포장하면서 적응해 가게 된다. 노해투가 노동조합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노해투 자신이 적당히 전투적인 노동조합에 적응해 가는 게 현실인 것이다. 노건투가 중앙파 소속 금속노조 지도자인 박유기 씨에 대해 보였던 착각이 그런 사례다. 최근에 노해투가 자신들과 친화적인 인물이 이끄는 톨게이트 투쟁을 무슨 완전무결한 은하군단처럼 묘사하는 것은 또 다른 사례다.(이것은 노동조합 투쟁을 자신의 회원이나 조력자가 이끌면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의지주의적 가정도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당 건설 노선

노해투는 “상설적인 활동가 조직”을 통한 당 건설을 추구한다. 자신들만으로는 규모가 너무 작으니까 정치를 부차화한 채 노동조합 투사들을 모아서 활동가 조직을 만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활동가 조직을 노해투는 “활동가 공동전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공동전선’은 레닌과 트로츠키 하의 코민테른이 강조한 공동전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전투적 노조 활동가들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키기 위한 노해투의 외곽 조직일 뿐이다. 현재 노해투가 추진하고 있는 이 “활동가 공동전선”이 바로 ‘현장투쟁 복원과 계급적 연대 실현을 위한 전국노동자모임’(이하 전국모임)이다.

그러나 이런 급진 노동조합 운동 조직은 진정한 공동전선의 견지에서 보면 너무 좁은 데다 배타적이고, 혁명적 정당 건설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정치적으로 느슨하고 너무 폭넓다. 이도 저도 아닌 의심스런 조직인 셈이다.

먼저, 배타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전국모임은 개혁주의 정당 조직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주장하려면 기존 좌파 노조활동가 네트워크와의 차이를 강조해야 한다. 그들이 올해 초 좌파 공조로 추진된 경사노위 참여 반대 운동에 불참하고, 그 운동의 의의를 깎아내리고, 심지어 그 운동을 주도한 우리 단체에 “2차가해” 낙인을 찍어 연대 단절을 선언한 것은 이런 약점을 잘 보여 준다.

둘째, 정치가 아니라 전투성을 당 건설의 기준으로 삼고 급진 노동조합 지향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당을 건설하려는 것은 혁명적 원칙의 타협 위험성을 수반한다. 혁명적 지도와 노동조합 운동의 전투적·급진적 지도는 같은 게 아니다. 둘을 뒤섞으면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치와 그런 당을 건설할 수 없다. 트로츠키는 “노동조합에 관여하는 동지들은 언제나 볼셰비키당의 우파였다”고 지적했다. 개혁주의 경향이 불가피한 노동조합 간부층에 참여하면서 타협(때로는 배신적 타협)의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혁명적 당은 노동현장의 노사관계 투쟁으로부터가 아니라 그와는 독립적으로, 혁명적 정치를 기초로 건설돼야 한다.

울산공동행동과 현대차공동행동의 경험은 이런 모델(즉, 급진 노동조합 지향 활동가 네트워크를 통한 혁명적 당 건설)의 난점을 일찍이 보여 줬다. 종파적이면서도 쉽게 기회주의에 빠지는 난점 말이다. 울산공동행동과 현대차공동행동은 노건투가 주도한 급진 노조활동가 네트워크였다. 노건투는 도시 차원의 울산공동행동이 잘 안 되자, 노동현장 기반을 추구하면서 현대차공동행동을 만들었다. 그러나 노건투 소수파가 지적했듯이, 현대차공동행동은 여느 전투적 현장서클이 노조 집행부를 장악했을 때 보이는 행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금세 보여 줬다.

2017년 현대차공동행동 구성원들은 현대차 울산1공장 지도부로서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울산1공장 지도부는 기존 투사들끼리 행동하면 된다는 식으로, 별로 연대를 확대할 생각을 하지 않다가 느닷없이 사측과 합의를 했다. 게다가 투쟁을 앞둔 시기에 관리자들과 회식을 해서 조합원들의 의심과 반감을 사기도 했다.

전투적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훌륭한 활동가들이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자신의 활동을 그들과의 (일터나 사업장 내) 공동 활동으로 제한한다면 혁명적 당을 건설할 수 없다. 혁명적 정치는 조직 노동계급 속에 뿌리 내리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혁명적 좌파가 급진 노동조합 운동 지향 네트워크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그 네트워크가 아무리 급진적·전투적일지라도 결국에는 혁명적 정치를 타협하게 된다.

개혁주의에 대한 태도

개혁주의에 대한 노해투의 노선은 종파주의의 전형이다. 노해투는 1938년 이후 트로츠키의 파국론(특히, 개혁주의와 스탈린주의 궤멸론)을 수용하는데, 당시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더는 증대할 수 없고, 따라서 개혁의 여지가 없다고 봤다. 노해투는 그런 결정론적 견해를 거의 고스란히 수용하면서, 개혁주의가 설 땅이 없는 것으로 오해한다. 오늘날에도 노해투는 개혁주의가 지속불가능하므로 개혁주의 정당과 접점 없는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개혁 없는 개혁주의” 시대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개혁 없는 개혁주의”가 개혁주의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혁주의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변신을 거듭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 줬다. 노해투는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 개혁주의가 끝났다는 오해는 노해투의 잘못된 정세 전망의 주된 요인이 됐다. 그래서 박근혜 퇴진 투쟁 이후 개혁주의의 성장을 예측하지 못했고, 노동자 투쟁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리라고 내다봤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7~8월 노동자 대파업이 분출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말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 형태 하에서 중재 구실을 하는 정치·사회 구조들이 발전해 있어, 1980년대 말과는 계급투쟁 전개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 불황으로 자본가들이 개혁을 제공할 의지가 적더라도 말이다.

노해투는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 이후 상황이 자신의 예상대로 굴러가지 않자 이내 실망해, “촛불운동은 민주당 완승, 노동자의 참패로 마무리됐”고, “계급투쟁이 가라앉았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 관료층이나 그에 기반한 정당들이 충격 흡수 장치 구실을 하는 나라의 혁명가들에게는 개혁주의의 영향력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 즉 그들과 함께하는 공동전선 전술들(노해투 식의 협애하고 노동조합주의적인 ‘공동전선’이 아니라)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바로 이 점에서 개혁주의에 대한 노해투의 종파주의가 심각한 문제가 된다.

가령 노해투는 정의당이 철저히 선거와 의회 활동만 한다고 비판하고, 그들이 선거에서 선전하는 것이 오히려 “노동자 정치의 성장을 저해”한다고까지 주장한다. 2019년 4월 창원 성산 보궐선거에서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당선했을 때도 노해투는 그가 “민주당의 대리인”일 뿐이라며 “당선을 기뻐할 수 없다”고 했다. “정의당의 진짜 모습은 노동자 운동의 독립성을 파괴하면서 민주당을 대변하는 민주당의 왼쪽 날개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당과는 다른 정의당의 사회적 기반(사회운동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일부가 정의당 기반의 일부를 이룬다)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노해투의 종파주의는 선거제도 개혁에 오불관언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올해 쟁점이 된 선거제도 개혁을 “돼지들의 이권다툼”이라면서 정의당을 “자본가 정당들과 연합”해 “정치 지분을 늘리는 개량주의 정치세력”이라고 규탄했다.

이런 식이니 노해투가 개혁주의 조직들과의 공동전선을 진지하게 고려할 리 없다. 개혁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에게 다가가 영향력을 미칠 정책이 없는 것이다. 정의당을 “민주당의 왼쪽 날개”라면서 일축해 버리는 태도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트로츠키는 1930년대 초 독일에서 공산당의 혁명가들이 히틀러를 저지하기 위해 사회민주당과의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사회민주당은 불과 10년 전에 자유군단(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립크네히트를 살해한 불법 무장단체)과 제휴했던 정당인데도 말이다.

맺음말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혁명적 전술의 오랜 원칙을 바뀐 조건에 맞게 응용할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파주의는 그런 능력이 없는 조류이고 종파적 심리는 마음 속 깊이 남은 상처로, 그들의 “말뿐인 극단주의”는 그런 심리의 위안을 위한 것이자 수동성을 보여 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팔레스타인계 마르크스주의자 이가엘 글룩슈타인(토니 클리프)은 이렇게 덧붙인다. “혁명가들이 고립될수록 … 극단적인 구호의 유혹은 더 커진다. 사실상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마당에, 극단적인 혁명적 문구를 못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레닌은 초좌파주의자들을 당에서 축출한 일(1909년)을 회상하면서 《좌파 공산주의 – 유치한 혼란》에서 이렇게 썼다. “그런 혁명주의가 불안정하고 성과가 없다는 것, 그리고 순식간에 굴종과 냉담, 망상, 이러저러한 부르주아적 유행에 발작적으로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등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노해투가 페미니즘(사회이론과 방법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와는 완전히 다른)을 적극 수용하고 있는 일이 연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