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혁명 1918~1923년 — 잊혀진 혁명
—
① 1918년 11월 혁명과 구체제의 반혁명 기도
〈노동자 연대〉 구독
이 글은 10월 4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이 토론은 기획 시리즈 ‘[독일 혁명 100년 기념] 잊혀진 혁명: 독일 1918~1923년’의 첫 번째 시간이었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자가 첨가한 말이다. 그리고 편집자는 또한 교정·교열도 보았다.
제1차세계대전 중인 1918년 11월,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통치하던 제국이 무너졌습니다.
많은 역사책들은 이 사건을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일 혁명은 1917년 러시아에서 성공한 노동자 혁명이 선진 산업국으로 확산될 결정적 기회였습니다.
독일 제국은 영국 군대나 프랑스 군대가 아니라 독일 노동자와 병사들의 혁명적 반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은 1923년 10월까지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먼저 1918년 11월 제국의 몰락부터 1920년 3월 카프 쿠데타까지 다루겠습니다. [카프 쿠데타는 1920년 3월 13~18일 우익 애국주의자들인 정치인 볼프강 카프와 군장성 발터 폰 뤼트비츠가 일으켰다 실패한 무력 정변이다.]
1918년 11월, 독일 제국의 붕괴
원래 독일 정부는 전쟁[제1차세계대전]이 “길어야 몇 달”이면 끝날 거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918년 11월 당시 전쟁은 4년 넘게 계속됐고, 대중의 고통과 희생은 끔찍할 정도였습니다.
독일 노동자들의 삶은 전쟁으로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노동자 지구에는 기아와 전염병이 만연했고, 많은 노동자들은 전쟁터로 끌려가 혹독한 군사 규율에 고통받았습니다. 노동계급은 알량한 시민적 권리들도 빼앗겼습니다.
전쟁 초기에 분 애국주의 열풍은 이제 전쟁에 대한 쓰라린 불만으로 바뀌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 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신생 노동자 정부가 즉각적인 휴전과 합병·배상 없는 평화협정 체결을 제시하자, 조국 방위 전쟁 같은 말은 더는 설득력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독일 지배계급은 전쟁 중단은커녕 오히려 러시아와의 휴전을 이용해 서부전선에 올인 했습니다. 그리고 기대와 달리 패색이 짙어졌는데도 병사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1918년 11월 초, 북부의 주요 도시 킬에서 해군 수병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장교들에게 망설임 없이 총구를 들이밀었고, 전함과 도시 전체를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혁명 러시아를 본떠 병사 평의회를 세웠습니다.
이 반란은 마치 도미노처럼 독일 전역으로 번져 제국의 군대는 와해됐습니다. 곳곳에서 병사와 노동자들이 민주적 권력 기구인 평의회를 세웠고, 사회주의를 요구했습니다.
혁명으로 왕정은 무너졌고, 노동자 평의회와 병사 평의회가 독일에서 진정한 권력을 쥔 듯했습니다.
그런데 혁명에 참여한 노동자와 병사들은 대부분 생애 처음으로 정치적 행동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은 마치 새 사회로 이끌 정당처럼 보였습니다.
사민당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노동자 신문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친숙했고, 노동계급에 기반이 넓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민당은 사회주의를 표방했고, 그 지도자들은 말로는 혁명의 편을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사민당의 실체는 딴판이었습니다. 사민당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기성 체제하에서 노동자들의 삶을 조금씩 개선하는 것이었지,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향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민당이 보기에 기존 (자본주의) 국가는 개혁을 실현할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민당은 전쟁이 시작됐을 때 “우리의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며 황제의 전쟁 동원령을 지지했습니다. 사민당은 전제정 러시아가 승리하면 독일의 ‘평화로운’ 발전이 위험에 처할 거라고 봤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사민당 안에서도 전쟁 반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1917년 사민당 지도부는 그런 국회의원 여럿과 당원 수만 명을 쫓아냈습니다. 그때 사민당에서 쫓겨난 이들은 독립사회민주당(독립사민당)을 결성하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1918년 11월 대세가 혁명 쪽으로 기울자 사민당은 노동자와 병사들 앞에서 공화정을 선언하고, 평의회 운동에 올라탔습니다. 사민당의 목적은 반란을 중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민당 지도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혁명을 죄악처럼 혐오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군장성 등의 옛 지배자들은 사민당이 자신들을 구원할 유일한 대안임을 알고 정부를 사민당에 넘겼습니다.
평의회와 사회민주당
11월 혁명으로 새 권력기관인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평의회는 사회를 새로운 원리로 운영할 만큼 잘 조직되지 않았고, 추구하는 목표도 저마다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평의회들이 행사하는 권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사민당은 그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평의회들은 1918년 12월 전국 대회를 열고는 사민당의 조언에 따라 1919년 1월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지도했던 장군들과 전쟁을 지지했던 자본가·정치인들, 그들의 언론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그들과 동등하게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혁명을 분쇄하려는 자들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평의회는 새 사회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으면서도, 그런 열망에 부합하지 않는 친자본주의 의회에 스스로 권력을 넘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민당의 이런 계획을 간파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파르타쿠스동맹이라는 혁명적 단체를 이끌었습니다. 리프크네히트는 베를린 노동자·병사 평의회에서 “사민당은 혁명의 적”이라고 연설했습니다. 하지만 “분열을 조장한다”는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는 병사들은 사회주의 정당들 간의 차이를 알지 못했고, 사민당 비판을 단결을 해치는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혁명은 대중이 역사의 무대에 전면 등장하는 사건이지만, 대중은 낡은 사회의 관념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혁명에 나섭니다. 혁명이 계속 전진하려면 이런 낡은 상식이 경험을 통해 혁명적 의식으로 업그레이드 돼야만 합니다.
당시 사민당 왼쪽에 있는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작은 데다 응집력도 약한 조직이었습니다. 독립사민당이 훨씬 크고 노동계급 안에서 영향력도 훨씬 컸습니다.
그런데 독립사민당은 중간주의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중간주의는 개혁주의와 혁명적 정치 사이에서 동요하는 정치 세력을 가리킵니다. 독립사회민주당은 전쟁에는 반대했지만 병사 반란을 선동하는 것은 거부했고, 진지하게 사회 변화를 바라지만 국회의원들을 믿자고 주장했습니다.
사민당에 대한 환상에 더해, 독립사민당까지 총선 실시를 주장하자 노동자들은 그것이 대단히 좌파적인 선택이라고 봤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총선 실시는 당시에 분명 후퇴이지만, 그것이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시행착오라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선거와 정권 교체 후에도 노동자들이 계속 변화를 요구하리라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평의회들은 정부와 충돌하고, 평의회 지도부가 더 급진적인 인물로 교체될 가능성이 있음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혁명이 선거 같은 정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사회 관계를 바꾸는 사회 혁명,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터의 노동자 투쟁이 결합돼 사회주의 혁명의 단초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사슬은 그것이 생겨나는 곳에서 끊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때이른 봉기
그런데 반혁명 세력도 의회가 권력을 넘겨받더라도 그 권력이 실질적이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노동자 평의회 및 병사 평의회와 산하 무장 조직들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민당과 반혁명 세력은 옛 질서를 회복하려는 사민당 정부의 의도를 다수 노동자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혁명적 좌파 세력을 고립시켜 그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정부는 섣부른 행동을 유도해서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군대를 투입하려 했습니다. 1919년 1월 사민당 정부가 베를린 경찰청장을 해임한 것은 이를 위한 용의주도한 도발이었습니다. 당시 베를린 경찰청은 11월 혁명으로 노동자들이 접수한 상태였고, 경찰청장은 독립사회민주당 좌파가 맡고 있었습니다.
베를린 경찰청장 해임에 많은 노동자들이 분노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자극받아 독립사회민주당 지부와 스파르타쿠스동맹 투사들이 무장 봉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들의 정서를 과대평가한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베를린 경찰청장 해임에는 반대했지만 권력을 장악할 준비는 돼 있지 않았습니다.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봉기는 고립되고 분쇄됐습니다. 이 투쟁은 “스파르타쿠스 봉기”로 불립니다. 그러나 사실 스파르타쿠스동맹 지도부는 그 봉기에 반대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열린 독일 공산당 창당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할 전투인 무장 봉기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참을성 있게 의회 선거와 기존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며 평의회 다수를 설득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원의 다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쉽게 사태에 휩쓸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봉기가 시작된 이상 공산당 지도부는 반혁명적 공세를 물리치며 질서정연한 후퇴를 하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이 그런 방향을 제시하고 설득할 만한 조직을 기층에 갖고 있지 못한 탓에 결국 봉기는 분쇄됐고 룩셈부르크는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돼 살해됐습니다.
이는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볼셰비키와의 결정적 차이였습니다. 1919년 1월 독일과 비슷한 일이 1917년 7월 러시아에서도 벌어졌습니다. 당시에 레닌은 권력을 잡는 것이 아직 섣부르고 위험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상당수 대중이 일촉즉발의 행동에 나서자 볼셰비키는 그들과 함께하면서도 질서정연한 후퇴를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민주적 집중 원리에 근거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튼튼히 뿌리 박은 정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전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지 불과 한 달 후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반란에 나섰습니다. 1월 총선으로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혁명에서 후퇴하고 경제 정책도 여전히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룩셈부르크는 이제 죽고 없지만 그녀의 전망은 옳았던 것입니다.
독일 최대 산업 지역 루르와 중부 독일에서 투쟁이 분출했고, 베를린·뮌헨 등지에 그 여파가 미쳤습니다. 만약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행동을 조율해서 정부를 타격했더라면 정부와 반혁명 세력은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그렇게 투쟁을 지도할 전국적인 혁명적 정치 조직이 없었습니다.
반면 사민당 정부는 전국 상황을 파악하면서 반혁명적 부대를 한 지역, 그다음 지역에 차례로 보내어 투쟁을 진압했습니다. 정부는 “산업민주주의”나 “사회화’ 같은 좌파적 냄새를 풍기는 약속을 내놓고 시간 끄는 식으로 각 지역 투쟁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독일 혁명사에서 가장 애타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 패배 후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민당 정부에 대한 환상이 크게 꺾였습니다. 사민당이 말로는 사회주의를 떠들지만 실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이제 많은 노동자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1920년 카프 쿠데타
로자 룩셈부르크는 살해당하기 직전에 쓴 글에서 군부가 사민당에 의존할 필요가 사라지면 사민당까지도 쓸어버리려 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1920년 3월에 일어났습니다. 우익 정치인과 연계된 군부 일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사민당 정부를 전복하려 한 것입니다. 이를 카프 쿠데타라고 합니다.
그동안 사민당은 군대를 “헌정 기구”라며 존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군대가 선출된 정부와 사민당을 향해 총구를 겨눴습니다. 사민당 소속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는 쿠데타를 멈춰 달라고 군부에 애원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쿠데타 군대는 손쉽게 베를린에 입성했고, 사민당 정부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사민당에 정나미가 떨어진 노동자라 할지라도, 군부가 복귀하면 얼마나 잔혹하게 나올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총파업에 나서고 무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루르 지역에서는 노동자 군사조직이 상당해 “붉은 군대”라고 불렸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총파업과 국지적 봉기들에 밀려 줄행랑을 쳐야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처럼 단호한 반격으로 쿠데타를 물리쳤습니다. 덕분에 사민당 정부는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사민당은 쿠데타에 가담한 자들을 최대한 구제하고, 쿠데타에 반대해 벌어진 파업과 봉기를 끝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군부에 대한 확실한 대비책이 마련되기 전에는 투쟁을 접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기세 때문에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업무 복귀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자들은 전국적 투쟁을 이끌 조직이 없었고, 지역별 노동자 부대들의 의견을 조율할 수단도 없었습니다. 쿠데타 이후 진로를 두고 노동자 정치 조직들은 혼란과 무능을 드러냈습니다.
사민당 정부가 쿠데타 가담 세력을 대부분 면책해 주는데도 독일 노총과 독립사민당은 투쟁 종료 또는 일시 중지를 선언했습니다. 루르의 “붉은 군대”는 전투 중단이냐 지속이냐로 분열했고, 사민당 정부는 쿠데타 가담 병력을 재기용해 루르를 점령했습니다.
좌파의 반격이 사그라들자 군대는 다시 독일 전역을 누비기 시작했고, 새로 치른 총선에서 우익의 표는 크게 늘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1917년 8월 말 러시아에서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저지하고 10월 혁명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간 러시아 혁명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카프 쿠데타를 저지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눈에 띄게 좌경화했습니다. 독립사민당의 지지가 크게 늘었고, 그 전까지만 해도 고립된 소수였던 공산당의 영향력도 상당히 커졌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마르크스는 “혁명은 지배계급을 달리 타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필요하기도 하지만, 노동계급이 새 사회에 적합한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소개한 혁명 전반부는 독일 노동계급이 “새 사회에 적합한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고통스럽게 성장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늘 다룬 시기는 러시아에서 병사와 노동자들이 차르 제국을 무너뜨린 1917년 2월에서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일어난 8월 말까지의 과정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혁명 전부터 경험 많은 볼셰비키가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대가만 치르고 새 사회에 적합한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는 데 잠시 성공했습니다.
반면 독일에서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같은 혁명가들은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는 문제를 너무 오랫동안 미루었습니다. 혁명적 전략과 전술에 따라 계급투쟁에 개입하는 경험을 쌓은 혁명적 당의 유무가 러시아와 독일의 결정적 차이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