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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독일 혁명을 기억하며

독일 혁명은 한 해 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과 대조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독일 혁명은 곰곰이 되짚을 것이 많은 20세기의 전환점이었다.

잊혀진 혁명에서 계급의 기억으로

독일 혁명은 1918년 11월에 시작돼 1923년 10월 패배할 때까지 5년 동안 지속됐다. 봉기, 대중파업, 병사 반란 등 공공연한 계급 전쟁이 나라를 뒤흔들었다. 곳곳에서 무장한 노동자들이 반혁명적인 준군사 조직들과 충돌했다.

혁명은 1918년 11월 2일에 시작됐다. 독일 북부 킬 항에 주둔해 있던 해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들의 반란은 참혹한 제1차세계대전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했다.

제1차세계대전은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끔찍한 전쟁이었다. 독일의 정치인들과 군 지휘관들은 9개월이면 끝낼 수 있다고 보며 1914년 8월에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은 4년을 끌었다.

독일 자본가들이 경쟁국 자본가들과 제국주의적 전쟁을 치른 4년 동안, 노동자들은 참호에서 피를 흘리고 고향에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전쟁 동안 노동자 170만 명이 죽었고 1916∼1917년 “순무의 겨울”(순무를 주식으로 먹어야 할 만큼 심각한 식량난 시기)에 75만 명이 아사했다.

전황도 독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쟁 마지막 해인 1918년에만 독일군 병사 4000명가량이연합군 진영으로 탈영했다. 전체 탈영병 수는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도 독일 최고사령부는 함대에 출전을 명령했다. 1918년 10월 말 빌헬름스하펜 군항의 해군 병사들이 함대의 보일러를 고장 냈다. 출항을 거부한 쾨니히호의 한 병사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항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쌓일 대로 쌓인 대중의 비통함이 지배자들을 상대로 폭발했다. 킬 해군 병사 반란은 순식간에 봉기로 발전해 독일 북부 도시들로 확산됐다. 혁명은 불과 며칠 만에 베를린에 당도했다. 11월 9일 황제(카이저)가 사퇴했다.

이제 프로이센 왕정이 붕괴하고 군주제가 폐지됐다. 권위를 가진 의회도 없었다. 독일 국가 기구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노동자·병사·해군 평의회가 당시 유일하게 권력 비슷한 기관이었다.(그러나 새로운 토대 위에서 나라 전체를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전국적으로 조율되는 체계적 조직이 되지는 못했다. 일종의 노동자 권력의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이들이 독일을 통치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독일 혁명은 제1차세계대전을 끝장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무너지면서 제1차세계대전의 동부 전선에서 전투가 중단됐다. 곧이어 1년 뒤 독일 혁명으로 서부 전선의 전투마저 중단되면서 전쟁은 마침내 종료됐다. 독일 혁명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반전 평화 운동이었다.

그리고 독일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의 생존 자체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독일은 당시 유럽 대륙에서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나라였다.(1917년 러시아는 여전히 대체로 농업 국가였다.) 역사가 오랜 노동조합 운동과 사회주의 조직이 있었다. 그런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나서면서 독일 자본주의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

5년에 걸친 독일의 혁명적 투쟁들은 대중적 개혁주의의 전통이 있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함을 보여 줬다.(1918∼1923년 독일은 1917년 러시아보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나 한국과 더 닮아 있었다.)

1918년 11월 이전에는 혁명은 차르 전제정 치하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지 “문명한 서구”에는 별 관계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900년에 시작된 독일 사회민주당 내 논쟁도 이와 관련돼 있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에서는 개혁이냐 혁명이냐, 즉 사회 진보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해 가능하냐 아니면 점진적 변화를 통해 가능하냐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를 대변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수정주의에 대해 혁명적 비판을 했다. 그런데 둘 다 당시에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다수의 지지를 받은 것은 카를 카우츠키의 중간주의적 입장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그러나 1918년 11월 2일 킬 해군 병사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대중의 불만이 폭발하자,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가 유럽의 변방 러시아에서 유럽의 중심지로 옮겨 왔다.

무엇보다, 독일 혁명은 그 전해(1917년)에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러시아의 고립을 타개하고, 유럽으로 혁명을 확산시킬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독일 혁명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제공한 영감에 크게 빚졌다. 그러나 일단 독일 혁명이 시작되자 볼셰비키 혁명의 운명은 독일 혁명의 성공에 매우 크게 달리게 됐다.

1917년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260만 명이었다. 그나마도 1억 명의 농민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유럽의 선진 경제, 특히 강력한 산업 노동인구와 선진 경제를 보유한 독일의 지원에 달려 있었다. 독일 혁명의 발발에 “수많은 러시아 노동자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던 까닭이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독일 해군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은 독일 전역으로 번져 제1차세계대전을 끝내고 혁명으로 이어졌다

사회민주당은 어떻게 혁명을 가로막았는가?

독일 혁명이 성공했다면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은 역사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두 독재자의 등장은 독일 혁명의 패배가 낳은 끔찍한 결과였다.

러시아 혁명이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포 정치로 이어진 것은 혁명의 필연적 결말이 아니고, 독일 혁명이 패배한 결과였다. 독일 혁명의 패배로 말미암은 국제 혁명의 실패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반혁명이 최종 승리했다. 스탈린은 1923년 10월 독일 혁명이 최종 패배하자 그 이듬해에 ‘일국사회주의’를 천명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일국사회주의’가 국제 혁명이라는 모험으로 골머리를 앓고 싶지 않던 “국가 관료들의 정서를 명확히 표현했다”고 지적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23년만 해도 비중 있는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 혁명이 패배하자 히틀러의 반동적 그림자가 어렴풋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 뒤 1929년 대공황은 급기야 히틀러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졌다. 독일에서 파시즘은 공산주의자들이 적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강력했지만 적을 완전히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승리했다.

그렇다면 독일 혁명은 왜 패배했는가?

정치적 ‘왕따’에서 자본주의의 구원자로

독일 혁명에서 핵심 정치 행위 세력은 우익 장성, 사회민주당, 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이었다. 혁명이 터지자 독일 지배계급은 재빠르게 사회민주당(SPD)을 자기편으로 감싸 끌어들였다.

사회민주당은 1875년에 창당해 1890년부터 합법 활동을 했다. 사회민주당은 당원 수가 100만 명이 넘는, 당시 세계 최대의 노동계급 조직이었다. 그리고 12개의 일간지, 문화 단체들, 노동현장 조직들과 국회의원 등을 통해 독일 노동자들의 삶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혁명이 터진 직후 군부에게서 내각 구성권을 넘겨받은 문민 정부(바덴의 막스 공公)는 11월 7일에 사회민주당 지도자 프리드리히 에버트를 만나 이렇게 물었다.(오래 전부터 한국 노동조합과 진보 정당들을 지원해 온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그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것이다.)

“나는 이제 황제에게 퇴위를 권고할 생각입니다. 내가 황제를 설득해 낸다면 혁명과의 싸움에서 당신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자 에버트는 이렇게 답했다. “황제가 양위하지 않으면 혁명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혁명을 죄악처럼 싫어합니다.”

사회민주당은 병사들의 봉기가 볼셰비키화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 그 체제 안에서 진보적 변화를 이루고자 한 개혁주의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처했지만, 이미 1914년 독일 정부의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지배자들의 노동계급 공격들 ― 배급제, 전쟁 노력 조처들, 노동조건 악화 ― 을 도왔다.

사회민주당의 주류 지도자들은 조국방위주의를 앞세웠다. 곧, 반동의 보루인 러시아의 차르가 독일 민중이 이룩한 민주적 성과를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하려면 독일의 전쟁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차르 체제가 붕괴했다. 이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러시아가 아니라 프로이센 국가와 대기업의 전쟁 정책이 더 위협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혁명은 반대했다.

지배계급은 사회민주당이 대규모 혁명 운동을 억제해 주기를 기대했다. 부르주아 정치인 구스타프 스트레스만은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 향후 2∼3년 동안 사회민주당이 없는 정부는 정말이지 불가능할 것 같다. 안 그러면 우리가 총파업 물결에 휘청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 전에 사회민주당은 대체로 지배계급에게 멸시받는 정치적 ‘왕따’였다. 이제 독일 국가는 사회민주당에 최고 공직 자리를 내줬다.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새 공화국의 대통령이 됐다.

반동

한편, 킬에서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은 사회민주당원인 구스타프 노스케를 소비에트 의장으로 추대했다.

혁명 얼마 전까지 자본가 정당을 지지하고 사회민주당을 극좌파로 여기던 사람들이 생전 처음 정치 투쟁에 참가했다. 그들은 사회민주당과 다른 사회주의 정당을 구별하지 못했다. 사회민주당이 전에는 왕정을 지지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끼리도 누가 누군지 잘 몰랐습니다. 하물며 베를린에서 온 노스케가 어떤 사람인지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가 사회민주당 의원이란 거밖엔 몰랐습니다.”(반란 병사들의 리더인 카를 아를텔트가 한 말)

그 결과, 노스케가 정부 입장에서는 킬 혁명 진압 책임자이고, 해군 병사들과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혁명 촉진 대표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러나 노스케는 우익적 준군사 조직 ‘자유군단’(the Freikorps)을 이끈 자다. ‘자유군단’은 대부분 중급 장교 출신 자원자들로 구성됐다. ‘자유군단’은 1919년 내내 좌파와 노동계급을 상대로 테러 활동을 벌였는데, 특히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를 진압하면서 걸출한 혁명 운동의 리더들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했다.

그 뒤 노스케는 “누군가는 맹견이 돼야 한다”며 바이마르공화국의 반동화를 주도했다. 이것은 훗날 나치의 지옥문을 열었다.

11월 혁명은 즉각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방어에 힘입어 낡은 국가 기구가 재건됐다. 그리고 14년 뒤 반동적 ‘자유군단’의 후예인 나치 돌격대가 사회민주당을 비롯해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했다.

독일공산당이 남긴 비극적 교훈

독일 혁명이 패배한 또 다른 이유는 독립적인 혁명적 노동자 조직이 취약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사회민주당에 기대를 걸었던 노동자들도 혁명을 경험하면서 생각이 엄청나게 바뀌었고, 그들의 요구도 급진적으로 변했다.

황제가 타도된 뒤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 물결이 시작됐다. 파업 일수는 1918년 520만 일에서 1920년 5400만 일로 급증했다. 노동자들이 물밀듯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혁명 전에 150만 명이었던 노동조합원 수가 1919년 12월 73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사회민주당이 지배계급과 동맹하고 있는데다 독립적인 혁명적 노동자 조직도 취약하자 지배계급의 일부가 오판했다. 1920년 3월 우익 군 장성들이 쿠데타(무력정변)를 일으켜 사회민주당을 제거하고자 했다 ― ‘카프 쿠데타’.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때로 반혁명의 채찍이 혁명을 심화시킬 수 있다. 노동자들은 대규모 총파업으로 맞섰다. 쿠데타는 실패했다.

사회 양극화의 심화와 함께 노동계급의 좌경 급진화도 진행됐다. 사회민주당은 좌파계열 정당들에 지지를 빼앗겼다.

처음에 사회민주당이 분열한 때는 전쟁 동안이었다. 1917년 사회민주당 우파 지도부는 전쟁을 반대한 소수파를 축출했다. 쫓겨난 소수파들은 독립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독립사회민주당은 혁명적 정당이 아니었다. 말은 혁명적으로 하면서 실천은 개혁주의적으로 하는 중간주의 정당이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카를 카우츠키도 독립사회민주당에 합류했다. 카우츠키는 전쟁을 끝내는 것을 지지했지만, 해군 병사들의 반란 선동도 반대했다.

잇달은 실수

그럼에도 독립사회민주당은 수십 명의 당직자와 의원들, 일간 신문, 노동조합 임원 등 사회민주당 기구의 의미 있는 부분을 떼어 냈다. 독립사회민주당은 합법 정당이었고, 덕분에 공개 집회가 가능했다. 그리하여 전쟁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을 수렴할 수 있었다. 사회민주당에서 분리한 지 6개월 만에 당원이 12만 명으로 늘었다(사회민주당 15만 명).

그러나 독립사회민주당도 급진화하는 노동계급에게 적절한 혁명적 리더십을 제공할 수 없었다. 이제 독립사회민주당이 분열했다. 독립사회민주당 당원 80만 명 중 40만 명이 가장 일관된 혁명적 정당인 독일공산당에 가입했다. 독일공산당은 50만 명 규모의 정당이 됐다.

혁명적 정당이 없어서 실패한 혁명들과는 다르게, 독일에서는 혁명적 정당이 있었다. 실제로 1920년 이후 독일 혁명의 역사는 독일공산당의 역사이기도 했다. 수백만 노동자들이 독일공산당의 리더십을 기대했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은 요구되는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연거푸 재앙적인 실수를 했다.

독일공산당은 군주제가 타도되고 나서야 창당했다. 독일공산당은 혁명적 상황에서 대중적인 혁명적 정당을 건설해야 하는 거의 불가능한 과제에 직면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마침내 사회민주당에서 탈당해 공산당을 창당한 때는 1918년 12월이었다. 룩셈부르크는 100만 명 규모의 정당에서 20년을 보낸 뒤에 겨우 수천 명의 지지자들을 확보했다. 그들은 열정적이었지만 대체로 경험이 없었다. 혁명의 한복판에서 창당하면서 훈련의 시간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가장 유능한 지도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9년에 살해당했다. 그래서 독일공산당 지도부는 너무도 자주 주저하고 좌우 동요를 반복했다.

혁명의 최초 국면에서는 소수의 전투적 노동자들이 다수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지 않은 채 즉각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나섰다. 그 결과 1919년 1월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 봉기”는 자유군단에 의해 분쇄됐고, 사회민주당은 이를 방조했다.

1919년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 봉기”

1921년 3월에 독일공산당은 독일 중부에서 벌어진 광원들의 격렬한 방어적 파업을 국가 권력을 상대로 한 혁명적 공세와 봉기로 전환하고자 했다(‘3월 행동’).

혁명가들이 적극적인 소수의 무장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봉기를 재촉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공세 이론’). 그 결과 파업 노동자와 출근 노동자의 물리적 충돌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독일공산당 내 초좌파 경향이 이 행동을 주도했다. 초좌파는 이전에 패배와 어려움을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운동에 막 입문해 행동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로서, 노동조합 속 활동이나 선거 출마를 시간 낭비라며 기각하는 경향이었다. 방금 전에 독립사회민주당에서 탈당한 사람들은 사회민주당·독립사회민주당과 공동 투쟁하는 것을 반대했다.

국제적으로는 1920년 9월에 이탈리아의 공장점거 운동이 패배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사회당의 중간주의 지도부(세라티)가 봉기를 조직하지 않은 것이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 패배에 대한 반발심이 독일에서는 초좌파적 모험주의를 부추긴 것이다. 이렇게 개혁주의와 초좌파주의는 서로를 강화하는 효과를 낸다.

공동전선

혁명적 정당의 임무는 노동자들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혁명을 수행하려는 노동자들을 지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은 노동계급의 행동 없이 투쟁에 나섰다가 산산조각 났다. 몇 주도 안 돼 당원 수가 20만 명으로 줄었다.

중요한 문제는 공동전선이었다. 가혹한 인플레이션과 정부 탄압에 맞서 노동자 조건을 방어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함으로써만 노동자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즉, 독일공산당은 여전히 개혁주의 사상에 이끌리는 노동자들을 즉각적 이익을 위한 공동 투쟁에 끌어들이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실천에서 공산당 정치의 우월성을 입증해야 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이런 접근법을 채택하기 시작해 공동전선에 참여했다. 그 결과 공산당은 규모와 영향력 모두 성장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공산당의 단결 행동 요청을 무시했지만,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기층 당원들에게 직접 호소했다. 그 덕분에 1921∼1922년 공산당원 수는 4만 명이 늘었다. 사회민주당은 대략 그 비슷하게 당원 수가 줄었다.

1923년 새로운 혁명적 위기가 도래하자 독일 자본주의의 중심이 흔들렸다. 프랑스 군대가 루르의 핵심 공업 지대를 다시 점령했다.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거의 마비됐다.

대중 파업이 분출했다. 혁명의 시작 국면에서는 실종돼 있던 요소가 이제는 존재했다. 대중적 공산당이 노동계급에 실질적 영향을 미쳤다. 독일 산업 중심지에서 공산당이 사회민주당보다 우세했다. 전체 노동조합원의 3분의 1인 250만 명을 지역 수준에서 조직할 수 있는 위치가 됐다.

기회를 놓치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 대다수는 사태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1923년 8월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독일의 10월 혁명이 빠르게 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세가 너무 유동적이어서 혁명가들의 공격만이 진정한 세력 균형을 밝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3월 행동’의 경험 때문에 소심해진 공산당 지도부는 1919년과는 정반대의 실수를 했다. 개혁주의적 좌파 일부분과 활동하던 방식과 심지어 그들이 미치는 영향력과 단절하지 못해 대중 반란을 지도할 수 없었다.

독일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대안 제시를 기대했지만, 공산당은 무기력했다. “무장 경계는 오랫동안 계속됐지만, 공격 신호는 울리지 않았다.”

공산당 지도부는 10월 21일 총파업과 독일 혁명을 포기했다. 혁명이 거의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패배했다. 혁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이 결정적 순간에 행동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래서 독일 혁명의 패배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작고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이 독일 혁명에 관해 쓴 책의 제목대로 잃어버린 혁명(the lost revolution), 즉 기회를 놓친 혁명이었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혁명적 변화를 원했지만, 이 에너지를 동력으로 만들고 조율할 혁명적 정당이 너무 늦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독일 혁명의 비극이다. 역사는 기관차다. 그러나 그 기관차는 혁명가들이 올라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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