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항쟁 ─ 역사적 배경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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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월 14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이 토론은 기획 시리즈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11번째 시간이었다.
4년 전인 2019년 홍콩에서 송환법 반대 투쟁이 분출했습니다. 홍콩 행정부가 입법회(의회)에 제출한 송환법은 범죄인을 중국으로 보내도록 개정한 법안이었는데, 홍콩 사람들은 이 법이 명백히 홍콩의 진보 세력을 겨냥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송환법 반대 시위는 급속히 커졌고 6월 9일 100만 명이 행진했습니다. 6월 15일에는 마르코 렁(Marco Leung)이 홍콩 정부청사 근처에서 송환법 반대 현수막을 내걸고 자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그다음 날 200만 명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홍콩 인구 740만 명 중 4분의 1 이상이 거리로 나왔던 것입니다.
완강한 저항에 밀려 7월 초에 홍콩 행정장관 캐리 람은 법안을 폐기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캐리 람의 약속을 믿지 않았고, 항쟁은 연말까지 이어졌습니다.
중국 정부는 이처럼 거대한 대중적 저항에 밀렸지만, 이후 대대적인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특히 2020년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송환법 반대 세력들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2019년 왜 그토록 많은 홍콩 대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일까요? 그리고 2020년 보안법 제정 이후 홍콩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저는 오늘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홍콩 상황을 비롯한 2019년 항쟁의 근원을 돌아보고, 항쟁의 정치적 의미를 짚어 보려 합니다. 또, 2020년 보안법 도입 이후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도 살펴보겠습니다.
1997년 반환 이후의 홍콩
홍콩은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후 1842년부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됐습니다.
1997년 홍콩을 반환받은 중국은 금융 허브로서 홍콩의 역할에 주목했습니다. 중국으로 들어오는 해외직접투자가 대부분 홍콩을 경유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들어 중국 자본이 세계로 진출할 때도 홍콩을 거쳐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미·중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해외에서 기업공개(IPO)를 하려는 중국 기업 대부분이 홍콩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홍콩의 금융 허브 지위를 강화하고자 중국 정부는 홍콩에서 친시장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습니다. 홍콩 자본가와 다국적기업들은 그로부터 혜택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홍콩의 노동자와 서민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홍콩에 자치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의 투자 및 유출입을 감독하기 위해 홍콩을 완전히 통제했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홍콩의 민주적 권리를 후퇴시키려 했는데, 그때마다 대중적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2002년 중국 정부는 테러 방지 명목으로 홍콩 기본법에 국가보안법을 삽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50만 명이 거리로 나와 항의하면서 이 시도는 좌절됐습니다.
2008년과 2009년 티베트와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거대한 해방 운동이 벌어졌고, 2010년에는 ‘아랍의 봄’이 분출했습니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위챗 같은 SNS를 통제했고, 홍콩 중등학교의 사상 교육도 강화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민윤리 교육 도입 시도는 대중적 저항에 부딪혀 좌절됐습니다.
2014년에는 중국 정부가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약속을 뒤집은 것에 반발해 ‘우산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청년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행정 중심지인 센트럴을 79일 동안 점거하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비록 우산운동은 패배했지만, 이 투쟁에 참가한 청년들이 바로 2019년 항쟁에서 중심적 구실을 하게 됩니다.
홍콩 항쟁의 사회적 맥락
2019년 2월 12일 홍콩 정부가 송환법을 내놓자 시민인권전선은 1만 2000명 규모의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민인권전선은 2002년 홍콩 행정부가 국가보안법을 도입하려 했을 때 시민사회단체들이 반대 운동을 하려고 만든 연대체입니다.
아무도 이 투쟁이 곧 수백만 명을 끌어들일 줄 몰랐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대거 참가했습니다. 홍콩 사회주의자 아우룽유(Au Loong Yu)는 이들을 ‘97세대’라고 불렀습니다.
흔히 홍콩 항쟁은 중국 정부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투쟁이라는 측면만이 조명됩니다. 그러나 ‘97세대’의 광범한 참가는 홍콩 항쟁의 배경에 사회·경제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빈부격차 심화 문제가 2019년 항쟁의 배경에 있습니다. 2018년 홍콩 인구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141만 명이 빈곤선 아래에 살고 있었습니다. 청년 빈곤도 똑같이 심각했습니다. 홍콩청소년단체연합회의 청소년연구센터가 2014년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대학 졸업자 중 29.8퍼센트가, 대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 중 35.6퍼센트가 자신을 ‘워킹 푸어’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홍콩 대중이 이런 상황에 처한 이유는 홍콩 반환 이후 중국 정부가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입니다. 홍콩 행정부는 법인세 감면 등 각종 기업 지원을 추진하면서 노년층 보조금 혜택은 줄였습니다. 홍콩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도 법적 규제는 거의 없는 자본의 천국이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홍콩에 투자하는 자본을 위해 광저우-선전-홍콩을 잇는 고속철과 인공섬 건설 같은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단행했지만, 청년과 빈곤층은 외면했습니다.
중국 대륙의 부자들이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주택 가격이 치솟은 것도 홍콩 대중의 삶을 악화시켰습니다. 한 아파트를 여러 개의 방으로 쪼개서 임대한 “당방(劏房)”에 거주하는 사람이 홍콩 항쟁 무렵 20만 명이나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97세대’는 “정치적 자치권”뿐 아니라 “경제적 자치권”이 부정당하는 현실에 절망과 분노를 느껴 왔습니다. 바로 이것, 즉 노동계급 등 서민층의 조건 악화가 2014년 우산운동과 2019년 송환법 반대 운동의 주요 요인이었습니다.
중국 대 홍콩의 대결?
홍콩 항쟁은 ‘홍콩인과 대륙 중국인 간의 대결’ 또는 ‘홍콩 대 중국의 대결’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홍콩 자본가들은 자신의 대표권이 제한되는 것에 조금 불만이 있긴 하지만, 친시장적인 중국 정부와 홍콩 행정부에 대해 평범한 홍콩 대중과는 달리 거부감이 별로 없습니다. 기업주로서 겪는 일부 어려움은 입법회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직능대표를 통해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중국 노동자들은 중국 정부가 홍콩 운동을 억압하는 것에서 이득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홍콩 운동이 파괴되는 것이 중국 대륙 노동자들에게도 해롭습니다. 홍콩의 좌파 활동가들은 선전과 광저우 등지에서 노동조합 설립과 파업 투쟁 지원 활동을 해 왔습니다. 2015년 광저우의 노동운동을 탄압했던 시진핑 정부는 곧이어 홍콩 좌파 세력을 겨냥한 송환법을 도입하려 했습니다. 이를 보면, 중국 정부가 홍콩의 저항 운동과 광저우의 노동운동을 별개의 분리된 문제로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륙 노동자와의 연대는 홍콩 운동이 전진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중국 정부와의 타협을 통해 민주적 권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홍콩 정체성 추구도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홍콩의 민주 세력들은 중국 정부와의 대화와 타협, 그리고 선거를 통해 민주적 권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최근에 무자비한 탄압으로 나오자 무기력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홍콩 ‘본토주의’(localism) 경향이 등장했습니다. 학생 중심 단체들인 청년신정, 데모시스토, 본토민주전선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홍콩 본토주의 경향은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어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들지만, 대체로 중화주의에 대립되는 홍콩 정체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중국 노동자들의 지지와 연대를 모으는 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홍콩 사회주의자 람치렁은 홍콩 본토주의가 2019년 항쟁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소수였지만 대륙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호소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활동가들은 대륙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중국어 간체로 된 전단지를 배포하고 지지를 호소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홍콩 항쟁이 봉착한 문제들
이제 홍콩 항쟁이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문제에 봉착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저항에 부딪힌 캐리 람은 송환법을 철회하겠다고 7월 초에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경찰 폭력 조사, 시위자 석방, 폭동 규정 철회, 사퇴 요구 등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시위대를 향한 경찰 폭력도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홍콩 대중은 저항을 이어갔고, 진정한 변화를 쟁취할 잠재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8월 들어 공무원, 간호사, 금융부문 등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8월 5일에는 첫 번째 성공적인 총파업이 벌어졌습니다. 홍콩에서 50년 만에 벌어진 정치 파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9월로 예정됐던 2차 총파업은 무산됐습니다. 시위대와 경찰이 거리에서 팽팽한 대결을 벌이고 있던 그때, 2차 총파업이 성공했다면 투쟁이 전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동자 투쟁이 주춤하는 사이에 학생들이 이어받은 저항은 11월 홍콩중문대와 홍콩 폴리텍대의 전투에서 안타깝게도 패배를 겪었습니다.
물론 그 뒤로도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식지 않았습니다. 시민인권전선의 호소에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고, 11월 구의원 선거에서 민주파 의원이 452석 중 389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대중 운동은 중국 정부의 지속되는 탄압으로 서서히 가라앉았습니다.
홍콩 항쟁이 반년 이어지는 동안 국제 좌파들 대부분은 방관하며 사실상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을 미국의 견제자로 보기 때문일 수 있고, 홍콩 항쟁 참가자들을 친서방적으로 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홍콩 항쟁이 벌어졌던 2019년은 미·중 무역전쟁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홍콩 민주화 진영 내에는 미국에 ‘홍콩의 인권 및 민주주의 법안’ 통과를 호소하는 사람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어떤 신문은 “트럼프가 홍콩을 구원하다”는 해시태그를 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시위 참가자 중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근거로 홍콩 항쟁을 친미적이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윤석열 퇴진 촛불 집회에 민주당 인사들이 참가한다고 해서 그 운동을 민주당 집회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트럼프와 바이든 같은 미국 정치인들이 ‘홍콩 인권 및 민주주의 법안’을 만들었다고 해서 홍콩 항쟁을 진정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착각해선 안 됩니다. 미국은 중국과의 제국주의적 경쟁에서 승리하려고 홍콩 항쟁을 이용하는 것이지 홍콩 대중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실제로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쟁 이후의 홍콩
2019년 연말 이후 홍콩 항쟁은 중국 정부의 지속적 탄압으로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됐습니다. 게다가 2020년 1월부터 홍콩에서 코로나19가 퍼지자 시위가 취소되고 운동이 위축됐습니다.
시진핑과 캐리 람은 대대적인 경찰 탄압과 팬데믹을 명분 삼은 집회 금지 등 반격을 지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20년 6월 홍콩 입법회를 거치지 않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국가 분열, 국가 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부 세력과의 결탁 등 4가지 모호한 혐의를 처벌하는 법으로 최대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습니다.
2021년 153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됐고, 탄압에 직면한 50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가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야당, 노동조합, 학생회, NGO, 종교단체, 신문사 등이 여기에 포함됐습니다.
정부는 공무원과 교사에게 충성 서약을 강요했고, 중등학교에서 국민윤리 교육도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중국어 교육을 광둥어가 아닌 보통화로 하도록 했습니다.
올해 2월 6일 전직 야당 의원과 활동가 등 47명에 대한 국가보안법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2년째 구금돼 있는 이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국가 정권 전복입니다. 야권 후보를 정하기 위해 2020년 7월 실시한 예비선거를 두고 입법회 과반 의석을 확보해 홍콩 정부를 마비시킬 목적으로 조직된 정부 전복 계획이라는 혐의를 씌웠습니니다.
중국 정부는 2021년에 아예 선거법을 개정해 친정부 인사만 홍콩 입법회 선거에 입후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홍콩을 반환받을 때 했던 항인치항(港人治港: 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과 고도자치(高度自治: 높은 수준의 자치) 약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입니다.
향후 전망과 좌파의 과제
2014년 우산운동에 이어 2019년 항쟁이 패배하고 엄혹한 국가보안법 탄압이 이어지고 있어 당분간 홍콩에서 대중 운동이 벌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항쟁의 원인인 대중적 곤경은 사라지지 않았고, 항쟁은 상당한 사상적 자양분을 남겼습니다. 홍콩 청년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신노조운동’에 적극 참가하고 있습니다. 신노조운동은 막 노동자가 된 신세대 청년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운동을 말합니다.
홍콩 항쟁은 정치적 과제와 교훈도 남겼습니다. 민주주의 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동자 계급의 고유한 힘이 사용돼야 하고, 정치적 쟁점과 사회경제적 요구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륙 노동자들과의 연대도 중요합니다. 홍콩은 이미 중국의 일부이고 중국 경제에 고도로 통합된 도시이기에, 홍콩의 미래는 중국 전체의 미래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홍콩 대중과 대륙 노동자의 연대 가능성은 분명 있습니다.
지난해 말 중국 대륙에서 “백지시위”가 일어나 제로코로나 정책을 추진하던 시진핑을 한발 물러서게 만들었는데, 이런 사건들이 홍콩 항쟁 참가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홍콩 항쟁은 정치의 중요성도 보여 줬습니다. 미·중 갈등이 첨예해지는 가운데 투쟁과 연대를 건설하려면, 중국이 서방 자본주의와 형태는 달라도 본질이 같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임을 인식하고 중국과 미국 간 갈등을 제국주의 경쟁으로 파악하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지금 홍콩 대중은 어려운 시기를 경과하고 있지만 다음번 투쟁은 2019년 항쟁이 끝난 지점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혁명적 조직이 대륙과 홍콩에서 등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러기를 염원합시다.
발제자의 정리
많은 분들이 좋은 말씀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우선 대만과 홍콩을 비교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시청자 두 분이 잘 답변해 주셨는데요, 대만은 독립적인 국민 국가로 존재하고 있는 반면 홍콩은 1997년에 중국의 일부로 반환됐습니다. 홍콩은 독립 국가로 존재하다가 탄압에 의해 중국에 편입된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의 탄압이 워낙 강해서 홍콩이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친완이라는 사람이 《홍콩 성방론》(홍콩 도시국가론)이라는 책을 썼죠. 그러나 홍콩 독립 주장은 사실 인기가 없습니다. 송환법 반대 투쟁이 이어지던 2019년 11월에 어떤 설문조사에서는 80퍼센트 이상의 홍콩인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반대했습니다.
사실 1997년 홍콩 반환 이후의 역사를 보면 홍콩과 중국은 아주 밀접하게 얽혀 있습니다. 홍콩의 북쪽에 바로 선전이 있고 그 옆에는 광저우가 있죠. 홍콩의 좌파나 활동가들은 광저우와 선전으로 가서 그곳 노동자들과 부대끼면서 그들을 지도하고 교육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처럼 홍콩은 대만과 달리 봐야 하는 것이죠.
홍콩 항쟁으로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반사이익을 얻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홍콩 항쟁이 시진핑 정부를 무너뜨리거나 굴복시켰다면, 미국이 득을 보는 게 아니라 미국도 시진핑을 굴복시킨 바로 그 항쟁을 맞닥뜨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트럼프나 바이든이 시진핑과 손잡고 그 항쟁을 짓누르려고 노력했겠죠.
사실 이런 일이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일본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미군은 일본을 점령해 천황제를 없애고 전범들을 감옥에 가뒀죠. 그런데 산별회의 등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이 거세게 벌어지자 미국은 전범들을 다 풀어 주고 천황제도 부활시켜 노동자 투쟁을 진압했죠.
마찬가지로 홍콩 항쟁이 승리한다면 미국은 바로 그 승리한 항쟁을 맞닥뜨려야 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결코 이득이 아닐 것입니다.
영화 〈중경삼림〉에 관해 물어보신 분이 있었는데요. 1997년 홍콩이 반환될 때 많은 사람들은 우선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에 기본적으로 지지를 보냈던 겁니다. 100년이 넘는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죠.
그렇지만 질문하신 분이 말씀한 〈중경삼림〉뿐 아니라 〈첨밀밀〉 등 홍콩 반환 이후 젊은이들의 불안감을 표현한 영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됐지만 실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크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그런 불안감은 보통 현실이 되기 마련이죠.
또, 이전에 누렸던 민주적 권리조차도 중국 정부에 의해서 탄압과 제약을 받는 현실에 직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송환법 반대 투쟁이나 우산 운동과 같은 투쟁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홍콩 항쟁이 남긴 사상적 자양분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2019년 6월 홍콩 주민들이 거대하게 들고일어났습니다. 8월에는 노동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총파업에 나섰죠. 9월에도 홍콩노총이 호소한 만큼은 아니지만 노동자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1월 총파업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이 투쟁을 이어받았지만 그것을 심화시키지 못하다 보니 거리의 학생들이 전면에 나서게 됐고, 그것이 홍콩중문대학교나 홍콩폴리텍대학교에서의 점거 투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실 그 투쟁은 학생들이 처음부터 점거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쫓겨 가서 거기에 고립돼 싸웠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젊은이들, 특히 본토주의의 영향을 받은 많은 청년들이 자율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직의 필요성, 특히 중앙집중적 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하고, 여기저기에서 들고일어나는 거점 없는 투쟁들을 선호했습니다. 이를 표현한 구호가 “Be water(물이 되어라)”인데, 물을 주전자에 부으면 물이 주전자 모양, 컵에 부으면 컵 모양이 되는 것처럼 무정형의 운동을 추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홍콩 항쟁이 패배하면서 이런 문제들, 즉 조직의 필요성에 관한 각성이 있었고 그러면서 사회주의 조직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습니다. 한 발언자가 말한 것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중국 사회를 과연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같은 물음도 던지게 됐죠.
또, 홍콩 항쟁 과정에서 사람들은 노동계급의 힘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고 노동조합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10월에 갓 졸업한 홍콩 학생들이 ‘200만 총파업을 위한 공동전선’이라는 이름의 텔레그램 방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약 3만 명 이상이 들어와서 교류했다고 하죠. 홍콩중문대학교 부총학생회장은 졸업하고 나서 새로운 공무원 노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크게 벌어졌던 겁니다.
지금은 워낙 탄압이 심해서 자발적으로 조직을 해산하기도 하지만 아마 물밑에서는 그런 흐름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자치권을 위한 거대한 투쟁이 경제 투쟁으로 번지고 경제 투쟁이 또다시 정치적 투쟁의 자양분이 될 수 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서로 넘나들면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죠. 설사 지금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해서 그런 흐름이 끊긴 것처럼 보이지만 물밑으로 그런 흐름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발제 말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음 기회가 온다면 물밑에서 흐르는 바로 그 자양분으로 투쟁이 다시 만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