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마르크스주의자 인터뷰:
홍콩 항쟁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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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홍콩 정부의 송환법 발의가 투쟁 물결을 촉발하면서 홍콩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었다. 한국에서도 이 항쟁에 대한 지지 캠페인과 연대 시위도 벌어졌었다. 홍콩 마르크스주의자 람치렁이 홍콩 항쟁, 그 항쟁의 기원이 되는 이전의 사회 운동들, 2019년 항쟁 이후 벌어진 일에 관해 영국의 혁명적 좌파 계간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과 이야기한다. 람치렁은 홍콩 ‘레프트21’ 회원이며 《후기 천두슈 선집》의 편집자다. 그는 홍콩 태생으로 광저우 지난대학교를 다녔고, 1989년 톈안먼 항쟁 연대 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홍콩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방 언론 보도에서는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조한다. 2019년 홍콩에서 중국의 송환법 도입 시도에 맞서 분출했던 운동이 현재는 진압된 것으로 보인다.1 정말 그러한가?
송환법 반대 운동은 진압됐다고 봐야 한다. 2021년 10월 현재 1만 265명이 체포되고 2684명이 형사 범죄로 기소되고 이 중 720명이 소요죄로 기소됐다. 활동가 9명이 자결했고 시위자 일부는 살해당한 것으로 의심된다.
이 운동은 2019년 3~4월에 소수가 참여한 연좌 농성과 행진으로 시작됐고,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6월 9일 광범한 대중 시위로 발전했다.2 시위가 고조되면서 6월과 8월에는 각각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행진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만 명이면 홍콩 주민 네 명 중 한 명이 참여한 셈이다. 또, 7월 1일에는 시위대가 홍콩 입법회 건물을 [일시적으로] 점거하는 데 성공했고 8월 5일에는 정치 파업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중등학교 학생들이 9월에 대거 인간 사슬을 만들며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와 학생들이 홍콩이공대와 홍콩중문대를 점거했다.
11월 경찰과 격렬한 충돌을 벌일 때 운동은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020년 1월 말 홍콩에서 코로나19가 퍼지자 계획된 시위가 취소되거나 축소됐으며, 그 후 중국 정부는 홍콩 입법회를 우회해 6월 30일에 극도로 반동적인 국가보안법을 관철시켰다. 이 법이 통과된 후에도 6월 4일 홍콩 전역에서 자발적인 촛불 시위가 열리는 등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지만, 대중운동은 대체로 끝났다.
코로나19 등의 요인들이 저항의 패턴을 어떻게 바꿨는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시위가 잦아든 후의 상황은 어떠한가?
송환법 반대 운동에서 추진력을 받아 2019년 말 새로운 노동조합들이 잇달아 설립됐다. 일선 공공의료 노동자들이 설립해서 2만여 명을 조합원으로 가입시킨 공공 병원 노조인 의관국원공진선(HAEA)도 그런 사례다. 이들은 2020년 2월 3일부터 5일간 파업을 벌이며 의사, 간호사, 병원 직원들에게 적절한 개인 보호 장구를 제공하라고 홍콩 의원관리국에 요구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우한에서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중국 본토와의 출입을 즉각 통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홍콩에서 코로나19 초기 국면은 홍콩 정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새로운 노동조합 운동의 성장을 가속시켰다. 사람들은 조직되지 않은 거리 행동보다 조직 노동계급이 운동을 전진시키는 데서 더 낫다는 것을 경험했다.
홍콩에서 코로나19는 2020년 2~4월에 가장 심각했고, 5월부터는 상황이 점차 나아졌다. 그러나 팬데믹이 완화됐음에도 홍콩 정부는 집회 제한 지침을 해제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노동절 행진을 불허했다. 홍콩 정부는 이러한 지침을 이용해 6월 4일 톈안먼 항쟁 기념일, 6월 9일 송환법 반대 운동 기념일, 7월 1일 홍콩 반환 기념일 등 “민감한 날짜”에 열리는 대규모 집회를 막는다.
2020년 6월에 시행된 국가보안법은 애초 입법 취지대로 대중 저항을 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이 법은 매우 가혹하다. 예를 들어 이 법은 홍콩 독립을 공공연히 요구하는 것을 포함해 매우 다양한 활동들을 국가권력 “전복” 활동으로 규정하고 금지한다. 홍콩 정부 타도나 중국 공산당 타도를 외치거나 현수막에 써서 내거는 것 등도 이 법에 걸릴 공산이 크다.
외국 정치 세력과의 “공모”도 금지하는데, 이 죄목은 명확하게 정의돼 있지 않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은 중국 공산당 정부와 연계된 공안 기관들로 구성된 특별 공안 기관의 설치를 규정하고 있다. 이 기관은 온라인 콘텐츠를 삭제하고, 가택을 수색하고, 개인에게 어떠한 정보든 요구할 권한 — 이에 대한 묵비권은 없다 — 이 있다. 기관의 집행관들은 심지어 법원 승인 없이 개인 자산을 동결할 수도 있다. 이 기관은 사실상 홍콩 현지의 법에 매여 있지 않으며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중등학교와 도서관들은 홍콩 독립을 주장하거나 범민주파에 더 투쟁적인 저항을 촉구하는 책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른바 “애국 이데올로기” 정책으로 세뇌 교육을 시도할 계획이다.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홍콩 상황은 암울하다. 100여 명이 이 법에 의해 구속됐고, 그중에는 범민주파의 2020년 입법회 선거 예비 경선에 출마한 반정부 인사 47명도 있다. 운동을 지지하는 홍콩 신문 〈빈과일보〉의 발행인인 지미 라이와 그 신문의 고위 간부들도 체포됐다. 정치 단체, 시민사회 단체 40여 곳이 해산을 선언했다. 민간인권전선, 홍콩직업교사노조, 홍콩직공회연맹(HKCTU), 애국민주운동지원 홍콩시민연합회(지련회), 홍콩중문대 등의 학생회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게 싸우지도 않고 항복할 것인지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조기 해산을 주장하면서 그렇게 하면 당국이 관용을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조기 해산하지 않으면 물리적 공격을 당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는데, 이는 현실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해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중 하나인 토니 초우항텅 지련회 부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직면한 위험이 클수록 각 선택의 장단점을 차분히 평가해야 한다. … 정권은 칼을 뽑아 들었다. 지금 국면에서 정권의 작전에 ‘협력’하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어떠한 이점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2021년 6월 강제 폐간된 〈빈과일보〉와 함께 다른 대안 매체들도 심각한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다. 〈입장신문〉 웹사이트는 지난 기사를 전부 삭제했다. 원칙상으로는 독립적인 편집권이 있는 공영 방송국인 홍콩라디오텔레비전은 지난 1년간 엄격한 정부 검열을 받았다. 일부 프로그램이 중단됐고 일부 진행자는 교체됐다. 홍콩 시민들은 온라인에 글을 올리거나 정치적 구호를 제기할 때 공안 당국에 적발되거나 신고될까 봐 더 조심스러워 하게 됐다.
국가보안법은 “분리주의적”이거나 “사회 전복적,” “외세와 공모”하는 행위뿐 아니라 그런 말도 형사 처벌하도록 돼 있다. 이 법이 처벌하는 세 법적 범주의 정의는 매우 모호하다. 중국 당국은 정치적 “레드 라인”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일부러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홍콩 시민들을 겁먹게 만들어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것이다. 이미 일부 친중 인사들 사이에서는 국가보안법으로 공개 활동 중인 반대파를 공격해야 할 뿐 아니라 이를 촉매제 삼아 최소 2년 동안 “정치적 숙청”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홍콩의 사법, 사회, 문화, 이념, 교육 및 언론 기관의 대대적 변화를 꾀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홍콩 정부는 중국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려고 현재 홍콩 기본법 23조와 관련된 입법 절차를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홍콩 정부는 중국 정부의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한 자체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중국 당국은 오랫동안 그러한 법을 도입하고 싶어 했는데, 2003년 홍콩 시민 50만 명이 행진을 벌이면서 비슷한 입법을 보류시킨 바 있다.
2019년 운동의 성격과 구성은 어떠했는가? 어떤 사회 집단이 참여했는가? 운동은 어떻게 조직됐는가? 핵심 요구와 구호는 무엇이었나?
송환법 반대 운동은 1997년 영국의 홍콩 반환 이래 가장 크고 격렬한 대중투쟁이었다. 이 운동은 홍콩 사람들이 홍콩 반환 이후 현 상황에 대한 불만과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심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 대중운동에는 주로 청년과 중년층이 참여했지만, 노년층과 은퇴자들도 참여했다. 대학생, 중등학생, 노동조합원, 간호사, 사회복지사, 교사, 공무원뿐 아니라 노인들이 조직한 운동 지지 집회도 있었다. 행진과 도심 점거는 주로 SNS를 통해 발의됐고, 파업은 노동조합의 호소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행진이든 봉쇄든 파업이든 사회운동 단체와 노동조합이 주되게 조직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행동들은 본질적으로 자생적이었다. 그래서 이 운동은 “분권화되고 조직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됐다.
대중운동은 자생적으로 “5대 요구, 하나도 빼먹지 마라”를 핵심 구호로 채택했다. 이 5대 요구란 송환법 완전 철회, 경찰 폭력 조사위원회 구성,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구속 시위자 석방, 행정장관과 입법회를 선출할 “양대 보통선거권”이었다.3 다른 유명한 구호로는 “광복홍콩”, “시대혁명”, “자유를 위한 투쟁, 홍콩에 연대하라” 등이 있었다. 국가 폭력이 심해짐에 따라 운동 내에서는 경찰 폐지 목소리까지 나왔다.
5대 요구 중 어느 것도 사회·경제적 요구는 아니었지만, 폭넓은 대중 참여는 극심한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반영했다. 홍콩의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을 크게 심화시켰다. 홍콩 시민 5명 중 1명, 약 165만 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산다. 부의 불평등을 측정하는 지니계수는 미국이나 싱가포르보다 높다. 송환법 반대 운동에서 처음으로 자결한 청년 마르코 렁 링킷의 아버지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송환법을 부자들에게 안성맞춤으로 만들었지만 나머지 홍콩 사람들에 대한 보호는 없다. 정부는 맹목적으로 부를 추구하면서 청년들을 부자 밑에서 일하는 노예로 만들었지만, 하층민과 서민은 정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
누가 운동을 지도했는가? 더 주류적인 정치 세력은 운동에 참여했는가?
이는 조직적 지도력과 정치·이데올로기적 지도력 측면으로 나눠서 얘기할 수 있다. 조직 면에서, 평화 행진은 주로 민간인권전선이 발의했지만, 관청 습격과 대학 점거는 SNS를 통해 동원됐다. 이 운동은 “큰 무대 없는” 저항을 표방했다. 야당도, 사회운동 단체도 지도를 자임하지 않았고 감히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여러 행진을 발의한 민간인권전선도 운동의 모든 측면을 지도할 권위와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대중이 참여할 무대를 제공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 운동은 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상을 반영했다. 우익적 관점에서 중국으로의 통합에 반대하는 극우적인 홍콩 본토주의의 친미·반중적인 조류가 이 운동을 장악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불행히도 좌파 또한 운동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파편화돼 있었다.
“큰 무대 없는” 저항이라는 관념은 온건한 민주당 인사들의 약점과 타협에 대한, 특히 젊은 활동가들의 불만에서 비롯한 면이 있다.4 이 활동가들은 운동을 지배하려는 정당 일체를 불신한다. 하지만 극우 본토주의자들 역시 끊임없이 이 관념을 설파하며, 심지어 자신들이 “큰 무대를 허물고 있다”고 주장하고 진보적 사회운동을 비방해서 운동의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운동의 한 구호인 “분열하지 마라!”는 표면적으로는 상호 비방 없는 평화 시위와 행동 통일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극우 본토주의자들이 비판에서 자유로운 채 조직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효과를 낸다.
좌파인 우리는 관료적·상명하달식 조직이냐 아니면 조직되지 않은 형태의 시위냐 하는, 어느 선택도 바람직하지 않은 양자택일의 문제로 사태를 바라보지 않는다. 제3의 대안이 있다. 참가자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아래로부터의 조직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조직이 만들어졌다면 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의 장이 되고, 더 중요하게는 운동을 약화시키는 개인들의 행동에 대항할 집단적인 힘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대중의 자기 조직화를 향한 중요한 일보 전진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2019년의 운동은 이런 목표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이 운동의 주요 약점이었다.
2019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대중 저항이 일어났다. 홍콩 사람들은 이러한 더 광범한 운동과 스스로를 동일시했는가?
홍콩 항쟁이 벌어지는 동안 카탈루냐 독립 활동가들에게 연대를 표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홍콩 대중이 카탈루냐나 전 세계의 다른 투쟁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것은 아니다. 홍콩은 세계 시민주의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홍콩의 일반 대중은 그다지 국제적 마인드가 없고 대부분 여전히 영국과 미국 주류 언론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럼에도 송환법 반대 운동은 결코 고립된 현상이 아니었다. 2019년 이란, 이라크, 에콰도르, 칠레에서 대중운동이 분출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2011년 ‘아랍의 봄’에 빗대 “개발도상국들의 봄”으로 일컫기도 했다. 프랑스와 카탈루냐 등 선진국에서도 만만찮은 운동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투쟁을 촉발한 쟁점도, 투쟁의 방식도 저마다 달랐지만, 이러한 반란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분노를 공통점으로 한다.
심각한 빈부격차가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현 질서에 대한 깊은 실망을 자아내고 있다는 점은 홍콩과 중국의 지배계급도 아는 바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은 이 운동을 반년 넘게 지속시킨 불쏘시개가 됐고, 다수 여론은 여전히 시위대를 지지한다. 송환법은 항쟁의 기폭제였을 뿐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의 신자유주의 정책, 금융·부동산 자본가의 착취 행태, 부자들에게 굽실거리는 홍콩 정부에 있다.
2019년 이후 홍콩과 여타 지역의 투쟁들은 어느 정도 리더십의 위기를 보였는데, 이는 특히 “분권적이고 리더 없는” 운동을 표방한 홍콩에서 심각했다. 수단 혁명의 “저항위원회”나 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이 만들어낸 “총회들의 총회”와는 대조적이다.
2014년 우산 운동 같은 이전의 운동과 2019년의 운동 사이의 연속성과 차이점은 무엇이었나?
홍콩에서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고조된 오랜 투쟁의 주기가 이어졌다. 2009년 홍콩 고속철도 연결 반대 투쟁과 2012년 국가 교육과정 시행 반대 투쟁도 그 일부다. 이러한 시위의 근저에는 홍콩 정부가 도시 계획 정책에서 거대 컨소시엄을 편애하고 중국 정부가 중등 교육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도입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의 급진화가 있었다. 2014년 우산 운동과 2019년 송환법 반대 운동도 대중투쟁의 이 기나긴 연속의 일부다. 이 모든 투쟁들의 공통점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얻어 내기 위해 급진적인 행동에 나서고자 하는 욕구였다. 비록 주도면밀하게 숙고된 계획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계보에도 불구하고 2019년 운동은 이전 운동과는 다른 특징을 보였다. 첫째, 입법회 선거와 행정장관 선거에서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려고 했던 우산 운동과는 달리, 송환법 반대 운동은 기존의 개인 자유와 기본권이 더 침해당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공세적인 투쟁이 아니라 방어적인 투쟁이었다.
둘째, 우산 운동이 후퇴하지 않는 “용감한”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장기간 거리 점거와 같은 전술을 추구했다면, 송환법 반대 운동은 초기에 더 유연한 전술을 채택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탄압에 맞서 위치를 완강하게 사수하기보다는 “스마트 투쟁”으로 묘사되는 시위 전술을 구사했다.
셋째, 우산 운동 때는 많은 극우 본토주의자들이 “홍콩을 우선하라” 같은 데마고기적 구호로 운동을 납치할 수 있었다. 이런 구호는 대체로 중국 본토에서 온 새로운 이주자와 관광객을 표적으로 삼는 것이었다. 반면, 송환법 반대 운동에서는 극우 본토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뚜렷하기는 했지만 약화됐다. 2019년 운동 참가자의 다수는 평화 시위와 파업을 지향하는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극우 본토주의자들을 비판했고, 상당히 현실적이게도 중국 본토 주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예컨대 2019년 7월 7일 가우룽 지구에서 벌어진 한 시위에서는 시위 조직자 일부가 외국인 혐오적인 본토주의 성향을 보였지만, 기층 활동가들은 관광객들에게 중국어 간체로 된 전단지를 배포하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구호는 베이징대의 공산당 간부인 유케핑이 쓴 유명한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전체 시위대는 분명 극우 본토주의 경향을 띠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의 운동에 노동자들, 특히 조직 노동자 집단은 얼마나 관여했는가?
홍콩이 1997년 중국에 반환된 이후 노동계급 투쟁은 어느 정도 진전을 이뤘다. 예를 들어 2000년에는 민영화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 파업, 2007년에는 건설 노동자 파업, 2013년에는 부두 노동자 파업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노동자들의 활동과 계급의식 수준이 높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2019년 운동은 1967년 소요 이후 처음으로 정치 파업 문제를 의제로 올렸다.5 2019년 8월 5일, 약 35만 명의 항공사 및 공항 직원들, 사회복지사들, 교사들이 파업을 벌였다. 전체 항공 관제사의 3분의 1이 파업에 참여한 듯하며, 캐세이퍼시픽과 홍콩항공 객실 승무원들도 동참해 200편이 넘는 항공편이 결항됐다. 지하철도 반나절 동안 멈춰 섰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 전면 파업이 아니었고, 일부 노동자들(교사, 사회복지사 등)은 고용주의 보복을 피하려고 연차를 내서 행동에 참여했다. 그냥 직원들에게 하루 일을 쉬게 한 고용주도 있었다. 그러나 이 파업은 상징적인 하루 파업이었을 뿐이라 해도 큰 도약이었다. 2014년 우산 운동 때는 부두 노동자들만이 도심 점거에 참여했고, 사회복지사 2000명만이 운동을 지지하는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2019년에는 노동자들의 동원 규모가 훨씬 컸다.
일부 좌파는 홍콩의 최근 운동들을 친제국주의 운동으로 규정하고, 영국과 미국 정부가 그 운동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 운동들을 중국에 맞서는 데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하겠는가?
중국과 홍콩의 핵심 권력층, 중국 바깥의 포스트스탈린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은 우리 운동이 서방의 조종과 지원을 받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홍콩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라고 비난해 왔다. 이런 비난은 거짓이다. 운동은 시민들 자신의 참여로 시작됐으며 주된 원동력은 청년 시위자에게서 나왔다. 외국 정부는 여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일부 범민주파 의원들과 조슈아 웡 같은 저명한 활동가들은 서방에 호의적이고 미국 정부를 상당히 신뢰한다. 이들은 언론에 자주 출연하지만, 그저 비교적 잘 알려진 인사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들도 운동을 주도하지 못한다. 그들 스스로가 지도부임을 매우 분명하게 부인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 둘 다 홍콩에서 벌어지는 탄압에 반대한다고 했지만, 미국 법 집행 기관과 홍콩 경찰 사이에는 오랜 교류의 역사가 있다. 홍콩 경찰이 동원하는 무기와 진압 기술은 수년간 미국 기업들이 공급해 온 것이다. 똑같은 진압 기술이 미국의 흑인 시위대와 그 지지자들에게도 사용되고 있다.
일부 좌파는 여전히 진영 논리를 고수하면서, 몇몇 반미 정권을 서방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진보적 세력으로 본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적의 적은 친구”라는 오래된 잘못된 격언을 자신의 노선으로 삼기도 한다. 중국의 지배 체제를 “반제국주의”라고 지지하면서 그 체제를 비판하기를 거부하는 좌파들은 이 국가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중국은 노동계급을 억누르는 관료적 자본주의 체제다.
광범한 결집체든, 그보다는 범위가 협소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단체든, 홍콩의 운동 내에서 조직 좌파의 비중은 얼마나 되는가? 좌파 내에는 어떤 정치들이 존재하는가?
홍콩의 좌파는 작고 분열돼 있으며, 좌파 진영 내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광범한 좌파 조직들에 더해 소수의 아나키즘적인 네트워크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사회주의 좌파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2009~2014년 사이에 긍정적인 발전이 있었고, 특히 2010년 광범위한 좌파 플랫폼인 ‘레프트21’이 형성됐다. 여기에는 80~100명의 젊은 회원들이 있었다. 레프트21은 2013년 부두 노동자 파업에 연대하는 데서 적극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이후 극우 본토주의 이데올로기가 부상하면서 광범한 좌파가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심지어 일부는 극우로 넘어가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좌파는 2019년 운동에 효과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 오늘날 새로운 정치 환경에서 사회주의 좌파는 새로운 세대의 청년들과 함께 대중이 가장 우려하는 쟁점들을 중심으로 조직하면서도 자신의 사상을 명확히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야만 점차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중국에서는 임금이나 공장 폐쇄와 같은 문제를 둘러싸고 대규모 노동자 투쟁들이 있었다. 다만 홍콩의 운동과는 성격이 많이 달라 보인다. 홍콩의 운동은 경제적 문제보다는 정치적 문제에 초점이 있었다. 이 두 운동 사이의 간극이 메워질 전망이 있는가?
지난 10년 동안 홍콩에서 벌어진 대중투쟁들의 주요 쟁점은 민주주의, 보통선거권,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지만, 그 투쟁들 중에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투쟁도 포함돼 있었다. 반대로 같은 기간 동안 중국 본토의 노동자 투쟁 수준은 비교적 높았지만, 중국 본토에서도 페미니즘 운동, 기업의 환경 오염에 맞선 주민들의 저항 등 다양한 시민 운동의 흐름이 함께 있었다.
1990년대 이래 홍콩 활동가들은 중국의 노동운동, 인권 운동, 젠더·성소수자 운동, 환경 운동 활동가들을 지속적으로 지지하며 중국 사회운동과 시민사회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홍콩에서 상대적으로 시민적 자유가 더 허용된 덕분에 활동가들은 사회운동 관련 문헌을 중국으로 전파하고, 중국 본토와 홍콩 활동가들 사이의 지적 교류를 자극하고, 본토에서 일어난 저항에 대한 연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홍콩에서만 출판될 수 있었던 많은 책들이 중국 본토로 반입됐는데, 여기에는 중국 본토 저술가들이 쓴 것도 있었다. 그러나 홍콩에서도 사회운동에 관한 논의가 갈수록 탄압받고 있다. 홍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해지고 수많은 노동 NGO가 해체되면서 이러한 역할은 심각하게 약화됐다. 향후 몇 년간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양측 활동가들이 지난 10년의 경험을 되짚어 보고 정보 교류와 분석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여지는 여전히 있다. 이는 운동이 미래에 다시 나타나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사회주의 좌파는 이 과정을 촉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홍콩에서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가?
홍콩은 이미 중국의 일부이고 중국 경제에 고도로 통합된 도시이기에, 홍콩의 미래는 중국 전체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홍콩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은 중국 중앙정부다. 따라서 홍콩의 민주적 자치를 달성하려면 최선을 다해 중국 전역의 노동자들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온전한 민주적 자유와 노동계급 권력을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그래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홍콩 독립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중국 내의 노동자 투쟁과 페미니즘 운동 같은 진보적 사회운동을 촉진해야만 중국 본토와 홍콩을 지배하는 관료적 자본주의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독립 요구는 중국 본토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홍콩 주민과 중국 주민을 분열시키고 홍콩 주민들의 민주주의 요구들을 왜곡하려 하는 세력들에게 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홍콩 독립 요구는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선택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보통선거에 의한 홍콩 주민 대의 기구”를 세우자는 일반적 구호를 지지하지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환상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한 기구를 소집할 힘과 결의가 있는 세력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 대중뿐이다. 미래에 대중투쟁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의지를 관철시키고 반자본주의적인 사회·경제 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한 대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홍콩과 중국에서 향후 운동의 전망은 어떠한가?
운동의 패배는 언제나 흉터를 남긴다. 1968년 프라하의 봄과 1989년 중국의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운동이 패배한 이후 수년간의 침체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의 홍콩은 1989년의 중국과 다른데, 우리는 여전히 여러 자유를 계속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적과 인터넷에 대한 전면적인 검열이 이뤄지고 있지는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어느 정도 원활하게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 공안 기관의 감시는 중국 본토나 1949~1987년 계엄령하의 국민당 치하 대만만큼 심하지는 않다.6
어떤 사람들은, 실패한 대중운동은 기억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면서 미래의 운동이 이전의 경험에서 배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한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평가다. 중국 본토에서조차 청년들은 가치 있는 정보를 찾으려고 인터넷 검열을 뚫는 일이 흔하다.
현재의 침체기는 언제 끝날 것인가? 과거의 역사를 보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듯하다. 중국에서는 1989년 이후 강력한 대중운동이 없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노동자·농민의 투쟁이 부활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1977년에 ‘77헌장 운동’이 일어났다.
홍콩 민주주의의 미래는 상당 부분 중국 본토의 경제적·사회적 위기에 달려 있다. 중국 공산당의 관료적 통치가 계속 강력하게 유지된다면 홍콩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현재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그러는 가운데 중국의 위기도 무르익고 있다.
중국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정의에 따른, “독점 자본”의 지배에 기초한 제국주의 국가가 됐다. 중국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근본적으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르지 않다. 중국의 독특한 특징은 관료적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당-국가 자본주의라고도 부를 만한 국가자본주의 모델이다. 이러한 국가 형태는 관료 집단에 의한 부패와 국가 재산의 전용을 부추기지만, 보통의 신자유주의보다 경제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델은 관료와 자본가들에게만 이익이 될 뿐 노동자들에게는 착취적이고 억압적이다. 국제적으로 중국은 더는 반제국주의를 대표하지 않으며, 오히려 뒤늦게 발전했지만 강력한 국제적 경쟁자가 됐다. 중국은 이제 자본수출, 일대일로 인프라 사업, 군사력 확장을 통해 아시아의 역내 패권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참상은 중국에서 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중국에서 노동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은 크게 감소했다. 2020년에 중국 총리 리커창은 월 소득이 1000위안(한화 약 18만 원)에 불과한 인구가 6억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중국 인구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수치다. 경제 위기와 사회 위기 모두 가속화하고 있다. 사회 정의에 대한 호소가 힘을 얻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통과되면서 중국 본토에 비해 더 허용되던 홍콩의 권리와 자유가 사라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홍콩 인민과 중국 인민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됐다. 홍콩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은 중국의 당-국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중요한 일부다. 우리는 만국의 인민, 특히 중국 본토의 인민을 동맹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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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은 중국 정부가 재판을 위해 중국 본토로 범죄 용의자의 송환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송환법 반대 운동은 이 법이 홍콩에 대한 더 많은 권한을 중국 중앙정부에 넘겨주고 정치적 탄압을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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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특별행정구는 1997년 홍콩 영토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뒤 설치된 것이다. 홍콩은 “일국양제”라는 원칙 아래 중국 본토와 분리된 경제·정치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홍콩은 제1차 아편전쟁(1838~1842년) 종전 이후부터 영국의 식민지가 돼 영국 정부가 임명한 총독의 통치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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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정부의 수반인 행정장관은 현재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며, 후보들은 대부분 중국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인사들로 제한된다. 이 선거인단을 선출할 권리도 매우 제한적이다. 2016년에 등록된 유권자는 24만 6000명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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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 ‘범민주파’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이다. 민주당은 홍콩 입법회 선거에서 다른 범민주파 정당들과 “친중 진영” 조직들과 경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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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중국의 문화혁명에 고무된 파업과 소요가 홍콩을 뒤흔들었고, 이에 따른 정부의 양보로 임금과 생활 수준이 오르고, 공공서비스 투자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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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가 이끈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은 1949년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에 패배한 뒤 대만으로 망명해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그 섬을 지배했다. 계엄령은 1949년 5월에 선포됐고 38년 후에야 폐지됐다. 이 “백색 테러” 기간 동안 14만 명이 공산당 지지자로 몰려서 투옥됐고 약 4000명이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