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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인가, ‘비민주’노총인가
민주노총, 특정 단체 표현물 금지와 소속회원 취업시 사상검증 결정

최근 열린 ‘9월 기후정의행진(가)’ 첫 회의에서 민주노총 중앙 관료 기구는 김석 민주노총 정책국장을 통해 노동자연대를 이 연대체에서 배제하라고 요구했다. 우리 단체는 이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어떤 토론과 결정이 이뤄졌는지 아직 듣지 못했다. 또, 민주노총은 6월 18일 부산에서 열리는 고리 2호기 수명 연장 반대 집회에 노동자연대를 사실상 참여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다. - 2022년 6월 17일 편집팀

11월 18일(목)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이하 ‘중집’: 상임집행위원회 ‘상집’이 핵심인 민주노총 중앙 지도부이다)는 부끄러운 결정을 했다. 민주노총 집회·회의·대회에서 조합원들이 노동자연대의 표현물을 나눠주거나 받지 못하게 하고, 노동자연대 회원이 민주노총 취업시 사상검증을 하고, 이미 취업해 있는 노동자연대 회원들의 사상검증도 하기로 했다. 후자의 개인들은 사상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해고되거나 자진 사직해야 할 위험에 처하게 됐다. 오랜 불황기이므로 이는 생계와 관계있다.

참 대단한 ‘민주’노총이다. 노동자연대와 그 회원들이 배척당하는 것(“연대 중단”)도 모자라 입 틀어막기(표현물 금지)와 심지어 생계 위협하기 등의 제재들을 당해야 하는 무슨 범죄 조직과 그 조직원들이나 되는가?

정치적 목표와 신념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곳인 정치 조직도 큰 조직(정당)은 타단체 표현물을 금지하지 않는다. 노동자연대의 경우 자신의 축제 ‘맑시즘’에서 다른 운동단체의 출판물 판매를 금지하지 않고, 축제의 압도적 부분인 워크숍들에 노동자연대와 상당히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연사로 초대한다. 가령 최무영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기후 위기를 심대하게 우려하는 생태주의자로, 혁명적 좌파 인사라고 할 수 없음에도 18년 전부터 여러 차례 ‘맑시즘’ 축제에 강연자로 참가했다.

하물며 조합원들의 권익과 조건을 지키는 것이 본령인 노동조합이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조합원 개인들의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 황당하리만큼 비민주적이다.

사실 노동자 집회들에서 이미 민주노총은 조합원들에게 노동자연대의 간행물을 받지 말라고 연단에서 공식 멘트로 지시해 왔는데, 얼마 전에는 간부 하나가 〈노동자 연대〉 신문을 반포하던 조합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일보〉도 [반포] 못 하게 하는데 당신네 신문을 그래서는 안 되라는 법이 있냐.”

막말을 할 수도 있지만, 가려서 해야 한다. 노동자연대를 친사용자·우익 조직 조선일보사에 빗댈 정도로 계급에도 맹목이고, 세계관에도 맹목인가? 반민주적 조치도 모자라 우익 언론사와 동일시하는 막말 하기, 이게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온 주요 사회세력이 할 법한 행동인가?

민주노총은 1년 반 전인 2020년 4월 16일에는 노동자연대와의 연대 중단을 결정했다. 노동 ‘조합’이 연대를 거부한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를 민중공동행동과 이주노동자공동행동 등을 비롯한 모든 연대체에서 밀어내는 일을 자행해 왔다.

그리고 집회장에서 쫓아내기도 했는데, 많은 사례 중 단지 하나의 사례만 들면, 2019년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연좌농성을 이어가던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연대의 대학생 지지자들이 생수 몇 박스를 제공하려던 것을 막고 쫓아내기도 했다. 이런 일이 그 한증막 더위 속에서 초인간적 고생을 하며 저항하는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나?

민주노총 중집은 지난번 연대 중단 결정에 이어 이번에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결속을 획일적으로 유지하겠다는 의도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 유대인들의 법령집(탈무드)은 만장일치 평결이 나오면 그 결정을 인용(認容)하지 않고, 며칠 재고하라고 했다. 권리에 대한 고려가 충분했는지 반성적으로 돌아보라는 것이었다.

권리를 중시한 현대의 법철학자 하나는 탈무드의 규정을 고찰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어떤 집단의 의사결정이 정당화될 수 있으려면 그 집단의 이익보다는, 그들이 내리는 결정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반드시 존중하고 보장해야만 한다(로널드 드워킨, 《법과 권리》, 한길사, 2010).

이렇게 보면, 민주노총 중앙 간부들의 이번 결정은 (언론과 사상, 표현의 자유라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자신들의 결속을 도모한 것이었다. 이 결속의 명목상 근거로 ‘성폭력 2차가해’를 금지하는 민주노총 규정이 이용됐다.

2차가해 개념의 모호함

국가보안법상의 ‘이적’ 규정은 모호해서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므로 보안법은 법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지적을 많이들 한다. 북한 국가를 사회주의적 국가로 여기지조차 않는 몇몇 단체들이 보안법상의 ‘이적’ 단체로 규정되면서 바로 얼마 전까지도 탄압받았다. 이와 비슷하게, ‘2차가해’ 개념도 매우 모호해서 제재 규정으로서 부적절하다.

‘2차가해’ 개념의 모호함의 사례를 들면, 지난해 4월 16일 민주노총 중집의 연대 단절 성명은 노동자연대가 “피해자의 진술 부정” 등의 2차가해를 했다고 적시했다. 피해호소인 측의 거짓 비방과 모함을 반박하고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나, 피해호소인 측에게 “공동 진상조사”를 제안한 것이 피해자의 진술을 부정하는 2차가해 행위라는 것이다.

2017년 5월 16일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의 회의 결과에 이런 내용이 있다. 김수경 국장이 2015년 7월 K 당시 민주노총 지역 간부에게 성폭행 혐의를 자인하는 자술서를 쓰도록 종용한 것(그러나 K는 나중에 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을 최미진 〈노동자 연대〉 신문 기자가 비판한 것을 두고 “명백한 2차가해”라며 노동자연대와의 여성사업 연대 단절을 결정했다.

그러나 ‘2차가해’ 개념은 성폭력 사건과 무관한, 사건 발생 전 피해자 ‘행실’과 이력을 끄집어 내어 피해 호소 여성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것에 국한해서 적용돼야 한다:

“일부 강간죄 남성 피고인의 변호인들은 여성 고소인이 성범죄 우범 지역을 배회했다는 이유로, 야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과거에 성경험이 풍부했다는 이유로, 성매매 업소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정신질환 병력이나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성폭력 당시 음주 상태였다는 이유로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이러한 시도는 인식적 정당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라고 본다.” (최성호,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필로소픽, 2019, 21~22쪽)

성폭력 사건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함부로 “피해자답지 않다”고 예단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사건 후에도 평소처럼 출근하거나 피해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피해자상”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지 않으면 피해자가 아니라고 성급하게 의심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데 적잖은 성 관련 사건이 그 실체를 확신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최종 판단은 해당 사건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주어진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같은 책, 2019, 39~40쪽)

“충분한 정보가 주어진”다면 피해 호소인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하는 일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같은 책). 성 사건의 특성상 피해 호소인의 진술 증거 외에 사건의 실체를 증명할 객관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피해 호소인의 진술 증거에 대한 신빙성 평가가 불가피하게 판단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2차가해’나 ‘2차피해’ 등으로 부르며 거부한다면 사건의 유일한 증거에 대한 검증 자체를 포기하는 셈이다. “성범죄 고소인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 평가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매우 비상식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비상식이 비교적 최근까지도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주창되어 왔다는 사실은 진정 놀라울 따름이다.”(같은 책, 100~101쪽)

2차가해 개념 적용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

이런 ‘비상식’, 비이성은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말에 불과한 ‘2차가해’도 모종의 폭력(성폭력)으로 여기면서 흔히 감정적이 되기 때문인데, ‘2차가해’ 개념의 모호함과 주관성이 이를 더욱 부추긴다.

특히, ‘1차’ 가해(원사건)의 존재 여부와 전혀 관계없이 ‘2차’ 가해에 대해 말하며 비난하는 경우가 매우 흔한데, 이 개념의 비이성적 성격의 전형적 사례다. 그런 비난의 원천은 모종의 편견인데, 특히 레닌주의적 조직은 흡사 갱스터 조직과도 같아서 ‘2차가해’를 서슴지 않으며 내부의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고도 남을 폭력적 음모 집단이라는 편견이 정체성 정치 지지자들 사이에서 강하다.

이런 사람들은 ‘2차가해’를 마치 일종의 범죄(성폭력 범죄)로 여긴다. 그러나 ‘2차가해’는 범죄 문제가 아니라 말의 문제, 언어 문제다.

말은 말로, 토론과 논쟁으로 대응해야지, 행정 조치로, 힘으로 누르는 것은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자신이 느끼기에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들리는 말에 대한 비판은 종종 토론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기구의 권위를 업고 행정 조치와 강제를 이용해 처벌과 응징을 하는 것은 이성적 토론 문화를 가로막는 일이다.

그러므로 민주노총의 행동과 관련해 표현 자유 문제가 진정한 쟁점이지, (노동자연대가) 2차가해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진정한 쟁점이 아니다. 백보 양보해 노동자연대가 2차가해를 했다손 치더라도, 민주노총이 이렇게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 진정한 쟁점이다.

사람들이 보안법을 왜 비판하는가? 바로 주장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북한을 이롭게 한다고 모호하게 규정된 주장을 하면 처벌받게 된다. 그러나 여러 해 전에 어떤 진정한 자유주의자 한 분이 적절한 발언을 하셨다.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합법 집회 참가자들이 “김일성 만세”를 외쳐도 허용돼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우리는 민주노총은 물론 거의 모든 정치조직들이 외면하고 있는 충북의 평화 운동 활동가들을 방어하고 있다. 왜 평화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을 힘으로 때려잡느냐고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폭력 아닌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상해 입히지도 않은 누군가가 “북한에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이로운” 주장을 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국가 탄압에서 그를 방어하지 못하게 하고, 활동가들을 분열시키고 무력하게 만든다.

이와 비슷하게, 언어에 불과한 2차가해를 이유로 곳곳에서 개인과 단체를 응징하려 하는 극단적인 ‘정치적 올바름’ 투사들에게 투항해서는 안 된다.

마치 (이론상으로는 헌법이 상위에 있다지만) 실천상으로는 헌법보다 보안법이 우위에 있듯이, 2차가해 규정은 노동조합 민주주의든, 사상과 표현의 자유든, 노동계급 단결과 연대라는 대원칙이든, 그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런 비민주적·억압적 결정의 실행에 기층 조합원들이 묵종한다면, 기층 조합원들에 대한 노동조합 지도층의 우위가 더 쉽사리 관철돼, 민주노총은 전반적으로 더욱 관료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올바름’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서 기층 조합원들을 가혹하게 판단하고 심판한다면, 기층 조합원들은 대부분 도덕적으로 크게 위축되고 정치적 자신감의 상승도 제약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관료층의 개혁주의적 이해관계

〈노동자 연대〉 신문 지지자들에게 좀 더 관심 있을 질문은 이것이다: 민주노총 조직들과 다양한 좌파 단체들 내에서 허구한 날 ‘2차가해’ 소동이 일어난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집회장에서 〈노동자 연대〉 신문 반포를 ‘2차가해’ 단체의 간행물이라며 반포 금지시키는 데 앞장섰던 인물의 하나인 권수정 금속노조 여성할당 부위원장이 ‘2차가해’를 했다는 이유로 금속노조 일부 상근간부들의 징계 요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밖에도 ‘2차가해’를 둘러싼 갈등이 무수히 벌어져 왔는데 왜 유독 노동자연대가 배척·억압·접근금지 대상이 되고 있을까?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와 ‘노사정 합의’ 시도 좌절에 각각 노동자연대 단체와 〈노동자 연대〉 신문이 중요한 구실을 한 지 얼마 안 돼 민주노총의 중앙 지도부가 연대 중단 결정과 며칠 전 추가적인 제척(除斥) 조치를 취한 것을 결코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다.

물론 결정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정황 증거는 수두룩하다. 어떤 정황인가? 한때 노동자연대 회원이었으나 공공운수노조 간부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단체를 탈퇴한 김진경 당시 의료연대본부 서울지역지부장이 민주노총 중집의 연대 중단 결정 때 한 말이 시사적이다. “우리가 노동조합 고위 간부들에 대한 입바른 소리를 잘 하니까 그들에게 미움 받는 거예요.”

어떤 정황 증거가 있나? 먼저, 전임 김명환 상집은 문재인 정부 출범 겨우 몇 달 뒤부터 거의 2년간 ‘사회적 대화’를 성립시키려고 애썼는데, 그때 민주노총 좌파들이 연합해서 그 노력을 좌절시켰다. 그때 노동자연대 측이 여러 차례 발표된 좌파 공동 성명을 모두 초안했다.

‘사회적 대화’(경사노위)가 좌절된 지 얼마 안 되고부터 이른바 ‘노동자연대의 2차가해 문제’를 놓고 노동자연대에 대한 김명환 팀의 갈굼과 괴롭힘이 시작됐다. 그러더니 다음해(2020년) 4월 16일 마침내 민주노총 중집은 노동자연대와의 연대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바로 그 중집 회의에서 중집은 노사정 교섭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본지는 팬데믹으로 더한층 악화되고 있던 경제 상황과 정부와 사용자들의 의도, 노동자 사기에 미칠 영향 등을 지적하며 노사정 협상과 교섭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급진좌파 정치조직 지지자들인 중집 위원들조차 모두 노사정 교섭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 잠정합의안은 7월 23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됐다.

그 직전에, 조합원들의 강한 반발과 부결 운동을 의식한 다수 중집 위원들은 김명환 당시 위원장을 속죄양 삼으면서 부결 운동 측을 지지했다. 그 결과 간신히 체면을 살렸지만 그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이후 김명환 당시 위원장과 그의 팀은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나머지 상집 위원들은 부결 운동 지지 덕분에 임원 선거에서 대부분 살아남으며 새 상집을 범좌파적으로 구성했다. 상집의 분열로 가슴 철렁한 상황에 직면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이번 중집 회의에 안티 노동자연대 안건을 상집안으로서 상정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특별히 언급할 만한 사례는 윤택근 위원장 직무대행과 양동규 부위원장이다. 두 사람은 모두 전임 김명환 상집 내에서 처음에는 여성위원회에 맞서 노동자연대를 방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지난해 4월 16일 중집 회의(위에 언급된, 노사정 교섭 추진 결정이 이뤄진 바로 그 회의)에 상정될 노동자연대와의 연대단절안을 김명환 팀이 성안하는 것을 용인했다.

그러더니, 이번 중집 회의를 앞두고는 윤택근 위원장 직무대행이 아예 앞장서서 노동자 연대 억압과 노동자연대 회원 사상검증 상집안을 작성해 상정했고, 양동규 부위원장은 그 안의 중집 통과에 협조했다.

이들의 이런 기회주의적 행동을 단지 개인 품성 탓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노동조합 관료들이 서로 한 배를 탔다는 연대 의식으로 결속돼 있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강조점을 알아야 한다. 의식에는 물질적 토대가 있는 법이다. 바로 노동조합 관료는 노동계급 내에서 공통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지닌 하나의 특수층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 이해관계인즉슨, 노동력 상품의 판매 조건을 둘러싸고 사용자들과 교섭과 협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력이 상품인 상황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의 존속을 전제로 한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가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자문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 혁명 과정에서(1918~1923) 노동조합 관료의 대부분은 혁명적 좌파인 스파르타쿠스단과 그 후신인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고 사회민주당이나 독립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동요한)을 지지했다. 독일 노동조합 관료가 혁명가들(특히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립크네히트)을 껄끄럽게 여기고 따끔한 맛을 보여 줘 길들이고 싶어 한 것은 1914년 제1차세계대전 개전 훨씬 전인 189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1889년 10만 광원 파업 이후 노동조합 운동 성장의 결과로 1897년 독일자유노동조합연합을 설립하면서 노동조합 관료가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했을 때였다. 바로 그때,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베른슈타인이 주도한 수정주의자들(요즘 용어로 개혁[개량]주의자들)이 노동조합 관료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었다.

맺음말

노동자연대는 괜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개혁주의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서 민주노총 관료의 온갖 압력과 고립화 시도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정도가 심지어 양심의 자유를 짓밟으며 서약서 서명 등을 강요하려는(이것이야말로 폭력의 한 형태 아닌가?) 수준에 이른 근본주의 전사들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속해 있고 기반으로 삼고 있는 전체(“만장일치”) 관료가 큰 문제이고, 이들의 개혁주의가 진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찬반 양쪽이 각각 20만 명씩 참가하는 맞불 집회를 열던 조국 사태 때 민주노총은 침묵함으로써 문재인 정부의 위선 폭로를 암암리에 삼갔고, 청와대의 검찰 ‘개혁’ 소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적 대화’(경사노위)가 좌절된 후, 팬데믹을 이유로 노사정 합의를 이루려다 대의원들의 반발로 또 좌절했다.

올해 연초에 옛 지도부를 대체한 새 지도부는 중반에 택배 노동자, 건설 노동자, 병원 노동자 등의 저항으로 부양력을 받았다. 그러나 민주노총 안팎 다양한 개혁주의 세력들의 영향으로 정치적으로 미묘한 역학 관계 속에 있던 건보 고객센터 비정규 노동자 파업(여성이 전부는 아니었어도 압도 다수였다)에 직면해서는 개혁주의 앞에 무력했다. 전임 김명환 지지자들을 배제한 범좌파 지도부 하의 민주노총이었다.

‘민주노총 주도 민중경선’ 제안도 부양력을 거의 못 받고 있다. 중집은 김명환 전 위원장이 속한 관료 내 경향의 대다수가 분명하게 또는 암암리에 지지하는 이재명 지지 운동을 견제하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이런 정치적 회피·모호함·무능력·무기력 속에서 그나마 (“만장일치”로) 결의한 정치적 조처가 기껏해야 일부 좌파 단체들 억압이라니. 경제 위기와 감염병 위기와 기후 위기(그리고 어쩌면 갑자기 닥칠지도 모를 안보 위기) 속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할 만큼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어찌 보면, 자신의 정치적 과오와 왜소함을 면피하고 자체 결속을 다지려는 속죄양 만들기에 불과하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별로 효과적이지도 않지만, 분별력 없는 일을 누군가가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실소(失笑)가 터져나오는 것이다. 만일 그 누군가가 정치 상황의 교착 상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면 사람들은 실소를 터뜨리지조차 않는다. 지금 지각 있는 많은 진보파 인사들이 민주노총의 결정에 보이고 있는 반응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에 보이는 반응은 그냥 ‘어깨 한 번 으쓱하기’이다. 어떤 사람은 “또야!” 했고, 어떤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어떤 사람은 “남자들 훈계하고 죄인 취급해 결국 젊은 남자들 속에서 반발 부르더니…” 했다. 물론 백래시의 주된 책임은 문재인의 지지자 배신과 그의 페미니스트 자처에 있다. 하지만 그의 허상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금치의 관대함도 보이지 않는 엄격주의자들을 말리지 않고 일종의 페미니스트 ‘진영’을 계속 다지려 애썼던 일들을 성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좌파 단체의 침묵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그들 가운데, 자기네는 2차가해론(그리고 피해자중심주의도)을 받아들이므로 톨게이트노동자 투쟁 지지 공대위나 민중공동행동 등에서 노동자연대 밀어내기에 자기네도 앞장섰다고 인정할 급진 좌파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보안법 피해자 방어에서 그의 주장이 쟁점이 아니라, (국가 탄압으로부터) 그의 표현의 자유가 쟁점이듯이, 2차가해 했느냐 안 했느냐가 쟁점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듯한 말을 하면 연대 단절의 대상이 돼야 하느냐가 쟁점이다.

2차가해론을 지지하지 않는 좌파 단체들의 경우, 대부분은 자기 단체 일과 노동조합 일을 예리하게 분리시키는 관점에서 민주노총의 행동을 묵인한다. “민주노총 상집에 따져라,” “금속노조 상집에 따져라”는 게 그들의 답변이었다. 윤택근 위원장 직무대행이 속한 정치적 경향의 한 중진급 인사도 똑같은 대답이었다. 나는 이런 회피의 근원이 정치 운동과 ‘경제’ 운동의 역할분담과 분업에 있고, 바로 이것이 역사적으로 개혁[개량]주의의 원천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박근혜 퇴진 대중 운동의 성공과 그 이후 더 넓게 열린 개혁주의적 공간을 재빨리 비집고 들어가려 하느라고 노동조합과 공직, 당직 등 선거에서 괜한 시비에 휩싸이고 싶지 않은 심정을 이해한다(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전에 자신이 개혁주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왔다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요즈음은 심각성의 차이는 있어도 1930년대처럼 극단적 양극화의 시대일지 모른다. 당시에는 철학 학파의 리더(논리경험주의자들인 빈 학파의 모리츠 슐릭)가 종교, 윤리, 형이상학, 시를 전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보수 우익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런 일에 비하면 노동자연대가 “민주노총 세상에서 ‘불가촉천민’의 낙인이 찍”(어느 좌파 언론인의 말)힌 것은 아직 약과인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연대를 가벼이 여기는 활동가, 좌파, 사회주의자 등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이를 회피하거나 정당화하는 태도들도 흔히 보게 됐다. 그러나 거창한 비유이지만, 나치의 폭압에서 살아남은 어느 목사 하나(마르틴 니묄러)가 한 너무도 유명한 말을 다시 상기시키고자 한다.

“처음에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거리낌없이 말하지 않았다. 내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잡으러 왔다. 나는 거리낌없이 말하지 않았다. 내가 노동조합 활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이 유대인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거리낌없이 말하지 않았다. 내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다. 그때는 나를 대변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