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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은 모든 걸 쥐락펴락하는 전제군주인가?

ⓒ출처 kremlin.ru

주류 언론들은 러시아 지배 체제의 잔혹함이 블라디미르 푸틴 한 사람의 탓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그의 살벌한 성품이나 스스로를 신과 동일시하는 신(神) 콤플렉스, 어떤 정신 질환 때문에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결정한 것이라고 많은 공을 들여 설명한다.

그렇게 이야기가 단순했더라면! 그러나 푸틴의 이야기는 러시아와 14개 공화국이 옛 소련을 이루고 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련은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지배계급인 국가 관료가 자본 축적을 위해 노동계급 대중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회였다. 그런 착취 덕에 소련은 세계적 군사 강국이 됐다. 그러나 1980년대에 소련은 극심한 경제적·정치적 위기에 빠진다.

사태의 귀추를 감지한 일부 관료는 소련이 세계 자본주의에 통합되고 자유 시장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비밀 경찰이었던 푸틴도 그런 인물의 하나였다.

1990년에 푸틴은 새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아나톨리 솝차크 밑에서 일했다. 푸틴과 솝차크는 새로운 자유 시장 질서를 구축하고 해외 투자를 유치하고 민영화를 추진하려 애썼다.

1991년 8월 소련 관료와 KGB의 보수적 일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구질서를 사수하려는 최후의 시도였다.

러시아(당시에는 소련의 일부)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수도 모스크바에서 쿠데타에 맞선 대중의 지도자를 자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솝차크와 푸틴은 쿠데타 진압을 돕는 데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구질서의 실패는 소련의 해체를 가속시켰다. 소련 붕괴로 러시아에서 새 시대가 열리리라는 환호가 있었지만 지배층이 딱히 교체된 것은 아니었다.

게걸음

옛 공산당 정치인들이 “민주주의”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옛 소련 관료 출신 인사들은 이미 소련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자리를 챙겼다.

대규모 민영화가 추진되던 시기를 거치며 이른바 “올리가르히”, 즉 엄청나게 부유하고 정치권과 유착한 기업가 집단이 형성됐다.

이 “무법천지” 자본주의에서 소수 올리가르히는 공분을 살 만큼 터무니없이 많은 부를 쌓았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사회적 위기를 촉발하기도 했다. 산업 생산이 50퍼센트 감소하고, 생활 수준이 폭락하고, 임금이 체불됐다. 이는 러시아 국가와 군산복합체를 약화시켜 러시아가 해외에서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시킬 능력을 약화시켰다. 1993년이 되자 자유 시장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어떻게 관리할지를 두고 옐친과 두마[연방 의회] 의원들은 심각하게 갈등했다.

옐친은 탱크를 투입해 의회를 포격했다. 그후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개헌을 강행했다. 그 새 헌법의 초안은 푸틴의 스승 솝차크가 작성했다.

이런 권위주의적 정치 환경은 1990년대의 새로운 사적 이윤 추구 모델을 수호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었다.

그후 이를 바탕으로 푸틴이 부상해 더 광범한 러시아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했다.

1999년이 되면 옐친은 지배계급에게 부담으로 여겨졌다. 옐친은 사임했고 당시 총리였던 푸틴이 그의 후임자가 됐다.

이후 푸틴은 러시아의 신생 자본가 계급 위에 군림한 “독재자”로 묘사됐다. 그러나 러시아 국가와 올리가르히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관계에 있었다고 보는 게 실상에 더 가깝다.

푸틴은 제한적이나마 세금을 강제하는 등 올리가르히의 전횡에 일부 제동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올리가르히는 푸틴의 뜻에 기꺼이 따르려 했다. 그 대가로 올리가르히는 잘 조직된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봤다.

올리가르히의 이윤 추구 방식은 보호받았고 더 고착화됐다.

러시아 국가는 경제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올리가르히는 국가의 자산을 약탈해서 부를 쌓아 놓고서는 후발 주자들에게서 자신들의 시장 지분을 확실히 지키려 했다.

국가와 자본의 상호 의존

그 결과 신생 민간 자본이 성장하지 못하고 구래의 국유 산업과 민영화된 기업들이 경제를 계속 지배했다. 사실 국영 석유·가스 기업 로즈네프와 가스프롬조차도 상업적으로 운영됐고 민간 지분이 있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까지도 영국의 석유·가스 대기업 BP는 로즈네프 지분 20퍼센트를 보유하고 임원진에 이사를 두고 있었다.

러시아 국가는 국영 기업 지분을 민간 기업에 계속 팔았다. 2011년에 러시아는 경제에서 국가의 “과도한 존재감”을 줄이고자 석유 부문 등에서 1조 루블 규모의 민영화 계획을 추진했다. 물론 이런 추세는 외국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하면서 뒤집힐 수도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러시아 국가는 미국·영국·유럽연합이 밀어붙인 자유 시장 정책을 따랐다. 2001년에 러시아는 가장 가난한 층에 가장 큰 타격을 주는 역진적 균일세를 도입하고, 학교에 일종의 민간자본투자사업을 도입했다.

집권 초 푸틴이 서방 정치인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은 것이 놀랍지 않은 까닭이다. 당시에는 서방과 러시아의 지배자들이 힘을 합쳐 각자의 부를 키울 수 있다는 얘기가 많았다.

2003년 국빈 자격으로 영국을 방문한 푸틴은 버킹엄 궁전까지 가면서 기병대의 호위를 받았고, 버킹엄 궁전에서는 화려한 연회가 열렸다. 이 모든 것은 러시아산 석유에 대한 BP의 이권을 다질 중요한 석유 협상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BP 경영자였던 토니 헤이워드는 이렇게 말했다. “지정학적인 상황에 딱 어울리는 협상이었다. 2000년대 내내 서방에서는 러시아가 전에 없이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기대가 뚜렷했다.” 그런 기대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2000년 G8 회담에 참가한 푸틴(왼쪽에서 세 번째). 집권 초 푸틴은 서방 정치인들의 환대를 받았다 ⓒ출처 Kremlin.ru

1991년 이후 러시아는 이른바 “가까운 외국”들, 즉 옛 소련 소속 공화국들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재확립하려 해 왔다.

러시아 국가가 약화된 상황에서 옐친은 일련의 분리주의적, 민족 간 충돌을 부추겨서 인접국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에 의지해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막상 체첸이 독립을 선언했고, 러시아는 체첸을 굴복시키기 위해 두 차례나 잔혹한 전쟁을 벌여야 했다. 옐친은 체첸의 저항에 밀려 1994~1996년 제1차 체첸 전쟁에서 패했고, 러시아 거리에서 일어난 항의 운동에도 패배했다. 그러나 1999~2000년에 더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푸틴은 체첸의 저항을 진압했다.

푸틴의 군사적 승리와 2000년대의 국제 유가 급등은 정권 안정의 발판이 됐다. 덕분에 푸틴은 러시아의 군사력을 재건하고 석유와 가스를 이용해 힘을 키울 수 있었다.

한편, 미국·나토·유럽연합은 러시아의 “가까운 외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애써 왔고, 그 결과 이 지역에서 경쟁이 첨예해졌다.

최초의 중요한 충돌은 2008년 조지아에서 촉발됐다. 당시 러시아는 조지아에서 분리·독립하려 한 두 지역을 [조지아의 공격에서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공해서 조지아의 나토 가입을 저지하려 했다.

2014년에 우크라이나가 친서방으로 기울 것으로 보이자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우크라이나 동남부 도네츠크·루한스크 지방의 분리주의 반군을 지원했다.

이 공격은 그저 푸틴과 그를 추종하는 소수 장성들과 정보기관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 국가가 제국주의, 즉 경쟁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세계적 체제의 논리에 따라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 결과였다. 오늘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벌이는 전면전도 마찬가지다.

제국주의 경쟁 체제

러시아는 석유·가스·석탄의 주요 수출국이다. 또, 여러 곡물과 원자재의 주요 생산국으로도 꼽힌다.

러시아는 인구가 1억 4600만 명에 달하고 어마어마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가 러시아의 절반도 안 되고 내세울 천연 자원도 훨씬 적은 이탈리아는 경제 규모가 러시아의 거의 두 배에 이른다.

미국 오바마 정부의 경제 보좌관이었던 제이슨 퍼먼은 이렇게 말했다. “석유·가스를 빼면 러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놀라우리만큼 하찮다. 러시아는 커다란 주유소나 다름없다.”

이번 침공은 러시아 국가가 처한 경쟁 압력에서 비롯한 것이다.

2015년 민스크 “평화 프로세스”는 우크라이나에서 충돌을 일시 중단시켰지만, 서방과 러시아의 경쟁은 계속됐다. 그리고 서방의 압도적 힘 앞에서 러시아는 수세에 몰렸다.

또, 최근 몇 년 동안 “가까운 외국”인 벨라루스,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에서 잇달아 항쟁이 분출했다. 이 항쟁들은 대중 항쟁이었지만, 서구 열강은 거기에서 득을 보려 한다.

러시아 국가 — 단지 푸틴만이 아니다 — 는 러시아가 아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인접국에 각인시키고 싶어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러시아 국가와 러시아 지배계급 전체에 재앙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푸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분명 그의 뜻대로 풀리고 있지 않다.

푸틴은 대(大)러시아 국수주의를 이용해 지지를 구축해 왔는데, 지금은 이를 더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분노가 분출하기도 했다. 예컨대 2011년~2012년에는 선거 부정에 항의해, 2018년에는 연금 개악에 항의해, 더 근래에는 2021년에도 시위가 분출했다.

이런 시위의 근저에는 노동자들 사이의 더 광범한 항의 정서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 그때와 비슷한 반정부적 정서가 다시 폭발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2011년 12월 24일 모스크바 반푸틴 시위. 그해 12월 두마(러시아 의회) 선거에서 일어난 부정에 항의해 수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출처 Bogomolov.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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