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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범죄’ ― 제국주의적 공세의 논리에서 비롯

우크라이나의 도시 부차에서 러시아군이 저지른 학살의 증거가 제시되자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다시금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전범” 딱지를 붙였다.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부차 학살이 전쟁 범죄의 “또 다른 증거”라며 “전범 재판”을 열라고 촉구했다. 영국 주도로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범죄를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한 것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가 회부 사건”이라고 영국 외무장관 리즈 트러스는 전했다.

그러나 바이든이 언제나 그렇게 확신에 차 있었던 것은 아니다. 3월 16일 기자들이 푸틴이 전범이냐고 묻자 바이든은 “아니오”라고 답했다. 바이든은 그렇게 대답하고 자리를 뜨려다 기자들에게 다시 물어 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푸틴은 전범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고 답했다. 이 사건은, 그리고 바이든이 결정을 내린 방식은 제국주의가 전쟁 범죄 혐의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보여 준다.

전쟁 범죄는 단지 전쟁 중에 벌이는 끔찍한 학살이 아니다. 그런 일은 거의 모든 충돌에서 벌어진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나치 지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쟁 범죄를 처벌하는 역사적 근거는 침략 전쟁을 기도하고 “평화에 반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바이든의 위선이 금세 뚜렷하게 드러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아프가니스탄 침공, 나토의 리비아 공격이야말로 침략 전쟁의 사례 아닌가?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적대적인 국가를 무장 해제시키려고 그런 일을 벌였다고 둘러댈지도 모른다. 그러나 푸틴도 똑같이 둘러댈 수 있다.

자기보다 약한 적들에게 가장 현대적인 죽음의 기술을 펼쳐 보이는 모든 제국주의 전쟁은 야만적 수단을 동원해 기존 사회를 파괴하려 한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19세기에 현대 제국주의가 시작된 이래 전쟁 범죄는 필연이었다. 식민 지배 열강은 자신의 동기를 인도주의 수사로 애써 은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강력한 문명이 하찮은 문명을 지배할 수 있다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언어가 그들의 동기를 정당화했다.

전쟁 범죄를 조사하는 국제형사재판의 성격은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재판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밀로셰비치는 적개심 가득한 민족주의를 이용해 노동자들의 분노를 지배 체제에서 엉뚱한 데로 돌리려 한 세르비아 지배계급의 일부를 이끈 자다.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알바니아인을 상대로 한 인종차별적 군사 작전을 벌였고 1990년대에 그의 군대는 끔찍한 살육을 저질렀다. 그러나 나토군 또한 1999년에 78일 동안 세르비아를 폭격하며 무자비한 살상을 벌였다. ‘휴먼라이츠워치’에 따르면 나토의 폭격으로 민간인이 최대 528명 사망했지만, 이 폭격으로 재판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다.

반면 밀로셰비치는 반인륜적 범죄 66건과 집단 학살, 전쟁 범죄 혐의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됐다. 반면, 미국은 미군을 기소하는 국제형사재판소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방 지도자들이 푸틴을 전범으로 기소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경쟁자를 상대로 한 확전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다. 푸틴이 전범이라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영국 전 총리 토니 블레어, 미국 전 대통령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등도 전범이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 범죄에 대한 조사는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의 참상으로도 확대돼야 마땅하다. 마리우폴의 파괴는 이라크 팔루자의 파괴와 나란히 놓고 봐야 한다.

전쟁 범죄를 입맛대로 규정하는 위선자들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왼쪽부터) ⓒ출처 NATO

전쟁 규칙은 누가 정하는가?

제국주의자들과 식민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현대의 전쟁 규칙을 정했다. 전쟁이 산업화되고 대륙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지자 전쟁 규칙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역사가 기록할 만한 규모의 학살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규칙을 정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헤이그 협약은 1899년과 1907년에 협상된 국제 조약으로, 1864년부터 1949년까지의 제네바 협약과 더불어 전쟁의 허용치를 설정했다고 여겨진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라이프치히 재판을 통해 전쟁 범죄에 대한 국제적 정의가 도출됐고, 이는 계속 수정돼 왔다. 1921년에 이 전쟁 범죄에 대한 규약이 실제로 적용돼, 소수의 독일 군인과 군부 지도자들이 재판을 받았다.

이 개념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더욱 수정됐다. 뉘른베르크 헌장[런던 헌장으로도 불리는]에서 추축국이 재판을 받을 근거가 마련됐다. 승자가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정의하도록 한 결과, 승전국은 스스로 유죄 판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나치 지도자들은 합당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에 핵폭탄을 떨어뜨려 수많은 민간인을 죽인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는 2002년에 설립됐다. 여기서 과거 협약과 의정서를 수정해 제네바 협약에 위반되는 23개 항목을 식별했다.

고문, 인질 억류, 소년병 징집, 점령 지역 내 정착, 유독성 무기 사용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국제형사재판소를 비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46명 중 서구 출신은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190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무장 시위대가 차르의 제국 근위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러시아인들은 차르가 국제 법원에서 처벌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조직했고 결국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다.

누가 집단 학살을 정의하는가?

보리스 존슨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사건이 “내게는 집단 학살(genocide)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최악의 범죄인 집단 학살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이 용어는 1943년 유대계 폴란드인 변호사 라파엘 렘킨이 처음 사용했다. 나치가 유대인, 로마인[‘집시’는 이들을 경멸조로 부르는 호칭이다]과 신티인[주로 독일에 거주한 일부 로마인 집단], 장애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던 당시였다. 유엔 ‘집단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은 1948년 집단 학살을 “민족, 종족, 인종 또는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저지른 행위”로 정의했다.

이 정의는 홀로코스트와 1994년 르완다의 집단 학살, 제1차세계대전 중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에는 분명히 적용됐다. 하지만 언제 이 정의가 적용되는지는, 제국주의 열강이 군사적 행동을 원하는지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93~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집단 학살이라고 언급하려는 시도를 의도적으로 가로막았다. 미국은 이미 르완다에 파병된 유엔 ‘평화유지군’ 대부분을 철군하고자 했고, 결국 성공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추가 파병은 이 때문에 가로막혔다. 미국은 행동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집단 학살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미국과 영국은 “집단 학살과 다를 바 없는” 범죄에 연루돼 있다. 미국은 원주민 집단 학살을 토대로 세워진 국가다. 1900년이 되자 일부 원주민 집단의 인구는 유럽 정착민에게 밀려 나면서 98퍼센트까지 감소했다. 영국 제국의 잔학 행위로 여러 소수민족이 황폐화됐다. 예를 들어 영국은 최대 2900만 명의 인도인을 강제로 굶주리게 하며 인도가 식량 수출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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